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심리학: 인간의 모든 이야기"
인간이 지금까지 써내려온 장구한 이야기는 오직 하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받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소망 또한 궁극적으로 단 하나에만 수렴된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
더 노력하지 않아도, 더 발전하지 않아도, 더 괜찮은 존재가 되지 않아도, 그리고 혹시 지금보다 더 나빠져도, 더 못나져도, 더 형편없어져도, 그러한 모습 그대로 100%로 사랑받고 싶다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이 물음에 대해 스스로를 구원할 대답을 찾아왔다. 여기가 아닌 저 먼 곳에 가면 가능하다든가, 더 많은 문화-정치-역사-사회-경제-윤리적 인간조건을 달성하면 가능하다든가, 다른 이를 투명하게 사랑하면 가능하다든가 하는 식의 모든 이야기는 다 이 '어떻게?'의 결과로 만들어진 자구책들이다.
우리는 어떠한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바로 사랑받는 것 같은 느낌 속에 있을 때다. 그래서 행복함과 사랑받음은 동의어다. 그렇게 이 모든 '어떻게?'의 물음이 창발해낸 다양한 담론게임들은 결국 인간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행복론들이었다. "내 방법이 너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의 자기어필과 그로 인한 무한경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사랑받고 싶은 소망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발상을 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를 묻는 대신에 '왜?'를 물었다.
"왜 사랑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혁명적인 이들은 그 위대한 물음이 도약시킨 결과로 인해 혁명적인 현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사랑받고 있음'의 현실이다. 사랑을 결핍이라고 경험하면서 그 결핍에서 벗어나 사랑받는 현실을 어떻게 획득할까 궁구하던 이가, 가장 깊은 바탕에서부터 이미 그 어떤 결핍도 없이 사랑받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 이 전환은 분명하게 존재론적 전환이었다.
종교적 탐구 속에서는 조금 이전부터 암시되어 왔던 그 현실이지만, 이러한 현실이 보다 보편적인 층위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한 현대철학의 공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그 선구자들이다.
이들이 선구자인 이유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보다 전면으로 끌고 나왔다는 점에서다. 삶이 나를 살라고 허용하고 있다는 것, 이미 그렇게 살리고 있다는 것, 즉 삶은 결코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가브리엘 마르셀의 정의에 의하면 바로 사랑이다. 마르셀은 말한다.
"사랑이란, 상대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여, 영원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 자신의 생각과 감정,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삶은 언제나 나를 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삶은 나를 향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나라는 의식 속에서 발화된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은, 이미 그 소망이 실현된 지평 위에서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위대한 역설은 이와 같이 성립되었다.
낭만적인 은유로 치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치부도 삶이 나를 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죽음을 꿈꾸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도 이미 삶의 지평 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삶을 떠난 적이 없다. 떠날 수도 없다. 삶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은유한다면, "항상 네 곁에 있으리라."라고 하는 예언은 이미 시작부터 성취되어 있던 예언인 셈이다.
결국 핵심은 이러한 것이다. 이처럼 삶이라고 하는 존재론적 지평을, 그로 인해 인간에게 가능해지는 사랑받음의 현실을, 곧 온전함의 근거를 포착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길이 이어졌다. 인간이 삶에 의해 이미 사랑받는 현실을 더욱 깊게 개방해내고자 한 탐구자들의 일군은 오늘날 인본주의 심리학과 실존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재차 명명되어왔다. 이것이 첫 번째의 심리학이다.
이 첫 번째의 심리학의 세력들에게 가장 먼저 기각되는 기획은 신적 주체를 옹립하는 일이다. 이들은 자신이 타자를 구원하고, 세상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며, 늘 자기반성을 통해 건강한 주체성을 키워나가고자 하는 과대망상적 주체를 부단한 노력으로 성립시키려는 대신에, 단순하게 삶을 반갑게 맞이할 공간을 준비한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의 심리학의 세력들은 명백해진다. 아주 빈번하게 프로이트, 라캉, 융 등과 같은 정신분석[정신역동] 및 그 지류의 세력들이, 그리고 또한 심리학으로 위장한 사이비심리학들이 이 두 번째의 심리학을 위한 자리에 입장한다. "죽을 때까지 자기분석을 해야 한다."가 이들의 공통적인 지론이다. 이 말은 이렇게 다시 옮길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삶과 싸워야 한다." 쉐도우 복싱을 하는 투사의 길이다.
실존심리학적 입장과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공유되는 출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의 무의미성이다. 그러나 이 무의미성은 양자에게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전자에게 무의미성은 기적이고 경외다. 그 어떤 자격의 성취 없이도 내가 존재해도 된다는 무조건성의 감수성으로 이 무의미성은 전환된다. 그러나 후자에게 무의미성은 너무나 싫지만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후자는 무의미성을 억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 무의미성의 자리에 자신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신적 주체가 되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두 번째 심리학에 봉사하는 이들이 고된 투사가 되는 일은 필연이다. 그들에게는 커다란 짐이 두 개나 얹혀 있다. 텅 빈 황무지를 받아들이고, 그 위에 새로운 왕국마저 건설해야 한다. 때문에 이 세력들에게 있어 삶은 근본적으로 비극이다.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는 이 두 번째 심리학이 은밀하게 내포하고 있는 주된 정조다.
때문에 이 두 번째 세력의 봉사자들은 늘 외롭다. 온도감으로 말하자면 차갑다. 차가우니까 열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으로 뜨겁게 광신을 불러일으킨다. 이 세력들이 곧잘 교조화되는 이유다. 그리고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돈, 명예, 인기 등을 부단히 수집하여 그 축적된 자원의 양에 스스로 도취되고자 한다. 그러한 열광적 도취라도 이루어야,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까닭이다.
결국 이 외로운 투사들은 누구보다도 사랑받는 현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추종자들을 많이 만들어 자기 옆에 두고자 한다. 자기를 보며 찬미하는 추종자들의 눈빛 속에서 그들은 사랑의 비루한 대체물을 획득한다. 자신이 유능하지 않아지거나, 가난해지거나, 지적 매력이 떨어지면, 곧바로 사라지게 될 그 모래성을 끌어안고 자위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오히려 사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상하고, 배려심 많고, 긍휼하게 사랑하는 자로서의 지위, 그것은 이 두 번째의 심리학의 핵심적인 귀결인 까닭이다.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그 어디에도 사랑이 없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한다.
'사랑이 없어서 내가 사랑받지 못하니,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이것이 이 두 번째 심리학의 봉사자들이 왜 투사가 되는가에 대한 그 이유다. 그들은 분명하게 삶과 싸우고 있다. 사랑하기 너무 어려운 삶을 어떻게든 사랑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상형에 대한 앎과는 너무나 다른 삶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앎을 끝없이 삶과 싸움붙이며, 그래도 이 삶이라고 하는 마음에 안드는 상대를 연인으로 만들어보겠다고 애쓰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로서의 이 기획이 성공해야, 비로소 그들은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자의 책무로서 끝없이 자기분석을 해야 하고, 자신을 부단하게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며,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정복하기 위해 영원히 투쟁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첫 번째의 심리학과 두 번째의 심리학의 변별은 명료해진다.
첫 번째의 심리학은 '자연스럽게 삶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길'이다.
두 번째의 심리학은 '노력해서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길'이다.
이처럼, 첫 번째의 심리학은 사랑 그 자체의 다가옴에 자신을 열어놓으려는 의도고, 두 번째의 심리학은 자신의 힘으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의도다. 물론 후자는 연애 못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노력하기 때문에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사랑의 가장 큰 역설이다. 사랑은 유능한 신적 주체가 되고자 노력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능한 알몸의 인간임을 고백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심리학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의 이야기다.
알몸이라는 것은 개방성의 은유다.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첫 번째의 심리학의 중요한 선구자들인 칼 로저스와 폴 틸리히는 함께 나눈 대담에서, 종교적 탐구와 심리학적 탐구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바로 이 '삶에 대한 개방성'임에 동의했다.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삶에 대해 인간이 이러할 때, 삶 또한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전해준다. 여기에서도 첫 번째의 심리학과 두 번째의 심리학의 중요한 변별이 묘사된다.
먼저, 두 번째의 심리학은 지층 모델을 설정한다. 그래서 심층심리학이다. 그 의미는, 중요한 것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숨겨진 것(occult)을 찾아낼 방법론이 중요해진다. 알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더 많이 알수록, 더 중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특권적 가설은 이렇게 성립된다.
그러나 첫 번째의 심리학을 지지하는 선(禪)과 비트겐슈타인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라도,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평등하게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의 심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앎의 노력을 통해 얻은 더 진정한 것을 알려주겠다는 두 번째 심리학의 봉사자들의 언술은 그저 수작질이다. 노력한 자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사랑에 대한 가장 불순한 거짓말의 물귀신 작전이다.
첫 번째의 심리학의 아주 친밀한 이웃사촌인 선은 조금 더 말한다.
"노력하지 말라."
"자신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갈고 닦지 말라."
"삶은 좋은 것이다."
"이 현실은 허무한 것이 아니고, 진짜 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깨달아 있다[이미 사랑받고 있다]."
에리히 프롬이 선과 정신분석을 연결했다고 해서 선이 두 번째의 심리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프롬이 실상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의 심리학을 묘사하고 싶어했다는 사실은, 인본주의 심리학의 성지인 캘리포니아 에살렌 연구소에서의 그의 행보로도 잘 묘사된다.
아주 단순하게는, 아무 것도 몰라도 사는 것만으로 좋아서 웃음짓는 이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알아야 한다며 미간에 주름을 새기는 이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또 다른 진술 또한 가능하다. 『종교 없는 삶』이라는 저작에서, 교조화된 앎이 아닌 삶 그 자체에 개방된 인간의 현실을 경외주의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필 주커만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경외주의(aweism)는 궁극적으로 실존이 아름다운 신비이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의 원천이고, 창조와 시간, 공간 같은 실존의 심오한 문제들이 깊은 기쁨과 통렬한 아픔, 숭고한 경외감을 자아낼 정도로 강력하다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경외주의는 또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 우주가 생겨나게 된 과정과 이유는 누구도 영원히 진정으로 알 수 없다는 믿음에 겸허하고도 행복하게 기초하고 있다."
조금 더 살펴볼 수 있다.
"경외주의자는 진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의 도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이따금 경외감을 느끼고, 음미하고, 인정하고, 만끽하면서, 초자연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케케묵은 생각 없이 계속 살아갈 뿐이다. 실존에 대한 경이와 깊은 감사에 푹 젖어 있지만 경외주의는 여전히 이 세상에 분명한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여기, 어디 다른 곳이 아닌 우리의 삶, 우리의 세계를 중시한다."
정녕 아무 것도 지층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다. 죽을 때까지 파내려가야 할 위대한 앎 따위는 있지도 않다. 거짓된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노력을 통해 드러내야 할, 아직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나'와 같은 것도 환상일 뿐이다. 지금 이 세상은 자아의 환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갖는 또 하나의, 그리고 더 근본적인 환상일 뿐이다.
"아, 삶이라는 것 참 좋다. 또 한 번 살고 싶다. 그리고 또 한 번."이라고 말하는 니체의 태도는 바로 이 첫 번째 심리학의 태도를 함축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사랑받는 자의 태도다. 그래서 경외감은 출현한다.
"이런 나도 살아도 된다니, 이런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니,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다."
이것이 경외감이다. 경외감은 곧 행복감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특정한 행복의 자격을 취득했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벌거숭이의 인간인 까닭에 무조건적으로 선물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두 번째의 심리학의 예찬자들도, 자신들 역시 삶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시 물어볼 수 있다. 그들이 현재 삶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모든 돈, 인기, 권력 등의 소재를 다 잃고 벌거숭이가 된다 해도 삶을 좋아한다고 지금과 똑같이 말할 수 있겠냐고. 그 대답은 한없이 회의적이다. 아니, 그 표정은 한없이 회의적이다.
결국 두 번째의 심리학의 세력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려움이야말로 그들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그들은 삶을 두려워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은 '삶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랑받으면 사랑 속에서 그들 자신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소멸이 두렵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그들이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행위에서 비롯한 그 두려움이다.
그들은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자기의 동일성 속에 모든 것을 용해시켜 도취로 이끌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들이 자신의 부모에게서 경험했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부모에게 사랑을 갈구한 이가 두 번째의 심리학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두 번째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모든 이가 부모와 관련된 욕망의 문제로 시름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의 심리학의 봉사자들 자신이 그렇게 시름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요는, 이처럼 두 번째의 심리학의 세력은 고작해야 자신의 부모에게서 받았던 방식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주었던 방식을 사랑이라고 간주하기에, 사랑받음에 자신을 개방하는 현실이 어렵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하다. 사랑받음의 현실은,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과는 정반대로, 무력하고, 무능하고, 취약해짐으로써 개방할 수 있는 현실인 까닭이다.
그러나 100%다. 그리고 그들의 착각과는 전혀 다르게, 그러한 사랑받음의 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자신은 온전하게 보존되기까지 한다. 그것을 자아라고 불러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 자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아는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애써왔다. 잘못되었다고 간주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투쟁해왔다. 그러한 자아의 환상을 벗겨야만 한다고 주장하던 두 번째 심리학의 그 주체 또한 자아다. 그래서 이는 하나의 자아를 다른 자아가 두들겨 패서라도 교정하려고 하던 쉐도우 복싱이다. 그치지 않는 아픔이며, 아물지 않는 상처다.
그러나 첫 번째 심리학은 이제 시인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주먹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센 북풍이 밀려 왔으니, 이제 자아의 연약한 속살을 내밀면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다가와 감싸안아주리라."
자아가 환상인 것이 아니라, 삶이 허무하고 두려운 것이라는 그 진리명제처럼 믿어지던 진술이 환상이다. 삶은 허무하고 두려운 것이라는 명제가 주어졌으니, 자아는 삶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삶은 허무하고 두려운 것이라는 진술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부모의 것인가? 사회의 것인가? 남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 몸에서 왔다. 이 세상에 던져진 내 몸에서 왔다. 나는 내 몸이 두려웠다. 내 몸으로 체험되는 압도적인 느낌들이 두려웠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롤러 코스터와 같았다. 그렇게 삶은 몸으로 하는 모험이었고, 그것은 압도적으로, 좋았다.
너무 좋아서, 이 좋은 것이 언젠가는 잃어진다는 생각에 허무했고 더 두려웠다.
삶과 사랑했던 흔적들이, 삶으로부터 사랑받은 자취들이, 이처럼 삶을 끝내 허무하고 두려운 것으로 귀결시키게 된 그 이유였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태생부터 붓다였다. 삶이 너무나 좋아서 죽고 싶어하지 않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더 연명할까 하는 생존에의 두려움 속에서 시름하다가, 그렇게 자아의 투쟁을 시작하다가, 결국 붓다처럼 이해하게 되었다.
"아,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뿐이구나."
그것은 삶과 죽음에 동시에 개방된 순간이었으며, 또한 삶과 죽음이 동시에 받아들여진 순간이었다. 즉, 나의 모든 것이 다 받아들여진 순간이었다. 틸리히는 사랑의 현대적 용어를 수용(acceptance)이라고 말하며, 사랑받음의 실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당신은 받아들여졌다(You are accepted)."
나는 단 한 번뿐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나를 단 한 번뿐인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것은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보물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의 도약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말했잖은가.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나는 보물이다. 희소재다. 절대적으로 귀한 것이다. 이 보물은 지층 속에 숨겨져 있지 않다. 이미 드러나 있다. 삶이 만들어준 모습 그대로 부끄러워할 것 없이 당당하게 드러나 있다. 혹시라도 잠시 망각했다면 언제라도 다시 기억할 수 있다.
"삶은 이런 내가 살기를 바랐다."
이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삶만은 그렇게 절대적인 내 편이다.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며 나를 추방하려고 할 때, 삶에게 물어보라.
"이런 나도 살아도 될까요?"
삶은 그렇게 묻는 나에게 가장 따듯한 대답을 전하기 위해 언제나 나의 뺨으로 흘러넘친다. 이 생명의 물줄기가 결코 마르는 일 없이 끝까지 나와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을 부드럽게 전한다.
이처럼 내가 이미 삶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그 신뢰를 확인받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심리학의 모든 것이다. 삶에게 사랑받는 인간의 모든 이야기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첫 번째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