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 2(Frozen 2, 2019)

불안의 신비 "불안은 내가 부르는 목소리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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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이 '왕국'을 구성하는 이야기라면, 이번에는 '왕국'을 해체하는 이야기다.


선(禪)가에서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 먼저 울타리를 세운다고 말하고, 이와 유사하게 종교심리학의 현대적 전개라고 할 수 있는 트랜스퍼스널(transpersonal) 심리학에서는 "무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되어야 한다(You have to be somebody before you can be nobody)."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다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자유란 하나의 경계를 명확히 확인하고, 그 경계 밖으로 향하는 것이다. 고로 경계가 없으면 자유도 없다. 무경계는 자유가 아니라, 단지 경계성 장애일 뿐이다.


때문에 경계들은 서로 지극히 존중되어야 한다.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경계가 사라지거나 흐려져서는 안된다. 그것이 바로 '왕국'의 폭력이다. 역사적으로는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잘 드러났던 모습이다.


경계는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에서 펼쳐진다. 아니 이미 주어져 있다. 경계가 먼저 고유하게 주어져 있고, 그로 인해 하나와 다른 하나가 경계를 사이에 두고 출현한다. 곧, 경계로 말미암아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고유한 경계가 존중될 때, 만남이라는 것은 정말로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에서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정말로 우리 자신의 자유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경계라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그저 사이의 공간인 까닭이다. 자유를 아주 실증적인 차원에서 체감할 수 있는 감각으로 묘사해본다면, 자유는 우리가 누구도 아니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특정한 역할이나 기능에 갇히지 않고,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경계란, 곧 그 누구도 아닐 수 있는 자유를 그대로 담보해주는 배경이 된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영화가 바로 오롯하게 자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영화의 여주인공인 엘사는 모든 조건이 완벽한 '왕국' 안에서, 자신을 알 수 없는 영토로 꾀어내는 것만 같은 노래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현재의 완벽함을 붕괴시킬 것처럼 느껴지는 그 노래소리를 애써 무시하면 할수록, 그녀는 점점 피곤해지고 우울해진다.


엘사는 지금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완벽함은 하나의 동결된(frozen) 상태와도 같다. 하이데거는 이를 삶의 명사화라고 말한다. 불안은 이렇게 고정된 사물처럼 동결된 삶이 미지(unknown)에 의해 촉발되어 몸부림치는 것이다. 곧, 불안은 미지에 대한 반응이다. 에리히 프롬은 여기에 탁월한 통찰을 더하는데, 그가 말하기로 "불안은 아직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개인의 잠재력의 표현"이다.


즉, 현재의 조건이 구성한 임의적인 자신보다도 더 거대한 자신의 면모가,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더 크게 드러나고 싶어서 용트림하는 움직임이 바로 불안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안정된 동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불안을 억압한다. 그리고 불안의 억압은 곧 우울이라는 증세를 야기한다. 우울은 개인의 생명력이 강제로 눌려진 상태다. 곧, 현재의 안정된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과, 더 거대한 자신을 개방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두 대립의 기제가 불안과 우울이라는 의미다.


실존철학은 언제나 언어게임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생리학이다. 그러한 실존철학의 입장에서 분명하게 불안은 자유와의 동의어다.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나아가 불안은 신비이기까지 하다. 신비(mystery)는 우리 자신을 위해 아름답게 작동하는 미지(unknown)를 일컫는 표현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의 제목이 'Into the Unknown'인 이유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미지, 곧 가장 큰 신비는 바로 나다. 나라고 하는,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가장 큰 자유의 이름이다.


보르헤스는 『상상동물 이야기』에서 시무르그라는 새들의 왕의 이야기를 전한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새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거두어줄 새들의 왕을 찾아 떠난다. 그러한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불확실함에 몸을 맡긴 채 새들은 갖은 고난을 겪으며 나아가고, 결국 최종적으로 30마리의 새들만이 남아 왕의 궁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30마리의 새들은 궁전에서 왕의 옥좌를 발견한다. '30마리의 새들'이라는 뜻의 시무르그라는 단어가 새겨진 텅 빈 옥좌를.


존재론적으로 얼어붙어 있는 왕국 안에서, 행여 그 왕국의 완벽함이 붕괴될까봐 엘사를 불안하게 만들던 그 노래소리는 바로 그렇게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나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다. 나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가장 큰 타자다. 나는 언제나 미지 중의 미지다. 이것이 가장 명확한 경계다.


우리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순간보다도 더 놀라운 것, 그것이 바로 나다. 그 나로부터 불어오는 오래되고 좋은 바람에 살포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의 깃털의 흔들림이 바로 불안이며, 완벽함보다 더 멋진 지금의 경계 밖을 향해, 곧 나를 향해 그렇게 박차오르는 우리의 날개짓이 곧 자유다.


어떠한 것이 가장 안정되었다는 것은, 그것의 움직임이 이미 경계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더는 뻗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장의 활동을 멈춘 생명은 죽은 것과 같다.


영화에서는 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묘사한다. "물은 기억을 갖고 있다."라는 영화 내에서 반복되는 대사는, 이 영화에서 물이 생명력의 은유로 활용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생명의 근본적인 특성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함으로써, 기억된 것의 경계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그 경계 밖으로 넘어 나아가는 것이다. 유한과 초월의 공속적인 작용은 이처럼 기억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은, 물이 댐에 의해 갇혔기 때문에 발생한다. 생명력이 그 활동을 멈추었다는 것이고, 기억이 은폐되었다는 것이다. 불안은 그래서 해체를 요청하는 목소리다. 임의적인 완벽성을 해체함으로써, 생명력을 회복하고, 경계의 명확한 확인을 촉구하는 나로부터의 요청이 곧 불안이다. 그래서 불안은 양심의 알림이기도 하다.


불안은 이처럼 지금 우리가 더 생생하게 살아 오르도록 내가 부르고 있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따라감으로써, 곧 불안을 따라감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나로서 드러나게 된다. 미지를 향해 설레는 삶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다. 나로서 온전하게 사는 그 현실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렵고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안나는 그 실천론을 알기 쉽게 묘사해주는 인물이다. 엘사와 안나는 이른바 무의식과 의식의 대비고, 존재와 행위의 대비며, 모르는 것을 탐험하는 자와 아는 것을 경영하는 자의 대비다. 곧, 둘이서 하나다.


안나의 행동원리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미지가 부르는, 곧 내가 부르는 불안의 목소리를 신뢰하며, 지금 자기의 몸으로 눈 앞에 놓인 작은 일에 응답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한 걸음은 반드시 나를 향한 걸음인 까닭에, 걸으면 걸을수록 나를 실현하는 걸음이 된다. 그렇게 더 거대한 미지의 나를 향해 걸어갈수록, 곧 더 많은 불안을 느낄수록, 역설적으로 더 거대한 나로서의 힘이 증진된다. 그 결과, 작은 일에 응답하는 것으로 시작한 처음의 장면에서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전환들이 이루어지게 된다. 진실로 프롬의 말처럼, 불안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나의 잠재력이라는 사실이 이와 같이 입증되는 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란 불안을 자신의 편으로 삼은 이가 누릴 수 있는 삶의 충만한 실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를 따라 사는 이가 나로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안의 신비다. 불안은 나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망(望)하는 것이다.


이 불안을 향해 적극 개방된 태도로 말미암아, 이제 완벽함의 주박에 갇혀 있던 물길이 터져 나오고, 오랫동안 망각되어 있던 기억들이 온당하게 상기되며, 정지한 시간 속에 동결되어 있던 생명들이 해방된다. 그로 인해 경계는 더욱 선명해지고, 선명해진 경계만큼 만남의 감동이 회복된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완벽함이란 불안을 회피하기 위한 무경계의 의도가 만들어낸 가공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무경계에 의한 서로 같음이 아니라, 경계에 의한 서로 다름이, 서로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현실을 창조해낸다는 사실을.


완벽한 '왕국'은 해체되었고, 자유로운 나는 만나졌다. 해체는 해후의 선결조건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서로가 자유로운 나로서, 아직도 그 면모가 다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오직 베일 뒤에 미소로만 가득한 미지의 나를 향해 함께 노래해갈 것이다. 다시 또 미지 속으로 기쁘게 항해해갈 것이다. 영원히 내가 부르고 있는 그 신비로운 목소리를 따라서.






Frozen 2 OST - Into the 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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