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19

"자유가 그리워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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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이가 자신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일을 자유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을 자유는 없냐고. 그런 자유는 그립지 않냐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는 아이에게 바이올린 학원을 등록시켜주고,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호텔 코스요리들을 먹이며 미각을 키워준다 하고, 심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이상한 미국최면드라마를 보여주며, 자신이 현재 아이의 마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아이가 가장 그 자유를 펼칠 수 있게 돕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그가 왜 자유롭지 못한지의 증언을 듣고 있던 것과 같다.


자기의 생각을 자기의 마음이라고 믿으며, 또 그 마음이 자기 안에 있는 아이와 같은 것이라고 믿으며, 마음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할 자유가 있다고 마음의 부모라도 된 것처럼 말한다면, 그는 지금 모든 것이 자기의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던 것과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또 자기의 생각들에게 "NO!"라고 말하지 못함으로써 사람들의 인생이 비극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거의 확신한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자신이 좋은 부모이며, 또 좋은 마음의 전문가라는 자기만족의 착각뿐이다. 이것이 착각인 이유는 "NO!"라는 말을 듣지 못한 아이들과 또 자기의 생각들이 결국 향하게 되는 길도 비극인 까닭이다. 그 길에는 자유란 없으며, 자기가 자유롭다는 신기루만을 쫓으며 영영 표류하게 되는 길이다.


아이들이 말한다. "이것이 하고 싶다." 자기의 생각들이 말한다. "저것이 하고 싶다." 그러나 정말로 이러한 것들은 표현 그대로의 하고 싶은 것들인가? 또한 그 말들을 들어줄 누군가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호소해서 이루게 되면 이는 자유를 성취한 것인가? 도무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어떠한 이가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다른 대상에게 의존해서만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그렇게 자유의 실현이라는 것이 대상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그런 것이 자유일리가 없다. 나아가 그가 자전거를 정말로 타고 싶었다면, 그는 이미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주 작은 형태로라도 자전거를 타는 현실에 가까워지는 그 일이 이미 스스로에게 일어나고 있다. 애초에 누군가의 승인과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만약 승인과 허락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지금 그가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실제적인 자유의 소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더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다. SNS와 유튜브에서 본 것들에 대해 "나도 저거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자기의 생각에 따르는 일이 정말로 자유의 표현인가? 그것들을 해야만 행복해진다고 가상현실이 만들어내고 있는 거짓의 행복조건들을 아이들에게 충족시켜주는 일이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인가? 나는 이런 것들이 자유를 증진시키기는 커녕 가장 자유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쓰고 싶다. 진심으로 "NO!"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자유의 힘이다. 자유는 어떤 것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다.


나는 사람들도 실은 얼마나 아이들과 자기의 생각들에게 "NO!"라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어할지에 대해 떠올려본다. 그것은 아이들과 또 자기의 생각들에게도 좋은 것이다. 허공에 떠서 끝없이 그 고도만 상승해가는 자기파멸의 두려움 속에서 "NO!"라는 힘찬 말은 대지와 다시 연결해주는 든든한 밧줄과도 같다. 나는 정말로 떠올려보고 있다. 행복에 대한 가상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가 행하고 있는 그 모든 미친 짓을, 차라리 누군가가 뺨을 후려쳐서라도 강제적으로 말려주기를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해. 과거에는 혼내면 혼이 나가니 그러지 말라고 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나가있는 혼을 번쩍하며 다시 들어오게 해야 할 것이다.


자기의 생각을 마음이라고 간주하며, 또 마음이 아이와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이는 아이에 대한 특정한 견해가 하나의 심리관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내용은 아이라는 것을 마치 디즈니 동산에서 뛰어노는 천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에 따라 마음이 펼쳐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작고 순진한 아이처럼 보이게 된다. 남자 고등학생이라면 온갖 지저분한 섹스얘기를 하지 않을리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이들은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든 왜곡해서 본다. 남자 고등학생들에게서 성기를 거세하고는 마치 착한 유치원생이라도 된 것처럼 묘사하기를 즐긴다.


왜 이런 식으로 사는지는 분명하다. 자기가 어렸을 때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을 스스로 보상하고 싶어서다. 그러니 자기 대신에 세상의 모든 것을 유치원생으로 만든 뒤, 자기가 그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해주겠다고도 말한다. 어떤 요구에 대해서도 결코 "NO!"라고만은 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너희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며 비장하게 선언한다.


유치한 심리관이 유치한 아이와 같은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유치한 상태에 대한 집착이다. 자기는 세상의 주인공인 순수천사이고, 모든 것은 착한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이 상태는 유치한 심리관을 통해 한 개인의 인생에서 내내 반복된다. 이 유치한 것을 신성한 천사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니, 유치한 심리관에서 발로한 자기의 생각에 대해서도, 또 실제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NO!"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가 거절하면, 마치 천사가 저 숭고한 하늘에서 지옥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될 것만 같다. 루시퍼의 원망하는 눈초리가 눈에 선하다. 오, 그는 지금 정말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서 거대한 오만함을 본다. 단지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울 뿐이라고 그는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두려움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두려움이라고 재차 말할 것이다. 왜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일이 자기의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이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병에 시름하는 이밖에는 없다.


하나님병에 걸린 이는 자기가 타락천사를 만드는 악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다신 다른 이에게 악마의 운명을 부여하곤 한다. 누구에게 그러겠는가. 당연하게도 "NO!"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사실은 자기가 "NO!"라고 하고 싶으면서 그것을 하지 않고 있는 이들은, 반드시 남이 자기에게 "NO!"라고 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가 자기를 거절하고 억압하는 악마인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는 그 사악한 "NO!"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순수한 자신의 생각을 온전하게 지켜냄으로써 결국에는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한 것 같은 그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모든 마음아 이제 괜찮아, 모든 아이야 이제 괜찮아, 라며 자신의 피조물들을 수호하는 일에 성공한 하나님 같은 만족감을 경험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미친 짓을 우리가 언제쯤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은 천사가 아니며, 자기가 마음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자기의 생각들도 천사가 아니다. 디즈니의 꿈동산은 환상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한 욕망장치일 뿐이며, 소수자에 대한 지향은 이제 소수자의 지갑까지도 털 수 있게 된 시장논리의 확장일 뿐이다. 나는 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도덕의 이름을 빌어 실은 은밀하게 강요되고 선동된 것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 일이 정말로 자유인 것인가? 인간은 이 가상의 천국으로의 계단을 정말로 오르고 싶어하는 것인가?


"엄마! 오늘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오마카세 먹으러 가고 싶어."


"응, 청국장 끓였으니 먹어."


이후에 전개될 수 있는 무수한 대화의 가능성들은 모두 생략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상쾌하고도 분명하게 발화된 "NO!"는 오히려 가능성을 촉진한다는 사실이다. "NO!"라고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은 분명한 경계이며, 경계는 자유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한테도 "NO!"라고 해서 인간이 얻은 것이 자유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나는 잊을 수 없다. 하나님도 인간에게 "NO!"라고 했던 그 순간을. 여기에는 청국장뿐이라고, 먹기 싫음 나가라고, 인간에게 미움받게 된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인간이 정말로 천국으로부터도 또 하나님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도록 전했던 그 깊은 마음을. 청국장을 먹지 않을 자유가 있었어서, 하나님이 끓여준 청국장이 그립다. 자유의 원천을 향해 그리워서 끌리는 이 감각이 진심으로 하고 싶다는 자유의 감각일 것이다. 자유는 그리움의 계단을 오르는 일이었다. 인간은 이미 그 계단 위에 서있었다. 자유가 그리웠는데, 그리워서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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