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7

"작가를 불태워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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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신을 바꾸고 싶어 글을 쓰는 이들을 사랑한다. 이런 이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자신이 바뀌어서 이제 놀라운 자신이 되었다고 자신을 대단한 존재처럼 팔아먹기 위해 글을 쓰는 이들도 있다. 작가가 아니라 작놈이다. 잡놈이 귀에 친숙한 표현이다.


나는 지금 작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어려운 기준점을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글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어 글을 쓴다. 그들은 내적인 변혁을 이루고 싶어한다. 그들이 써내는 글은 그들의 가슴에서 간절하게 타오르던 그 불꽃의 외연화다. 변혁을 꿈꾸는 마음이 하도 커서 글이 된 것이다. 이들은 불로 쓴 글을 통해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불을 지핀다. 원래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어있던 각자의 불을 만나게 돕는다. 자기변혁만이 이처럼 세상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의 성분이 화학적으로 바뀌어 기폭제가 되어야만 외적인 변화는 진실로 가능하다.


분명 자신의 변혁을 꿈꾸는 이들이 글을 쓰지만, 글을 쓰면 자신이 바뀐다고 말하는 일은 속임수다. 그것은 글쓰기의 신성화다. 또 하나의 주술놀이다. 주술은 언제나 기초논리학을 무시한다. 변혁의 마음이 글이라는 결과가 되는 것이지, 글이 원인이 되어 변혁의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만약 글쓰기를 하면 자신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숨쉬기로도 자신을 바꿀 수 있어야 그 말이 진실이 된다.


글쓰기라는 것은 아주 고등한 인간의 활동이다. 숨쉬기는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단순한 활동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이다. 숨쉬기가 되지 않으면 글쓰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글쓰기는 숨쉬기를 핵심적으로 내포한다. 미적분과 사칙연산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사칙연산이 되지 않으면 미적분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미적분을 모르는 이라 하더라도 사칙연산만으로 그는 시간을 들여 동일한 것을 해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글쓰기로 가능하다고 하는 자기변화라는 것을 그는 숨쉬기로도 해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진짜 질문은 다른 곳에 있다. 이렇게 묻는 것이 나에게는 더 진실되다.


숨쉬기로도 가능한 것에 대해 왜 굳이 나는 글을 쓰고 있는가?


나는 모든 작가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미 대답된 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고 있는 그 행위로 지금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며 나는 나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다. 반대로 내가 누구인지 더욱 모르게 된다. 그만큼 내가 누구인지를 대답하고 싶어 한층 간절하다.


고등의 활동은 언제나 더 넓은 경계를 갖고 있다. 그 한계까지 갈수록 경계 밖에서 드러나는 미지의 영역도 더 커진다. 고등의 활동은 어떤 것을 다 알고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르는 것을 더욱 크게 드러내 그것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나를 더욱 모르고 싶고, 그럼으로써 더 깊게 나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고등의 활동인 글쓰기를 해나간다. 알려진 것은 전부 내가 아니다. 써진 것은 전부 내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글 밖에 있다. 더 많은 글을 쓰면서, 나는 그 모든 글 밖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자유롭다. 써진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닐 때, 나는 이 자유를 실감한다.


나는 작가다. 만드는 자다. 자신을 만드는 자가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경계를 만드는 자다. 자신이 감히 어쩔 수도 없는 거대한 것 앞에서의 경계석을 만드는 자다. 그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더 많이 만드는 자다. 더 많이 쓸수록 필연적으로 엄습하는 무력함이야말로 기적이다. 기적은 필연이다. 약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작가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빨리 그곳으로 뛰어들고 싶다. 그 품을 향해 달려가고만 싶다. 지켜진 약속 속으로 자신을 다 던지기만을 소망한다.


자신을 변혁시킨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다 던진다는 게 아니었던가? 애벌레가 나비가 될 때도 그와 같이 하지 않던가? 혹시라도 자신을 만든다고 쓰고 싶다면 자신을 버린 이에게만 그것이 가능하리라. 변혁은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다. 나비는 도무지 애벌레처럼은 살지 않는다. 애벌레의 삶을 예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는 이미 과거의 그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글이라는 것은 자기변혁을 꿈꾸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를 갈아낸 탈피의 조각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하나의 글은 하나의 버림이다. 그래서 하나의 글은 하나의 아픔이며, 하나의 눈물이다. 아픔보다 더 컸던 것은 자유를 향한 소망이었다. 그것만이 성대하게 타오른다. 오직 자유롭고자 작가라는 변태충들의 삶은 시작된다. 변태처럼, 그들은 아직도 자유라는 것을 믿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리라고 마음 깊이 갈구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변태들이다. 내면에 불을 품고 사는 이들이 그 불길에 스스로를 던져 자유의 신조(神鳥)로 변혁되는 광경을 나는 정말로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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