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17

"외로움을 잘 타는 일에 관해"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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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은 외로운 이가 분열을 낳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멀쩡한 것을 일부러 분열시키는 것은 분명 외로워서다. 자기 안에 다양한 것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열이 아니다. 분열은 자기가 반대되는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는 강하기 때문에 약하고, 또 약하기 때문에 강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강함과 약함이 이처럼 서로를 지지해주며 그렇기에 그 모든 대극이 얼마나 동등하게 온전한지를 말한다면, 이것은 분열이다.


실제로 인간은 반대되는 것의 대극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탄소, 질소, 칼륨, 인, 몰리브덴, 주석, 코발트, 바나듐, 지르코늄 등의 다양한 59개의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지 않으며 대극을 이루고 있지도 않다. 인간의 심리적 요소는 더욱 분열적이지 않다. 마음은 언제나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그 하나의 마음을 접촉하지 않고자 사람들은 마음을 분열시킨 뒤, 그 양극성을 알아줌으로써 재차 통합하고자 한다. 그렇게 조립식 장난감처럼 분리시켰다가 재결합시킴으로써 얻는 이득은 자기가 그 마음이라는 사실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밖에서 그 마음을 돌보는 자다.


가장 외로운 부모들이 자식에 대해 이와 같이 한다는 사실을 나는 배워왔다. 너무나 커다란 자신의 외로움을 망각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식에 대한 과잉양육을 시도한다. 심지어 자기의 내면에 돌보는 자와 돌보아지는 자들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는 일이라니 이것은 얼마나 깊은 외로움인가.


자신은 언제나 반대되는 마음들 사이에서 갈등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자유롭고 싶지만, 동시에 안정을 얻고도 싶다. 대극주의자들은 여기에서 자유와 안정이 대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안정쪽에 조금 더 치우쳐 있다면 한번 자유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자유와도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반대로 자신이 자유쪽에 치우쳐 있다면 안정이라는 것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안정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결국 그 두 마음이 온전한 하나의 마음이었으며, 자유가 있기에 안정이 있고 안정이 있기에 자유가 있는 방식으로, 이것이 바로 온전한 하나의 마음을 가진 나라고도 말한다.


아니다. 내가 말하는 하나의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러한 이가 자유와 안정의 대극이 온전한 하나의 마음이라고 알아봐주는 제3의 주체로 도피하는 일을 자제시키고 싶다. 그보다는 그가 언제나 자유쪽으로 이동했을 때는 자유에 불만을 갖고, 안정쪽으로 이동했을 때는 안정에 불만을 갖는다는 정직한 실증적 사실을 드러내고 싶다. 그는 저울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한 것뿐이며, 이동한 어디에서나 그는 불만을 갖는다. 이것은 불타는 시소게임이다.


놀이터에서 자기 혼자 시소의 양편을 오가고 있는 이가 있다. 그는 홀로 시소를 타고 있는 것이다. 몹시 외로워보인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외롭다는 사실을 모르며, 다만 춥고 무섭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시소의 양편을 분주하게 오가며 운동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열에너지로 전환한다. 대극의 구성은 이 열의 창출을 위한 것이다. 자기분열은 분열된 그 사이를 오가는 뜨거운 열기로 자기 자신의 추위를 달래고자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자유와 안정이 대극으로 이루고 있는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다만 외로움이라는 하나의 마음이다. 자유와 안정이라는 소재뿐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 안의 대극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요소는 놀이터에서 홀로 외로워 만들어낸 시소들이다. 아이들이 외로울 때 공상의 친구를 만들어내는 일과도 같다. 멀쩡한 자신을 분열시켜, 분열된 양극의 자신들을 대립시키고, 또 그것들이 화해하도록 도와줄 중재자로서의 제3의 분열을 만들어낸 뒤, 그 삼자가 모두 사이좋은 친구가 되도록 만든다. 분열의 심화된 정도는 분명 외로움의 강도를 시사할 것이다.


나는 외로운 이들이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시소게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극 따위에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나는 오직 외로움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 나는 그러니 내가 어떤 때 외로웠는가에 대해서만 정직하게 쓸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나를 잃었을 때만 외로웠다. 시소의 반대편에 내가 타고 있지 않았을 때만 외로웠다. 거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때만 외로웠다. 나는 지금 정직하게 쓰고 있지만, 분명 헷갈리게 쓰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계속 쓰고자 한다. 내가 외로웠을 때는, 이 인생을 함께 걸어줄 내가 없이 홀로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순간이다. 그 무엇보다 나를 잃어 나는 고아였다.


나를 잃고 있던 이것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편의상 이것을 자아라고 부를 것이다. 자아는 나를 잃은 마음이며, 그렇기에 자기가 가장 나인 척하고 있는 마음이다.


자아가 나인 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권위다. 자아는 권위를 얻기 위해 시소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시소의 양편을 반복적으로 이동할수록 강화되는 것은 시소 자체의 권위다. 이를테면 안정이라고 이름붙어있는 시소의 한편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반대편으로 이동해간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는 그저 이름일 뿐이다. 오히려 이러한 것을 자유라고 믿으며 이동해갈 때 우리는 시소에 속박된다.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은 시소의 권위만을 증진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시소를 만들어낸 자아의 권위도 강화된다. 자아는 사람들이 우르르 시소의 한쪽편으로 이동해갔다가 또 다른 쪽으로 이동해가는 일을 반복해갈 때,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유와 안정을 다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놀이터라며 자신에게 사람들을 이끌 강력한 권위가 있음을 천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가 펼치는 시소게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아는 나에 관해 도무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아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부터 모른다. 남이 좋다고 칭찬해준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이 별로라고 비난한 것을 자기가 싫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아는 철저한 몰개성이며,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언제나 과잉적이다. 열광된 불길을 태워올려 희망의 봉화처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괜찮은 척한다.


그러나 희망은 외로움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 때 반드시 외로워진다. 외로움은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여기에 내가 없다는 그 사실을 기필코 알린다. 자아의 굳건한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외로움이다. 노호처럼 밀려드는 외로움의 격류 앞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아는 분열을 기책으로 내세우나, 외로움은 분열된 가지가 아니라 그 뿌리부터 뒤흔든다. 가상의 시소게임을 하고 있으면 외로움이 달래지리라고 감히 누가 그러는가. 나를 향한 외로움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자아는 나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 나를 향해 이끌고자 하는 외로움은 산발한 광인이 폭우 속에서 널뛰는 춤사위이며, 우주가 몸서리치는 격렬한 한 줄기의 뇌성이다. 이것은 저 끝까지 전해간다. 당도해야 할 지평까지 명징하게 실어간다. 히브리인들도 이 신성한 외로움의 인도를 따라 용맹하게 협곡을 건넜고 사막을 지났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며 그들은 가슴에서 파도처럼 요동치는 끌림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러니 타야 할 것이다. 자아가 결코 봉쇄할 수 없었던 외로움이 밀려든다면 우리는 그 앞으로 누구보다 빨리 달려나가 서핑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외로움을 잘 타는 일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외로운 줄도 모르거나 외로움을 봉쇄하고 있는 까닭에, 외로움을 잘 타지 못하는 이들이 대신 탈 것으로 대극이라는 시소를 만들어내며, 그 시소조차도 잘 타지 못한다. 홀로 시소의 양편을 오가며 전적으로 자신이 시소를 통제하고 있는 시소의 주인인 척만 한다. 그러나 외로움을 타러 저 격류 앞으로 달려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들은 "오, 주인이여. 맡기겠나이다. 데려가주소서."라고 말하며 파도에 올라탄다. 자신들이 홀로 시소를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함께 리듬을 탄다.


만약에 이것이 시소래도 외로움의 서퍼들은 지금 시소의 반대편에 타서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있음을 본다. 한겨울밤의 놀이터에서도 홀로가 아니라고 함께하는 것이 있다. 웃으니 그것도 웃는다.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이었던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숲으로 가자. 숲까지 가자. 외로움은 숲을 그리는 바다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바다에서 왔으니, 살아있음을 잃은 것들이 다시 기억하라고 이제 바다가 만나러 온 것이다. 살아있는 숲을 그리며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나를 향한 외로움은 나로부터의 그리움이라고, 나는 말하고 있다. 나를 잃었을 때 온 것이 외로움이라면, 그 외로움은 이것을 따라 나에게 오라며 내가 보낸 것이라고도, 나는 또한 말하고 있다. 아니 실은 더 극적이리라. 그렇게 온 외로움이 나다. 잃은 것에게 친히 찾아온 것이다.


외로움의 물결에 실려 인간은 가고 있다. 그리운 집으로. 나를 향한 그 길을, 나에게 업혀 가고 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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