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화 그리고 깨달음

"깨달음은 갑의 상태가 아니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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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인을 위한 글의 구성은 역시 양괄식이다. 결론부터 먼저 제시해보자.


깨달음을 꿈꾸는 이는 깨달음을 하나의 상태로 간주한다. 그것은 마치 영원하고 절대적인 갑처럼 유지되는 상태다. 물론 이것은 착각이다. 애초에 깨달음이 자신의 한 상태라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착각은 항시 갑이 되고자 하는 뜨거운 의지의 소산이다. 유지를 위한 의지다. 그래서 갑은 실제로는 갑갑한 것이다. 늘 줄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긴장어린 신경증이다.


이 신경증은 잘못된 전제에서 발로한다.


"이완이 있는 곳에 긴장이 없다."


이와 같은, 초기의 행동주의 심리학의 대전제는 무수한 이완중독자들을 양산했다. 불확실한 삶에서 야기되는 불안과, 그로 인한 긴장을 과장되게 평가한 이들은, 긴장과 이완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 가설을 새로운 계명처럼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이완된 상태만 만들면 삶의 불안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즉, 노력해서 만드는 자신의 특정한 내적 상태를 통해, 외부에서 기인하는 삶을 임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렇게 이 고전적인 전제는 더는 가설이 아닌,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믿음의 소재로 치환되었다. 세계로부터 영향받지 않는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자기의 중심성을 확보해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유토피아적 믿음이다. 바야흐로 갑의 신화에 대한 믿음이다.


갑은 이완된 상태의 정점이다. 궁극의 이완이다. 그리고 깨달으면 이 이완의 상태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갑의 신화의 신봉자들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실험적 가설이 공적 신화로, 그리고 사적 소설로 둔갑하게 된 일련의 과정이다.


이 소설가들은 메리 수(Mary Sue: 작가가 자기만족을 위해 소설 속에 이상적인 자신을 투영한 인물) 소설의 대가들이다. 이들은 이완이 유지되는 상태, 즉 지복의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자의적으로 정의하면서, 그에 대한 온갖 판타지적인 설정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자기충족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소설 속에서, 곧 꿈 속에서 사는 인물이 된다. 자신이 만들어낸 꿈에 자신이 먹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메리 수들에게 설정되는 대표적인 특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화내지 않는 성질'이다. 이 깨달음의 판타지소설가들은 화를 깨달음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들이 시대착오적인 가설 위에서 활동하는 한 이는 필연이다. 깨달음을 영원히 이완된 갑의 상태로 신봉하는 이 이완중독자들에게 있어 화는 가장 상극에 위치한 긴장의 결과물인 까닭이다.


화는 그들의 평온한 이완의 상태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것만 같기에, 그들은 어떻게든 화를 나쁜 것으로 만들어 부정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들에게 있어 화는 아직 깨닫지 못한 열등한 존재의 증거다. 곧, 을의 상태다.


화를 깨닫지 못한 증거로 보는 이 관점이, 아니 그렇게 자의적으로 보고 싶어하는 이 망상이 결국 그들이 깨달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반증해준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이완뿐이다. 미소를 띤 채 여여하게 앉아 지복 속에 거하는 그 자궁 속 유아의 상태뿐이다.


"퇴행은 초월이 아니다."


이것은 종교심리학의 대전제다. 모든 종교적 여정은 탯줄로부터의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즉, 이완과 지복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종교적 탐구의 첫 걸음이다. 붓다가 가출하고, 예수가 광야로 나간 그 이유다. 그래서 종교적 여정은 긴장과 함께 성립되는 길이다. "이완이 있는 곳에 긴장이 없다."라는 가설은 종교적 탐구를 위해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언술이다.


이처럼, 긴장을 거부하고 당위적인 이완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완과 긴장을 모순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모순 사이에서 좋고 선하며 올바른 한쪽편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의 특징이다. 반면, 성인은 이 세계를 모순이 아닌 역설로 본다. 즉, 이완과 긴장이 상호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공속적인 것으로 늘 함께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성인이다.


이완과 긴장은 함께할 수 없다. 깨달음과 화는 함께할 수 없다. 이것은 아이의 태도며, 모순이고, 판타지다.


이완과 긴장은 함께한다. 깨달음과 화는 함께한다. 이것은 성인의 태도며, 역설이고, 사실이다.


사실은 언제나 역설로 구성된다. 중요한 것은 역설이다. 이 역설에 대한 감수성이 곧 깨달음에 대한 감수성이다. 선(禪)을 부흥시킨 혜능선사가 자주 언술하던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표현 속에는 이러한 역설의 의미가 잘 담겨 있다.


애초에 우리 몸부터가 이미 역설투성이다. 우리 몸은 긴장과 이완이 언제나 동시적으로 양립함으로써 작동한다. 실존상담자인 슈나이더는 이를 수축과 팽창으로 다시 표현한다. 수축과 팽창이 양립할 수 없다면 우리는 숨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몸으로 사실을 조우했을 때 감지되는 것을 느낌이라고 부른다. 이 느낌도 언제나 역설이다. 슬프고, 동시에 기쁘다. 인간은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느낀다. 인간은 1 아니면 0인 이진법의 기계가 아닌 까닭이다.


자신의 몸과, 그 몸을 통해 체험되는 느낌에만 정직하게 개방되어 있어도, 모든 판타지는 무너져내린다. 역설의 사실이 모순의 판타지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게 되는 이유는, 퇴행적 상태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아이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기의 몸에 대한 경계감이 희박한 것이다. 이는 더 거대한 부모의 몸과 항시 합일하고자 하는 의도가, 즉 불안하지 않은 안전감 속에 늘 모든 양분이 자기를 위해 당연하게 제공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모든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만 같은 태내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도가 야기하는 현상이다. 즉, 퇴행욕이 역설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한다.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유아기적 판타지를 담아내고 있으며, 또 그 판타지를 유려한 소설로 써내려가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지는 놀라울 정도다. 종교는 부모에 대한 투사라고 말하는 프로이트의 견해는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 옳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갑의 실체다.


세계 및 타자에 대해, 당연하게 그들이 부모처럼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자신을 위대한 주인공으로 삼아야 한다고 간주하면서, 그러한 자기 자신이 대단히 잘났기 때문에 그 천부적 당위성이 성립된다고 믿고 있는 상태가 바로 갑의 상태다. 자궁 속 왕자공주를 꿈꾸는 상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갑은 늘 화가 난다. 자신들이 가장 부정하고 싶은 화는 계속 그들에게 침투해온다. 이 또한 필연이다. 그들이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퇴행의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려고 하는 까닭에 화는 결코 그들을 떠날 수 없다.


아이는 사실 앞에 무력하다. 화는 이 무력함에 대한 몸의 반응이다.


그렇게 화는 바로 을의 반응이다. 무력한 을만이 화를 낸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무력하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화는 무력함에 대한 호소다. 곧,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실감이 화다.


자궁 속 주인공인 아이의 상태를 꿈꾸는 갑은 그래서 늘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판타지소설을 써내려가 자신을 전능한 메리 수처럼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실체적인 내용이 아이인 까닭에 그는 언제나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 무력함으로 말미암아 화는 끊임없이 호출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가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퇴행된 상태의 항구성을 꿈꾼다면, 화 또한 항구적으로 그에게 머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것이 역설이다. 갑을 강렬하게 꿈꾸는만큼,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 꿈꾸는 이는 강렬한 을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설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판타지소설가들은 자기분열에 빠진다. 늘 자기 자신과 싸우게 된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보자.


스스로가 온전하게 느껴진 체험을 한 이가 있다. 그는 그 체험의 결과로 자신을 그동안 괴롭히던 감정과 생각이 사라진 것 같은 상태를 만끽하게 된다. 이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그를 괴롭히지 못할 것만 같다. 그는 안전하고, 충만하며, 더는 불안하지 않다. 그렇게 갑이 되었다. 그 상태를 갑이라고 느낀다. 그리고는 이제 그 상태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 이제 그를 힘들게 했던 특정한 감정과 생각을 의지적으로 추방하려고 하게 된다.


특정한 상태체험을 통해 갑의 정체성을 획득한 그에게 있어, 이전의 그를 괴롭히던 감정과 생각은 그의 것이 아닌 을의 것이다. 자신은 이미 그 을의 상태를 초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갑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실제적인 상태는 자기 자신이 최고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와 같은 퇴행적 상태인 까닭에, 아이가 갖는 근본적인 무력감, 즉 을의 무력감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자신은 을의 상태를 넘어서 항구적인 갑이 되었다고 하는 착각이, 이처럼 그를 계속 실제적인 을의 상태로 만든다. 그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정체성과, 실제의 그 자신간의 분열이다.


이 분열의 구조를 이해하려 하지 않기에,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 자기분열 속에서 영문도 모르게 계속 화의 사건이 그에게 발생하는 것처럼 경험하게 되고, 그 결과 세계 및 타자에게 끝없이 화를 내거나, 또는 세계 및 타자에게 자기의 화를 투사함으로써 세계 및 타자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며 자신은 그 피해자인 것처럼 굴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가해자가 존재한다면 그것도 자기 자신이다. 자기의 화가 자기를 치는 것이다.


부연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상태는 깨달음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우상화의 상태다. 갑에 대한 추구는 이 우상에 대한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상에 대한 추구는 바로 최고의 인간에 대한 추구다. 그래서 갑이라는 정체성이 야기하는 화는, 최고의 인간을 항구적인 수식어로서 획득하지 못하는, 끝내 을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화인 셈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단순히 인간에게서 모든 수식어를 거세하는 것이다. 최고도 아니고 최저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다. 인간만이 다다.


실존철학은 이 지점에서 가장 놀라운 통찰을 제공한다.


인간은 실존이다. 실존의 뜻은 아주 단순하게 '던져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던져진 것, 즉 이미 을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제외될 수 없이 모든 인간은 을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을로 사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다.


실존철학의 표현 속에서 을은 유한성이라는 개념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유한성은 초월성과의 역설관계를 이룬다. 곧, 유한하기 때문에 초월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번뇌즉보리다.


깨달음은 이 유한성에 대한 모든 것이다. 즉, 을의 입장에 대한 모든 것이다. 어떠한 을이라도, 그것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을은 온전하다는 응답이다. 을이 있기에 깨달음이 있다. 이 진술은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실존철학은 오직 한 노랫말만을 거듭해서 노래하는 철학이다. 그것은 바로 정직성(authenticity)이다. 인간이 을의 입장이라는 사실에 정직하자는 것, 그 정직한 승인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 그것만이 실존철학의 제안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의 자연스러운 전개방향은 종교성을 향하게 된다. 실존철학은 깨서 닿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근사한 태도다.


그렇다면 니체를 위시한 많은 실존철학자들이 왜 화와 친밀한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그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유한하니까 화가 나는 것이다. 화는 을의 자연스러운 반응양식이다.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는 초월성을 암시하는 증표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죽음 앞에서 화가 나는가? 영원이라는 초월성이 우리에게 이미 암시되고 있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초월에의 가능성이 없다면 화는 야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생명의 근본적인 특성은 바로 이 초월성이다. 생명은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그 밖을 향한다. 인간에게 이 현상은 탈존이라고 불린다. 밖으로, 또 밖으로 계속 빠져 나가면서, 그 새로운 지평 위에서도 온전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활동을 이룬다는 것, 곧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초월적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산다는 것은 곧 화낸다는 것이다. 화는 불이다. 불을 지펴 열을 만드는 것이다. 열은 모든 생명활동의 근간이다. 열이 있어야 변화가 가능하고, 창조가 가능하다. 불을 찾아 떠난 태고의 인간의 모습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인간성의 원형이다. 이렇게 본다면, 화는 대단히 신성한 속성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윌리엄 존스톤 신부는 분명하게 화의 신성성에 대해 언급한다. 화는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감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화는 근본적으로, 은유하자면, 하나님의 화인 까닭이다. 곧, 모든 화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화다. 무력하고 약한 을의 입장에 놓인 인간의 호소에 응답하고자 내려오는 하나님의 몸짓이 곧 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화가 깨달음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다. 실제로 선가(禪家)에서는 화로 깨닫는 경우가 가장 많다. 화로 말미암아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하게 될 때, 그 유한성의 자각 자체가 인간에 대한 가장 온전한 승인이 되는 까닭이다.


"내가 인간이다. 가장 무력한 을이기에 가장 귀한 그 이름, 인간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선언이다. 인간을 발견한 이의 선언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기꺼이 을인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을에서 신성으로의 전환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신성은 갑의 유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을의 삶 속에 있다. 갑이 하나의 우상이 되어 을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을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을과 신성이 직접적으로 서로를 만나는 것, 그것이 연애학으로서의 실존적 종교성에 대한 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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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즉 느낌은 생명력의 반응이다. 화는 그 생명력의 반응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것이다. 생명이 자신의 생명력을 발산하지 않을 때 갑갑해진다. 항구적인 이완 상태를 꿈꾸는 갑의 신경증은 그래서 생명으로서의 자기포기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포기한 생명은 결국 다른 존재의 생명력을 착취함으로써 연명할 수밖에 없게 되며, 이것이 갑의 착취가 발생하는 그 이유다.


화에 대한 부정은, 이처럼 더 고급스러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생명성의 부정이다. 그래서 화를 부정하려는 갑은 실제적으로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자며, 삶을 부정하는 자다. 뿌리깊은 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는 갑의 대표적인 심리적 특성이다. 그렇게 자신을 혐오하는 만큼 갑에게는 늘 화가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갑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자신이 실은 을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다.


우리 모두는 을로 살며, 곧 우리 모두는 화로 산다. 화가 없는 삶의 현실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판타지적 망상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연소해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남는 것은 화의 방향성의 문제다.


누군가가 자신을 갑이라고 착각할 때는, 심지어 그 갑의 입장을 깨달음이라는 미명하에 유지하고자 할 때는, 화는 최고의 인간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부단히 공격하는 날붙이가 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을이라고 정확하게 자각할 때는, 그 화는 초월성을 향한 노래가 된다. 그리고 노래하는 이는 언제나 그 노래 속에 이미 감싸여있다.


그래서 이것이 다시 한 번, 결론이다. 조금 여유로운 현대인을 위한 말미의 선물이다.


우리는 을이다. 유한한 우리는 결코 갑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못난 을이기 때문에 화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늘을 찢으며 우리를 찾아 부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환한 것이다. 불은 열이며, 동시에 빛이다. 우리는 불 앞에서 환해진다. 화내진 것이 아니라, 환해진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야, 어디에 있느냐?"


이 목소리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해진다. 가장 거대한 목소리가 가장 작은 을인 우리에게 스스로를 기꺼이 묶어매는 이 신성한 고백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해진다. 더는 부정할 수 없이 지금 막 확인된 이 영원한 사랑의 긍정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해진다.


깨달음은 항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매번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화난 자는 사랑할 수 있는 자다. 사랑으로 환한 자다. 오직 을에게만 허락된 기적, 그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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