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15

"안개숲에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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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최선을 다했다. 노는 일에 갖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다. 같이 놀고자 사람들이 고집하는 놀이의 방식을 최대한 맞추어왔다. 폴 틸리히가 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서 신 위의 신이라는 개념을 가져 왔으며, 오늘날의 커크 슈나이더가 이를 어떻게 상담이론의 중요한 핵심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내가 쓰고자 할 때, 틸리히와 에크하르트가 누구인지 또 슈나이더가 대체 어떤 권위를 가진 사람인지를 쉽고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그 부모놀이의 압박에 대해서도 나는 늘 응해주었다. 유치원생에게 전문학술서의 주제를 3줄로 요약해달라는 그 상냥한 학부모의 저렴한 향수냄새로 가득한 치맛바람에도 나는 기꺼이 날려주었다.


나는 지금 대중주의와 충돌하는 인텔리의 비애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나는 지금 어떤 종류의 거칠고 무식한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남의 놀이방식을 무시하고는 늘 자기가 바라는 놀이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이 5세의 아이에게 상대성이론을 설명하게 만드는 일은 폭력이다.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놀고 싶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놀아야 한다면 그는 차라리 함께 그네를 탔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과 5세 아이가 함께 상대성이론을 갖고 놀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 이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이런 것을 다시 한 번 부모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자기가 아이와 같은 것을 가장 잘 키우는 부모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소꿉놀이의 일종이다. 자기의 마음을 아이처럼 보며, 또 사람들의 마음을 아이처럼 보며, 이러한 이들은 강박적으로 부모놀이만을 지속하고자 한다. 이들에게 있어 이것은 지속가능한 유일한 놀이의 형식이다. 부모놀이는 놀고 있으면서도 놀고 있지 않은 척할 수 있는 도덕적 게임의 특성을 갖는 까닭이다. 자신은 지금 노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더 좋게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논다고 비난받지 않으며 안전하게 계속 놀 수 있다. 게임을 하면서 지금 미래를 선도할 컴퓨터공부를 하고 있다는 80년대 아이들의 핑계 비슷한 것이다.


핑계는 언제나 조악하다. 조악한 것을 그리도 자신있게 던지면 조약돌의 폭력이다. 부모놀이를 하는 이는 자신이 강요해서 얻어낸 신 위의 신 같은 개념에 대한 설명을 이제 아주 조잡한 방식으로 재조립해 자신의 아이에게 적용한다. 신념 위의 신념 같은 표현을 써가며, 이것은 보편적인 신념보다 개인이 직접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주체적인 신념이 더 높은 것이라는 설명으로 시도된다.


내 가슴은 한참을 답답해진다. 조약돌에 맞아 피멍이 든 개구리의 심정이다. 틸리히는 신 위의 신이라는 개념을 "신은 없다."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하기 위해 활용했다. 보편적인 신보다 주체적인 내 자신의 신이 진정한 신이라는 식의, 자아의 소영웅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다. 그러나 부모놀이에만 몰두해있는 이들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조악한 방식으로 환원시켜 "남들 눈치보지 말고 당당하게 너만의 주장을 해."라는 자식을 향한 양육의 메시지로 바꾸어낸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자식을 가장 자유롭고 강단있는 주체로 키워내고 있는 멋진 부모인 양 행세하고자 한다.


나는 이것이 폭력이라고 말한 것을 이제는 철회할 생각이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하라고 하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남들 눈치보지 않고 놀고 싶은 것은 자신이면서, 남들에게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는 부모놀이라는 형식을 통해 비난받지 않고 은밀하게 놀려는 이 일은 정말로 폭력이 된다. 이 놀이는 언제나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만들어야만 지속될 수 있는 놀이인 까닭이다. 자기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에 문제가 있어야 자기는 그것의 치유와 성장을 조력하는 부모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부모놀이를 지속하는 한 마음은 늘 문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다. 자기가 바라는 놀이만을 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더 많은 문제거리로 만드는 이 일에 대해 나는 폭력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형용할 단어를 찾기에 어렵다.


아무리 놀아도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노는 일이 도덕적으로 칭찬되기까지 하는 놀이라면, 그것은 놀이의 형식으로서는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될 수 있다. 가장 놀고 싶지만 동시에 노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이 그래서 이 최고의 경지로서의 부모놀이에 다들 최후로 안착하게 된다. 자신이 부모보기에 똑바로 살지 못하는 것 같아 부모에 대한 미안함을 가진 이들은 특히나 이 놀이말고는 자신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더욱 부모놀이에 고착되었다. 그들은 노는 법을 잃은 것이다. 노는 법을 잃은 이가 대다수였고, 나는 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놀고 싶어서, 노는 법을 잃은 이들과 같이 놀기 위해, 마음을 아이처럼 보며 부모놀이만을 하려는 이들에게 최대한 맞추어왔다. 아이의 양육문제를 고민하듯이 소위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함께 고민하고 또 그 대안적 해결책을 같이 궁리해왔다. 3000년을 그렇게 보내고 난 뒤, 언제인가 나는 딱 30분만 내가 말하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하고 놀아보자고 얘기한 적이 있다. 말이 끝났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를 떠난 이들은 이제 나를 자기만의 방식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동의했다. 3000년의 폭력을 그동안 허용했던 내가 실수했던 것이다. 그것이 폭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다. 저렴한 입냄새로 가득한 숨결로 스스로 안개를 만들어내 그 안에서 모두 같이 헤매게 만들고, 그러다가 이 문제상황을 스스로의 치맛바람으로 날려 해결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이 상태가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정직하게 증언했어야 했다.


내가 30분만이라도 같이 해보자고 제안한 놀이의 방식은 분명 부모놀이를 하는 이들 자신이 도달해있다고 믿는 그 최고의 경지가 깨질 것 같은 위협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3000년 동안 반복한 놀이면 이제 충분히 놀았고, 또 충분히 질렸을 것이라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또 나도 신뢰해주기를 바랐다.


날개를 가진 이들이 도마뱀처럼 배를 깔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안개숲을 기어다니며 그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믿는 일에도 정말로 최선을 다해 함께 바닥을 기었던 이의 말을 조금이라도 신뢰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제 인간에게는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신뢰해주기를 바랐다. 마음이라는 날개를 펼쳐 딱 30분만이라도 안개숲 위를 함께 날고 싶었다. 나는 정말로 자유를 함께 놀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다한 것은 최선이라기보다는, 진심이었다.


틸리히는 진심으로 신 위의 신을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신이 없으면 인간이 자유롭다고 말한 도스토예프스키도 진심이었다. 그들은 남들의 신념으로 세워진 보편적인 최고는 가짜이며 자신이 선택한 주체적인 신념이야말로 진짜 최고의 경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최고의 경지를 해체하고 싶어한 것이다. 그래야 최고의 경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이 논다는 것은 같은 경치를 본다는 것이다. 최고의 경치는 최고의 경지에 같이 올라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로 같이 놀아야 보게 되는 것이다. 3000년간의 안개숲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안개로 이상적인 신기루의 형상을 조형하며 이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모습인 것처럼 만든 그것도 희뿌연 안개일 뿐이었다. 나는 아마도 조금 더 정직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나는 안개는 그만 보고 싶다. 나는 날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모두가 성장하여 날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자욱한 안개를 만드는 일을 그만 멈추고, 같은 경치를 보자고만 말하고 있다. 같이 세상을 구경하며 놀자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우리가 함께 날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마음은 안개숲의 주박에서 풀려나 이제 자유롭고, 우리는 지금 최고의 놀이의 순간 속에 있다. 인간이 함께 날아서 보게 되는 그 무엇이 최고의 경치가 아니라, 함께 날고 있는 인간 자신의 모습이 서로의 눈에 들어와 최고의 경치다.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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