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진짜 공감을 해보자"
우리가 거의 반드시 공감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동일시'입니다.
자기와 같은 것에 동질감을 느끼는 '감정이입'입니다.
여기에서 자기와 같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자기 이하'입니다. 자기와 엇비슷하기까지는 할 수 있으나 자기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은 자기보다 작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이하의 것들을 향해 동일시를 하고 감정이입을 합니다.
오늘날 세간에서 인기를 얻는 법이 무엇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사람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소재로 만들면 됩니다.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결코 더 잘나지는 않으며, 오히려 어딘가 더 못나보이는 그 적절한 밸런스가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작고 약한 것이 인기를 끄는 오늘날입니다.
크고 강한 것에 감정이입하는 이는 없습니다. 작고 약한 것에만 감정이입을 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크고 강한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우나, 작고 약한 것은 그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감정이입'과 '공감'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그 핵심입니다.
감정이입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에 하는 것이고, 공감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은 언제나 이해를 넘어섭니다.
자기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자기보다 크고 강한 것에 공감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감동입니다.
우리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우리보다 작고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크고 강해서입니다.
우리가 크고 강한 것과 접촉함으로써, 그 크고 강한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향해 흘러들어온 것이 감동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감동은 우리가 크고 강한 것에 빠져 그 내용물에 흠뻑 적셔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감정이입'과 '공감'의 핵심적인 변별점이 드러납니다.
감정이입은 자기보다 작고 약한 것을 자기 안에 품는 것이지만, 공감은 자기보다 크고 강한 것 안에 자기가 품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공감은 참여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 공감은 언제나 공감자가 더 넓은 세계 속에 참여하여 그 세계에 속하게 되며, 그만큼 자기 자신을 더욱 자유롭게 느끼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크고 강한 것에 몸을 던져 참여하는 공감의 일이, 자기 자신을 더 크고 강하게 만들어주는 셈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작고 약한 것에만 감정이입을 하고 있으면, 자기 자신도 그 작고 약한 것과 동일시되어 늘 작고 약한 것으로만 드러납니다. 그렇게 자신도 늘 작은 모습 그대로만 동일하게 지속되고 세계도 좁은 형상으로만 동일하게 지속되는 까닭에, 결국에는 모든 것이 뻔하게 느껴지는 속에서 권태와 무기력이 만성화된 불감증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이 불감증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추구되는 소재가 바로 인기입니다.
사실은 인생이 다 지루하고 막혀있지만, 남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얻으면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바로 그 인생을 살고 있는 거라구."라면서, 그래도 자기 인생이 꽤나 생기있고 의미있는 것처럼 위장가능한 정서적 이득이 생겨날 수 있어서입니다.
자기가 기르는 고양이에 질린 이가 늘 어디에서든 휴대폰을 꺼내 고양이 자랑을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오늘날을 공감을 강요하는 시대라고도 부르지만, 이제 정확하게는 감정이입을 강요하는 시대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자기를 넘어선 것들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소외시키며, 자기 이하의 것들만을 세상의 주인공처럼 억지로 만들려고 하는 이 도착적인 증세는 분명 자기기만에서 비롯합니다.
이를테면, 자기를 작고 약한 것으로 전시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객관화를 통해 자기의 작고 약한 면모를 온전한 것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는 '작고 약한 자기'와 그러한 자기를 알아주는 더욱 진정한 자기의 형태로서의 '인식론적 자기'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작고 약한 자기를 내세우고 또 그것을 스스로 알아주는 분열적 방법론을 통해 그는 크고 강한 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의 모습을 보며 감정이입을 하는 이들 또한 동일한 심리적 이득을 공유합니다. 한 인물이 전시한 작고 약한 자기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알아줌으로써 이 관객들 또한 자신들이 크고 강한 자기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가상의 찐따아이'를 앞에 세워놓고는 학부모와 선생이 그 아이를 함께 돌보면서 서로가 크고 강한 존재인 척하려는 삼류연극의 구조와도 유사합니다.
실은 그렇게 크고 강해지고 싶으면서, 오히려 크고 강한 것은 무시한 뒤 작고 약한 것만을 도구적으로 착취해서 자신의 크고 강한 모습을 얻어내려는 이 모습이 분명 자기기만입니다.
자기기만의 반대말이 공감이라는 사실도 이제 우리에게는 분명해집니다.
태어난 바 그대로 크고 강한 존재로 살고 싶어하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공감은 당신 자신을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당신은 크고 강한 것을 아주 좋아하며, 이해가 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끌립니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을 넘어선 것에, 당신을 초과한 것이며 곧 당신을 초월한 것에 매혹됩니다. 그것에 흠뻑 빠져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크고 강한 것에 진실로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당신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당신 본래의 모습에 끌리는 것은 본성입니다.
당신이 이 당신 본래의 모습에 공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살 때 당신은 언제나 작은 수준의 이해를 넘어선 아주 크고 강한 당신 자신의 모습을 얻습니다. 회복합니다. 이제 그것입니다.
당신이 본래의 당신 자신에게 참여해서, 이제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크고 강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당신에게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