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한 것"
나는 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 믿으세요."나 "자신을 깨달으세요."와 같은 얘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는가? 내가 쓰는 모든 말은 실제로 다 그런 얘기들이다. '마음'이나 '나' 등의 표현을 나는 분명 종교적 함의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심리학과 종교학의 양분야에 학위를 가지고 있어서나 또는 내가 종교심리학자이면서 상담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흔적들은 내가 어떤 것에 반해서 걸어간 길 뒤에 남게 된 부산물일 뿐이다. 나는 그것들을 위해 걸은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반한 것을 향해서만 걸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소개하라고 하면 자기의 자서전을 저술해내려고 한다. 그 요약본을 빠르게 들려주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말하지 않고, 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심지어 그들은 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그것을 출발비디오여행처럼 설명하는 해설자가 되어 있는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말하려고 하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텅비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 그것을 자기라고 말하곤 한다. 자기가 말한 것을 자기도 진짜처럼 믿는다. 그리고 이제 그 가공의 자신을 붙잡고는 거기에 모든 행동양식을 끼워맞춘다. 나는 피클을 싫어하는 고유한 개성을 가진 사람이니까 라며, 피클을 빼달라는 주문을 깜빡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부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하며 맥도널드에서 최후의 목숨을 건다. 나는 그가 맥도널드 치즈버거를 그렇게 사랑하는지 몰랐다. 또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하는 것을 왜 남에게만 맡기고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니면 피클을 싫어하는 고유한 개성을 가진 사람인 그를 맥도널드 아르바이트생이 자기의 목숨처럼 중요하게 사랑해야만 했다는 말일까? 어머, 피클을 빼달라는 님이 드디어 오셨군요, 등불을 들고 당신만을 기다려왔어요. 당신이 바로 예언의 그 용사님, 날 다 가지세요, 『평범한 내가 맥도널드에서는 치트용사입니다만?』의 연재가 시작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남들에게 대신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악습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꼭 남에게 시켜서 인간이 불행해진다. 아마도 그가 게임캐릭터처럼 지어낸 '피클을 싫어하는 고유한 개성을 가진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반하지도 않은 것을 마치 반한 것처럼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런 것만을 말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말하지 못하게 된 것도 당연하다.
자기 자신을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반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담자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상담이라는 것에 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한 이는 반한 것을 가장 큰 것으로 본다. 그것은 자신이 쉬이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끝없이 그것을 향해 가는 여정 속에 자신이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핵심을 말하고 있는가. 자신이라는 것이 비로소 있게 되는 그 자리는 이 반함의 여행길 위다. 자신이 반한 것을 향해 떠나고 있는 이만 자신을 얻게 된다.
자신이 상담자라고 하면서 실은 상담에 반해있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 자신이 상담에 대해 다 아는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상담보다 높은 것이 되어 있다. 상담이라는 것은 자신을 빛내줄 액세서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말로 상담에 반해있는 이는 계속 모른다. 더욱 모른다. 안다고 생각했던 권위도 스스로 해지하고 늘 다시 처음으로 배워간다. 그는 정직하다. 정직해서 지혜롭다. 그는 정말로 이해한 것이다. 자기가 지금껏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상담이 아니라 상담에 대한 언어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상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으나 상담을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삶의 문제라는 것을 깨우친 그는 이제 상담에 대한 언어들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동시에 자기권위의 해체이기도 하다. 이제는 감흥이 없어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붙잡고만 있는 그 졸립고 지루한 언어들의 수렁으로부터 그는 자기 자신을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다. 자기가 정말로 반해있는 그것에 튼튼하게 밧줄을 건 채.
죽은 말들의 고삐를 꽉 쥘수록 나는 늪으로 끌려들어가게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가장 성대하게 살아있는 것에 밧줄을 걸고 싶다. 언제인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는 저 거대한 마음을 만나는 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키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서 선 단독자'라는 그 표현이 최초의 힘찬 음성 그대로 어떻게 이 시대에 다시 깨어나 활동하는지를 목격한 것만 같았다. 완전히 다른 언어였지만, 그것은 인간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리며 바로 그러한 인간이 보고 싶다던 크나큰 반함의 고백이었다. 내가 그에게 배운 것은 마음을 보는 법이나 깨달음을 얻는 법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해 끝없이 반해가는 법이고, 또 그러한 인간을 향해 고백하는 법이었다. 이 고백이야말로 가장 살아있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인간을 말해야 하리라. 인간이야말로 그가 가장 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말한다는 것은 또한 인간이 가장 반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하나님을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반해있는 가장 큰 신비와 자유의 이름으로서. 그런데 하나님을 말하는 일이라면 또 어떨까? 하나님을 말하려면 하나님이 반한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대체 무엇에 반해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에게 완전하게 반해있다. 당신에게 반해있음으로써만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당신이 없다면 하나님은 아무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 나는 사실 모든 말로 이 말만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반해있는 당신에게 반해, 당신이라는 인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의 방법인 까닭이다.
나는 어떤 때는 하나님은 나, 인간은 마음, 예수는 내가 된 마음 또는 마음을 사는 나의 비유라고 쓴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은 마음, 인간은 나, 예수는 커다란 마음으로 사는 나의 비유라고도 쓴다. 더 단순하게는 마음은 개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혼이라고도 쓴다. 나는 지금 어떤 실체적 구조 같은 것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를 뒤바꾸어 어떻게 쓰더라도 다 성립되는 말이며, 그럴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드러내는 것이 다만 근원의 관계성인 까닭이다. 나는 이것들이 아주 깊고 오랜 사랑으로 맺어져 있다고, 연인 중의 연인이라고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이 연인됨을 자각해 사는 인간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게 당신이었으면 정말로 좋겠는 것이다.
당신은 왜 『평범한 내가 지구에서는 하나님의 연인입니다만?』이라고 쓰지 않는가? 그 모든 해설의 주석들을 뗀 채 이 뜻을 담아 "나는 그냥 나야(I am that I am)."라고 왜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나는 "하나님 믿으세요."나 "자신을 깨달으세요."라는 얘기가 최초의 그 생기를 회복해서 당신에게 들릴 수 있도록 죽은 언어들을 부침개처럼 뒤집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 화전(花煎)을 부치며 봄이 오실 길을 맞이한다. 나는 언제나 내가 반한 것을 향해서만 걸었고, 똑같은 의미로서 언제나 내가 반한 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반한 최고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