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너'를 붙잡기 위해 이 세계에 왔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에서 주인공 홀든이 소망하는 일은 붙잡는 일이다. 기쁨 속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는 일이다.
이 영화는 더 나아간다. 하늘 끝의 낭떠러지에서 이미 떨어져내리는 기약없는 이와도 함께 하강하며 붙잡는다. 여기에서 붙잡히는 것은 단지 '너의 이름'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너' 그 자체다. 가장 생생한 너의 몸이다. 영원히 함께 살고 싶은 너의 숨결이다. 가장 긍정되어야 할 너의 생명이다.
그렇게 신카이 마코토는 분명하게 더 나아갔다. 뜨겁게 나아갔다. 뜨거운 여름햇살 속에서 황금의 목표로 정조준되어 벅차게 너를 향해서만 달려나갔다. 미혹은 끝나고 한 길의 질주만이 선명했다.
'너'를 향한 이 여정은 다분히 실존주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벌거벗겨 내동댕이쳐진 황무지에서 시작한다. 가출이라고 해도 좋고, 출가라고 해도 좋은 외연은 단지 이 피투성(thrownness; 被投性)의 재확인일 뿐이다. 그리고 애당초 부조리한 세계를 만나, 그 버거운 운명의 제약 속에서, 속상한 유한성의 한계 속에서, 인간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비로소 발견한다. 아직도 가능한 일을 마침내 이해한다.
그것은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이다. 오직 '너'를 향한 사랑이다. 부버, 레비나스, 마르셀과 같이 실존주의의 전통에서 너의 철학을 노래한 이들은 이 영화와 가까이 있다.
인간의 마음과 하늘이 이어져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장고한 인연의 끈이 끊겼다. 단절되었다. 어느 순간 인간은 소외 속에 던져졌다. 이 찢어진 관계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종교성의 탐구다. 그래서 이 영화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한 편의, 종교 아닌 종교적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이 하늘과의 관계성을 되찾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녀는 매개자(medium)의 역할로 기능한다. 인간을 대변하는 그녀의 마음과 하늘은 공명하며, 희노애락은 공유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까닭에, 그녀의 운명은 모든 매개자의 역할이 그러하듯이 희생양으로서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녀가 그 희생양의 운명을 떠맡은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물하고 싶어서다. 비 내리는 우울한 날씨가 아닌, 화사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맑은 날씨를 통해, 그와 연동된 마음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어서다.
기쁨의 환경이 우리를 상호적으로 자연스레 기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기쁨의 조건이 지속되는 한 우리도 계속 기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세계는 조작된다. 그리고 이처럼 조작되어 만들어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의도로 인해 희생양의 운명은 불가피하게 성취된다.
그녀가 세계를 임의적으로 조작하는 만큼, 그녀는 이 지상에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녀가 매개자로서 활용하는 힘은 바로 그러한 힘이다. 자신의 몸을 깎아서 사람들에게 바치는 희생의 힘이다. 그것은 고결하나 서러웁다.
서러운 것은 아픈 것이다. 이 아픔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바로 이 아픈 '너'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
그는 바로 사랑하는 이다.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의 얼굴로부터 사랑은 호명된다. 그래서 사랑은 오히려 명령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틸리히의 말처럼, 사랑하는 이는 이미 그 사랑의 절대적인 권세에 붙잡혀버린 것이다.
이처럼 너의 얼굴에 붙잡혀버린 이에게는, 이제 기쁨만이 전부가 아니다. 늘 기뻐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늘 맑은 날씨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얼굴이 드러내는 아픔을 소외한 채, 사랑하는 이는 결코 웃을 수 없다. 너의 얼굴이 여전히 근심어리다면, 그 어떤 맑은 날씨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너의 얼굴을 눈치챔으로써, 너를 향한 사랑에 붙잡혀버린 이에게, 비로소 희노애락이 회복된다. 기쁨만이 아닌, 희노애락 자체가 다 긍정된다.
나는 너와 함께, 기뻐하고, 화내며, 슬퍼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기뻐하고, 화내며, 슬퍼하고, 즐거워할 바로 이 세계에서 살아갈 것이다.
벌거벗겨 내동댕이쳐진 이 황무지에서도, 이 미친 세상에서도, 이 모든 희노애락으로도, 다 사랑할 수 있다. 그 무엇으로도 전부 다 너를 사랑할 수 있다. 너의 긍정은 나의 긍정이 되고, 이 세계에 대한 긍정이 된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다 긍정된다.
긍정은 그 명징함만큼 망설임이 없다. 우리의 몸과 같다.
희생양이 되어 하늘의 제물로 봉헌되면 이 몸이 투명해진다. 몸을 잃는다. 그러나 사랑은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는 이 몸을 다시 찾기 위해 땅으로 복귀시키고자 한다. 다시 육화시키고자 한다. 사랑은 그렇게 너의 몸을 붙잡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이다.
모든 간절함은 수직운동을 만든다. 그래서 사랑의 운동은 언제나 수직운동이다. 에로스는 상승하고, 아가페는 하강한다. 특히 에로스는 사랑으로 가슴을 뜨겁게 불태우며 '너'의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간절함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 간절함을 더욱더 몰아붙여 개방해낸다. 에로스는 이제 '너'를 사랑하는 이가 하늘 끝까지라도 바득바득 기어오르게 한다. 프시케의 신화다.
그리고는 결국 너에게 닿는다. 사랑하는 너의 몸을 붙잡는다. 그리고 다시는 잃지 않도록, 이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하강한다. 육화시킨다. 그렇게 너를 이 지상에 끝내 붙잡아낸다. 놓치지 않는다. 영원을 약속한다. 이 영화에는 바로 이러한 눈물겨움이 있다.
눈물은 분명하게 만남의 감동을 함축한다. 만났다. 분리되어 있던 것들이, 서로의 반대편에서 서로를 향해 뜨겁게 질주하던 벅찬 여정 끝에 드디어 만나졌다. 상승과 하강이, 에로스와 아가페가, 인간과 하늘이, 나와 너가, 서로를 찾아 헤매던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동시적으로 만나졌다. 다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연결감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산다는 것은 늘 변화하는 날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어떤 날씨 속에서도 살아간다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다시 한 번, 빛이 들지 않는 날씨가 있다. 그러한 세계가 있다.
그러나 빛이 있다.
이 지상으로 붙잡아낸 바로 네가 있다.
너는 빛이다.
아무리 어두운 세계에서라도 너만은 빛난다. 네가 있다는 그 사실만이 그 어떤 날씨 속에서도 기쁨이다.
그러한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너의 전모를 붙잡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네가 바로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