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18

"숨기는 이야기, 전하는 이야기"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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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입장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곧 이야기에 의존해 자기의 입장을 구성하곤 한다. 카페에 앉아 있어보면 하루 종일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다 이러하다.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지치지도 않고 열띠게 반복하는 앵무새들 덕분에 귀가 늘 얼얼하다.


내가 무척이나 놀라곤 하는 것은 인간의 귀가 얼마나 혹사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나는 선량하고 사려깊은 자유의 전사들이 이 세상에 이토록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에 자주 놀라곤 한다. 자기가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인 자신은 늘 선하고, 예의바르며,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가진 인물로 진술된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성품이 착하고 인성이 좋은 자신이 어떤 부당한 상황 속에서 억압되고 고통받아오다가 결국에는 그 상황을 극복하고 더욱 놀라운 자신이 되어 자유로워졌다는 것이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들의 통속적인 내용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집하고 싶은 입장일 뿐이다. 고집은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며, 은폐되는 것은 또 다른 입장이다.


동일한 상황에 대해, 자기가 가장 똑똑한 고위의 주체인 것처럼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서서, 남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자기 고집만 내세우며 사람들의 에너지를 착취하고 민폐만을 일삼다가, 결국 상황이 자기의 상각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망친 뒤 도주하고자 했던 일종의 폭탄테러범의 이야기도 있다. 이것이 하나의 개인 안에서 더 근본적으로 출현해있던 입장이다. 바로 이 크나큰 불편감으로 경험되는 입장을 강제적으로 없애기 위해, 개인은 상반되는 입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원래의 이야기를 덮으려 한다. 이 양상이 바로 분열이다.


한 번 시작된 분열은 계속해서 더 많은 분열을 낳는다. 하나의 입장에 반대되는 다른 입장을 만들어내고, 다음에는 대립되는 그 두 입장을 다 좋은 것으로 알아주려는 제3의 입장을 만들어낸다. 제3의 입장과 대립될 제4의 입장이 금방 만들어질 것이고, 그것들을 통합하기 위한 또 제5의 입장도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며 분열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분열은 언제나 남용의 결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든 선한 존재처럼 정당화하기 위해 분명 이야기라는 것을 남용한다. 자기가 거짓으로 꾸며내고는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자기가 믿어버린다. 나는 이것이 자기최면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쓰이지만, 어떤 이야기는 반대로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 쓰인다. 이야기는 하나의 입장일 수밖에는 없는 까닭에, 사실을 그 자체로 고이 담아낼 수는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니 사실을 기억하기 위한 이야기는 쓰기가 무척 어렵다. 반대로 사실을 망각하려는 이야기는 매우 쓰기 쉽다. 전자는 한계를 인정하기 위한 작가의 정직성을 요구하지만, 후자는 한계를 무시하기 위해 얼굴에 깔 철판과 약간의 수사학만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언제나 한계를 무시하는 일보다 어렵다. 그리고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름답다.


나는 한계를 무시하려는 이들이 늘 자신을 지고지선한 존재로 묘사하려는 모습을 본다. 동시에 자기의 지고지선함을 정당화해주는 것 같은 이야기라는 매체를 신격화하는 모습 또한 자주 목격한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통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라고 쓴다. 그는 실은 자신이 바로 그러한 초상적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라고 쓰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이야기의 마법적 힘을 유려하게 집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작가라고도 말한다. 작가는 이세계로 간 중학생 마법사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또 이렇게도 쓰인 문장들을 본다


"내가 잘난 척 써온 그 무수한 낱말들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힘겹게 내쉬고 있는 단 한 번의 호흡조차도 돕지 못했다. 내가 뭘 아는 것처럼 내온 그 무수한 책들은 아버지 앞에 늘 부끄러워 아직도 병실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나와 아버지 사이의 단 하나의 보도블럭조차도 되지 못했다. 나는 결국 무서워서 또 도망갈 한심한 병신이지만, 제발 아버지만은 살려주세요."


이것은 하나의 입장이지만, 입장의 한계를 인정하며 사실을 기억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사실을 담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실을 담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진실이 깨어지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자기해체의 진실이다. 사람들은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진실의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하곤 하지만, 사실을 무시하는 진실은 그저 허구일 뿐이다. 아무리 높은 가치를 가져 잘 팔리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나는 이러한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 싶다. 사실은 마음과 관련된 것이고, 진실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이제 나는 쓰고 싶다.


개인은 자기를 변호하고 정당화해줄 입장의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정체성도 있었다. 그 선행하는 정체성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경험했기에 개인은 새로운 긍정적 정체성을 만들어 선행의 것을 세탁하고 싶어한 것이다. 그렇게 개인 안에는 분열이 만들어져 개인이 만들어낸 정체성들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한다. 그러면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대극의 통합이라는 이야기에 입각한 정체성이 이제 가장 진실의 입장이라고 자기를 내세우며 출현한다. 여기에는 분명 고집이 있다. 자기, 자기, 자기밖에는 없는 그 열띤 자기과잉의 고집이 있다. 자기결여가 만든 일이다. 자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입장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라고 하는 정체성을 만들고자 시도해서 펼쳐진 고집센 앵무새의 역사다.


앵무새는 그 유려한 언어들을 지금 마음을 담아 말하고 있는가? 마음없이 그냥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진실이란 대체로 이러한 것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진실이라면서 발화하는 그 무수한 모방의 언어들에 내 얼굴이 괜히 뜨거워졌다. 뻔뻔함은 앵무새의 몫이고 수치심은 나의 몫인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사실은 누구도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사실은 언제나 인간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최대한 담아보고자 하는 정직한 이야기는 그래서 이야기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린다. 자기보다 큰 것을 한번 담아보려고 한 것이니 이는 필연이다. 마음이라는 엄청난 것을 잠깐 담는 아주 일회적이며 임시적인 용기로서만 이야기는 쓰일 뿐이다.


정체성의 문제라고 다를 것인가. 개인이 구성하는 어떠한 정체성이든 그 안에 정체성보다 큰 마음이 담겨 있다면, 정체성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러한 자기해체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아주 임의적이고 일회적으로 한계된 정체성을 구성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지금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 위해서다. 정직한 작가들이 언제나 자신의 한계와만 일하는 이유는 마음이라는 이 커다란 선물을 인간에게 드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초월은 발생한다.


나는 선(禪)에서 근본적으로 이야기는 쓰레기라고 하는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선물이 전해지면 포장지는 버려진다. 남는 것은 선물이다. 포장지 안에 잠시 갇혀 있던 선물은 이제 포장지를 초월한 것이다. 입장을 초월해 그 마음이 상대에게 닿은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사실의 임의적 포장지다. 지금 결코 부정될 수 없는 마음의 사실을 전하기 위해 구성될 때만 의미있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사실이 전해질 수 있으면, 자기라는 것은 더 내세워질 이유가 없어진다. 그것을 위한 변호나 자기정당화도 필요없다. 나는 조금 더 분명하고 힘찬 어조로 강조하고자 한다. 마음을 정직하게 전하고 있었으면, 그것이 바로 무엇보다 자신다운 자신이다. 이미 완벽하게 다 얻었다. 정체성이라는 이야기의 포장지를 초월한 것은 마음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음을 따라 자신이, 자기라는 정체성을 초월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숨기려고 하면 계속 분열되어 마음없는 이야기들만을 반복해간다. 그래서 역으로 거기에 어떠한 마음이 숨겨지고 있는지의 그 형상이 더욱 뚜렷해지곤 한다. 숨기고자 한 것이 가장 숨겨질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부재가 그것의 실재를 알린다. 은폐됨으로써 동시에 개방되는 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의 속성이라고 말했는데, 또한 이것이 마음의 속성이다. 결국에는 드러나 전해지기 위해 숨겨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마음을 숨기고자 한 그 불편한 최초의 이야기에서부터, 페인트만 다르게 칠해간 감옥 속에서도 마음은 늘 처음 갇힌 그대로였다.


아무리 무수한 이야기들로 숨기려고 해도 그 마음이 같다. 부정될 수 없이 거기에 있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마음을 전하면 이야기는 멎는다. 선물이 전해졌으니 더는 포장지는 추구되지 않는다. 다음에는 아예 현금으로 주면 더욱 기쁠 것이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말은, 마음의 현금을 선물했다는 뜻이다. 언어들의 쓰레기산 같은 이 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마음을 전하는 인간 그 자신의 모습에 나는 첫이야기에서부터 반해 있었다고 아직 전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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