깨달음의 심리학 #65

"깨달음의 짝퉁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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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처음부터 두 가지의 결함을 안고 시작한다.


첫 번째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다른 이의 깨달음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깨달음은 삶의 현상이며, 동시에 그렇게 사는 삶의 양식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주관적 체험의 영역이며, 우리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첫키스를 체험한 이에게, 그가 레몬사탕의 맛을 느끼고 귀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의 첫키스는 진정한 첫키스라고 아니라고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삶과 연관된 한 어떤 깨달음도 짝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깨달음의 체험을 계기로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양산하던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 깨달음이 짝퉁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이 짝퉁이라는 말과 같다. 대단히 폭력적인 얘기며, 애초 성립될 수조차 없는 얘기다.


그러나 이처럼 치명적인 결함들을 내포하고서라도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아의 과대망상에 대해서다. 깨달음을 위장하려는 자아팽창에 대해서다.


이것에는 의외로 분명한 판정기준이 있다. 수행론을 잘 구조화한 경전들뿐 아니라, 종교심리학은 이러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발전해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고전인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대표적인 자아팽창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손오공은 자기의 지성에 의존해 그 지성의 힘으로 각종 도술을 익히며 종국에는 강인한 육체와 긴 수명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이 우주에서 가장 높은 존재임을 참칭한다.


손오공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이 서유기 초반부의 주제는 흡사 바벨탑 신화의 동양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앎에 대한 궁극적 예찬이 있으며, 가장 탁월한 앎을 가진 이는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망상이 담겨 있다.


이것은 앎의 힘을 통해 자신의 몸을 극복하고자 하는 꿈이며, 곧 시간에 대해 승리하고자 하는 꿈이다.


생.존.에. 대.한. 공.포.가. 아.주. 큰. 이.들.이. 이.러.한. 꿈.을. 깨.달.음.이.라.고. 자.주. 믿.고. 싶.어.한.다. 또한 그 실현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깨달음의 짝퉁이라고 명명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한층 분명해진다.


'삶'이 아니라 '앎'에 의존한 하나의 체험 내지 그러한 행동양식을 우리는 지금 깨달음의 짝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언제나 전형적인 자아의 체험이자 자아의 행동양식이다.


자.아.는. 삶.을. 싫.어.한.다.


그 자신이 허구의 세계에서 구성되어 있는 추상적 이념물일 뿐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는 사실 삶이 두렵다. 두려운 만큼 삶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대상물처럼 뒤바꾸려 한다. 이로써 자아에게 삶은 성가신 정보처리의 과제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자아는 이제 유능한 정보현실의 주체며, 곧 '앎의 권위자'다.


"저에게 이런 놀라운 경험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짝퉁으로 드러나있는 자아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그에게는 경험이라는 것이 정보적 가치로 환원될 앎의 소재다. 자기가 어떠한 경험을 했다는 것은 자기가 그것에 대한 '앎의 권위자'가 되었다는 증거다. 역으로, 더 우월한 '앎의 권위자'가 되기 위해 자아는 경험들을 수집한다.


이것은 자아가 어떻게 삶을 지배해가려 하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모습이다.


자.아.는.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앎.으.로. 바.꾸.려.고. 한.다.


왜 그러한가?


그렇게 앎의 영토가 넓어져야, 앎으로 구성된 자아 자신이 더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자아의 핵심적인 속성을 정말로 분명하게 말했다.


자.아.는. 생.존.기.계.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게는 우리 몸의 생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아.는. 자.아. 자.신.의. 생.존.에.만. 집.착.한.다.


매일같이 변해가는 몸의 삶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변하지 않을 천도복숭아 같은 앎만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자아가 싸우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시간이다.


자아는 시간에 승리한 것 같은 경험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보상의 문제다.


자신에게서 흘러간 시간에 대해 자아는 과대한 보상을 꿈꾼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제가 지금껏 해온 것들이 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더 제대로 된 제가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과거에 했던 것들은 다 제대로 된 것들입니다. 과거에도 저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아는 '삶'을 '앎'으로 치환하듯이, '자신에게서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을 '위대한 권위를 가진 자신의 정체성'으로 치환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처럼 '삶'을 '앎'으로 바꿔 소유하듯이, 자아는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바꿔 소유한다.


이것이 자아가 시간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방식이다.


그러니 정말로 웃기는 일이 펼쳐진다.


시간낭비를 가장 많이 한 상황에 대해, 깨달음이라고 하는 단어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자아는 반드시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가 마치 커다란 보상을 받은 듯이 꾸며내지 않고는, 단지 자신이 허송세월을 하며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무수한 깨달음의 짝퉁들이 양산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한 달간 가만히 있으면 깨닫게 된다는 메뉴얼 같은 말을 들은 이가 있다. 그는 한달 후에 반드시 깨달은 척한다. 처음에는 너무나 답답해 견딜 수 없었지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온전하며, 그렇게 온전한 것을 바라보는 온전한 자신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어떤 마음이 일어나든 "이 마음도 괜찮아."만을 반복하며 있어보라는 또 다른 메뉴얼을 접한 이가 있다. 그는 멍하니 주문처럼 그 일만을 반복하는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반드시 깨달은 척한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감정들이 자기 안에 수용되며 그 감정들이 얼마나 온전했는지를 알게 되고, 더는 감정에 영향받지 않는 초연한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는 '앎'을 의존하지 말고 집에 있는 책들을 다 갖다버리면 깨닫게 된다는 말을 들은 이가 있다. 그는 넷플릭스와 인터넷은 조금 봤지만 어떻든 책은 안보았으니 메뉴얼을 어긴 것은 아니라 괜찮을 것 같은 일정 시간을 보낸 뒤에는 반드시 깨달은 척한다. 몰라서 불안하던 심정 속에 많이 떨렸지만, 그 떨림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신을 만나게 해주었는지, 또 그러한 모름의 자신이 얼마나 온전했는지를 말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천재작가라고 믿으며 써지지도 않는 글을 계속 써보려는 시간을 길게 보낸 그 끝에, 반드시 깨달은 척한다.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못났는지, 그럼에도 그러한 자신을 거부하고자 천재인 척해보려 했지만, 실은 그 약하고 못난 자신이 얼마나 온전했는지를 이제야 만났다며, 자기 마음에 대한 글쓰기를 하면 깨닫게 된다는 메뉴얼을 만든다.


또 어떤 이는 재능도 없고 노력도 안하지만 사람들에게 최고의 능력자처럼 보이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오랜 방구석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 반드시 깨달은 척한다. 깨닫고 싶은 이는 이미 깨달은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연출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봐주는 시선의 힘을 통해 진짜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메뉴얼을 꾸며낸다.


이 다채로운 깨달음의 짝퉁들은 전부 다 자신의 시간을 망각하고자 정신승리의 체험 같은 것을 보상물로서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 체험의 양상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기가 시간 안에 살고 있던 자기로부터 빠져나와 제3자적인 메타인지의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즉, 마치 시간 밖에 서있는 것 같은 자기 자신의 초월적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깨달음의 짝퉁들은 이처럼 시간을 초월한 메타인지적 정체성을 만들어 자기에게 보상하는 방식으로 시간에 대해 영구히 승리하기를 꿈꾼다.


그러한 메타인지적 자기는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으며, 그 모든 생존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믿어진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최후의 자아팽창의 내용이다.


'가장 초월적인 메타인지적 앎'을 통해 '가장 초월적인 자기정체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과대망상의 이야기다.


깨달음의 짝퉁들은 어느 변주의 형태나 다 이 요소를 핵심적으로 포함한다.


그 주체들은 이러한 '메타인지적 경험'을 자신이 이제 '앎의 권위자'가 된 증거로 바로 치환한다. 그리고는 다 어디서 주워들은 불교 얘기, 심리학 얘기, 꿈 얘기 같은 것을 하며, 자기가 이제 모든 것을 최고의 지혜로 통합할 수 있는 놀라운 스승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한다. 사실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시간 덤벼! 이제 두렵지 않아. 내가 다 소유해줄게. 덤벼봐, 시간!"


시간을 우습게 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을 우습게 보는 이는 원래 가장 그 자신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이다.


자신의 삶에서 깨달은 이들은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우습게 살았는지를 바로 보고는 크게 웃는다.


그 시간은 보상되어야 할 시간이 아니다. 큰 웃음으로 다만 흘러가질 시간이다.


깨달은 이들이 과거에 하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이제 싸이월드에 그런 일기를 쓰지 않는 것과 같다.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양산하던 일들은 그것이 고통인 줄 알면 더는 집행되지 않는다. 반복이 멈춘다.


그러나 깨달음의 짝퉁들은 각종 SNS와 유튜브 등지에, 자신이 과거에 게시한 싸이월드 일기와 사진들을 퍼와 반복적으로 전시해낸다. 그것들을 자기의 재산이라고 믿고 있는 까닭이다. 그 모든 '소유된 시간'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앎의 권위자'인지에 대한 증거들이며, 남용된 인생에 대한 보상물들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인생의 남용은 실시간으로 지속된다.


두.려.움.이. 남.용.을. 야.기.한.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깊.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큰 이들은 늘 에너지를 낭비하는 남용의 패턴을 드러낸다.


자아는 이처럼 언제나 비효율적이다. 팽창된 자아는 더욱 비효율적이다.


시간과 싸워 승리하려는 일은 최고로 비효율적이며, 가장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팽창된 자아는 이 일만을 한다.


깨달음은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과도 같다. 여기에는 분명하게 하나의 인격적 죽음이 있다. 그 전까지 살았던 인생은 자기의 인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일종의 분기점이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삶'이라고 말한다면, 깨달음은 정말로 새로운 삶이다. 그래서 이것은 허구적 구성물인 자아의 경험이 아니다. 자아는 새로워질 수 없다. 늘 형상을 바꾸는 척해도 자아는 언제나 그 상태 그대로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아주는 척하는 자아는 노골적이다. 그렇게 가장 자기를 가장 높다고 가정된 현재 그 상태로만 지속하려고 한다. 자아 자신의 생존만을 꿈꾼다.


깨달음의 짝퉁들은 이처럼 가장 자아의 일을 하면서, 자기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를 상냥하게 알아봐주는 자아 밖의 것이라고 위장하는 기만의 작용들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짝퉁들은 언제나 생존의 주제에 과도하게 쫄아 있다. 이것은 돈에 쫄아 있다는 것보다도 더욱 분명하게는 권위에 쫄아 있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자기가 권위자로 보이지 않을까봐, 또는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까봐 이 주체들은 큰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듯한 어떠한 소재를 경험하면, 이들은 자기도 그 소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자기의 권위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호소한다. 열렬하게도 '그런 척'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니체에 대해 해석한 얘기를 주워듣고는 자기가 니체에 대해 잘 아는 권위자인 것처럼 추종자들에게 떠들다가 그 실체적 진상이 드러날 것 같은 위협감을 느끼면, 학문적 계보도 모른 채 잘 해석되지도 않는 니체 책을 슬쩍 들추어보며 자기가 흉내내고 있던 그 해석틀에 맞는 구절 같은 것을 임의로 끼워맞추어 해석한 뒤, 이제 자기도 니체를 직접 읽었고 니체 정도는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는 앎의 권위자인 척하는 식이다.


한번 이렇게 짝퉁이 되기 시작하면 계속 짝퉁이 될 수밖에는 없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로만 회피되는 까닭이다.


자아는 늘 이렇게 살기에 피곤한 인생이다.


자.아.는. 나.의. 짝.퉁.이라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이 말은 이해하기에 뭔가 어렵거나 이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깨달음의 짝퉁이 깨달음인 척하듯이, 자아는 언제나 자기가 나인 척한다.


그러나 전자는 '앎'에 집착되어 있으며, 후자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


전자는 시간과 싸우고 있으며, 후자는 시간으로 산다.


시간으로 산다는 것은 늘 새롭게 산다는 의미를 갖는다.


시간과 싸울 때는 늘 시간을 붙잡아야만 한다. 싸울 상대가 없으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가 늘 시간을 붙잡기 위해 쫓고 있기에, 역으로 자기가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조바심이 든다.


그러나 시간으로 살 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 시작과 끝이 다 있으며, 쫓을 것과 쫓길 것이 없다. 지.금. 이.것.만. 살.면. 완.벽.하.게. 다. 산. 것.이.다.


그렇게 매순간은 완결되며, 다음 순간은 새롭게 피어난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나로서 산다는 것은, 나는 매순간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짝퉁일래야 짝퉁일 수 없게 만드는 시간작용이다.


지금 이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 이것이 나임을 생생한 실감으로 느낄 뿐이다.


나.는. 소.유.될. 수. 없.기.에. 향.유.될. 수. 있.는. 것.이.다.


진짜를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짝퉁이 된다.


소유하던 짝퉁을 내다버리면 바로 진짜다.


이 삶의 시간은 언제나 통째로 진짜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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