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불순

"실낙원에서 탈낙원으로: 인간에게 정말로 가능한 마법에 대하여"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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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서 자주 묘사되는, 30세까지 동정이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농담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조금 더 진지하게 믿어져온 속설이다. 유니콘은 처녀에게만 다가온다느니, 뱀파이어가 숨어있는 곳을 알기 위해서는 순결한 소년을 말 위에 태워 인도받아야 한다느니 등과 같은, 고전적인 민담들 역시도 결국 이와 동일한 믿음의 기원을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바로 순수한 것에는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다. 즉, 순수한 것은 일상적인 현실을 초월할 정도로 우월한 힘을 담지한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처럼 순수라는 개념은 비일상적인 힘의 현실과 연결되었고, 순수에 대한 믿음이 추구된 그 결과는 그로 인해 비상식적인 권력의 현실을 낳았다. 곧, 마성적(demonic)인 현실을 낳았다. 이를테면, 흑인의 피는 더럽고, 유태인이라는 인종은 불순하며, 여성은 열등하다는 식의 마성적 신화들이 전지구를 뒤덮었다. 민족주의, 인종주의, 순혈주의, 가족주의, 전체주의, 가부장주의, 정의주의 등으로 묘사되는 그 모든 권력적 이념들은 바로 이 순수성의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실존심리학의 개척자인 롤로 메이는 분명하게 말한다.


"순수는 가장 폭력적인 것이다."


그의 선생인 틸리히 또한 순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순수는 에덴동산에서 몽롱하게 꿈꾸는 것과 같은 미숙함의 한 상태다."


틸리히에게 실존이라는 개념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의 현실을 묘사하는 개념이다. 하이데거의 정확한 표현과 맥을 함께하여 실존은 이와 같이 '던져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낙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탈낙원이다. 실존은 탈낙원의 몸부림이다.


실존은 그래서 순수가 아닌 불순을 향한다. 동시에 불순이 실존을 향해 다가온다. 삶은 원래 순수하지 않다. 삶은 원래 불순한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떠올려봐도, 땅에 던져진 것이 결코 깨끗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처럼 실존은 불순함과 하나된 호흡이다. 불순함으로 말미암아, 기꺼이 탈낙원을 시도하면서까지도, 낙원보다 더 거대한 것을 노래하고자 하는 그 호흡이다.


호흡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일상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 호흡이다. 그것은 탁월한 모종의 힘도 능력도 아닌, 그냥 평범한 생리적 작용인 것처럼 간주된다. 조금도 특별하지 않으며, 누구나 이미 다 하는 일상의 활동이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악마 최고의 계략은, 그가 존재한다는 비일상적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장 마법적인 것은 가장 은폐되어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법적인 비일상성의 가장 큰 은폐란, 곧 가장 당연한 일상성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호흡의 의미는 전환된다. 가장 일상적인 호흡은, 이제 가장 마법적인 것으로 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먼저 호흡은 힘과 능력으로서의 그 정당한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호흡은 분명한 능력이다. 지금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현재의 상태를 호흡함으로써 그 상태에서 살게 하는 능력이다. 곧, 현재의 상태를 긍정하는 능력이다. 호흡에 의해, 인간은 어떠한 불순함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이 살아갈 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놀라운 존재로서 알려질 수 있게 된다.


이 호흡, 곧 숨쉬는 능력을 일차적으로 적응력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적응의 천재다. 적응에 있어서는 가장 특별한 생명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간에게는 불타오르는 산등성이도, 꽁꽁 얼어붙은 빙하의 대지도, 어두운 심해의 골짜기도, 적막한 달의 사막도, 심지어는 모든 것이 제한된 강제수용소조차도, 가장 좋은 곳으로 살 수 있는 힘이 있다. 분명하게, 어디에 던져졌든 간에, 어디에서 살든 간에, 인간은 바로 그곳을 가장 쾌적하게 느낄 수 있는 힘이 있다. 가장 좋은 낙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말은, 인간은 그가 던져진 그 어느 곳이라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그렇게 살아간다. 호흡은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호흡은 적응력을 넘어서 다시금 창조력이라는 의미를 얻게 된다. 인간이 가장 불순한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호흡함으로써 그 조건을 가장 좋은 것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이 던져진 환경에 놓여 있는 자원을 통해 가장 좋은 현실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조건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창조력이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레고블럭으로도 비유할 수 있다. 아이언맨처럼 가장 좋은 3000개의 블럭이 없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단 30개의 블럭으로도 무한한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30개의 블럭이 서로 저마다 다른 불순한 특성을 가질수록, 창조는 더욱 손쉬워진다. 이른바, 순수한 동일성이 아닌 불순한 타자성이 창조력을 더욱 개방하는 셈이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다. 적응력과 관련된 들숨은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재차 명명될 수 있다. 그리고 창조력과 관련된 날숨은 자기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동시에 명명될 수 있다. 수용하고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호흡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이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인간은 세계를 수용해서 자신의 가슴 안에 담아내며, 그렇게 소중하게 담겨진 세계를 다시 한 번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것이다.


가슴 안에 담긴 마음의 세계는 영원하다. 그리고 가슴 밖에 있는 현실의 세계도 그처럼 영원하기를 바라며, 인간은 가슴 속 영원의 본을 따라 표현해낸다. 이것을 세계에 대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따라서 호흡은 그 자체로 사랑이다.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 인간은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 세계와 자신이 함께 끌어안고 뒹구는 이 삶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인간은 언제나 가장 뜨거운 고백자다.


그렇게 인간의 고백의 역사 속에서 결코 상실되지 않을 가장 위대한 마법의 이름, 그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탈낙원을 꿈꾼 바로 그 이유다. 인간은 더욱더 사랑하고 싶어서 낙원의 밖으로 나섰다. 자기동일성의 순수한 하나의 낙원을 떠나, 그가 만나게 될 그 모든 불순한 타자들의 대지 또한 낙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은 장대한 사랑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사랑은 더욱더 거대한 것이, 바로 무한한 것이 되어갔다. 사랑을 향한 인간의 여정이, 그 뜨거운 가슴이, 가슴에서 일렁이는 그 벅찬 호흡이 무한했던 까닭이다.


이러한 인간의 면모를 불교에서는 연꽃의 비유로 묘사한다. 가장 더러운 곳에서 피는 꽃, 그것이 연꽃이다. 불순함을 그의 양분으로 삼아 인간은 피어난다. 여기에서 불순함의 다른 표현은 바로 다양성이다. 때문에 불순함을 섭식하는 인간은 편식하지 않고 고르게 여러 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인간이다. 즉, 건강한 인간이다. 연꽃이 아름다운 그 이유다.


불순함을 싫어하고 순수함만을 당위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그래서 아직 피어나지 않은 인간과도 같다. 이를테면, 순수한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정의를 아직 꽃피우지 못한 미숙한 상태다. 그들은 아직 씨앗이다. 그리고 그 씨앗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예쁘게 피어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씨앗의 비유에서 이미 암시되듯이, 이것은 착각이다.


씨앗은 던져진 것이다. 씨앗은 던져진다. 온갖 더러운 불순물이 가득한 땅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더욱더 더럽게 흙 속에 파묻혀야만 비로소 씨앗은 발아할 수 있다. 구름 위에서 청학을 탄 고상한 신선처럼 때묻지 않고 피어날 수 있는 씨앗은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은 순수의 판타지다. 미숙한 어린아이의 꿈이다.


현대의 실존상담의 대표자 중 하나인 커크 슈나이더는, 통합주의자이자 영성주의자인 켄 윌버와의 논쟁 속에서 이러한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그 요지는, 켄 윌버와 같은 영성주의자들은 무오성(infallibility)의 속성을 인간에게 짐지우고자 한다는 것이다. 무오성[결함없는 속성]은 순수성이 완벽주의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완벽주의 속에서는 결코 숨쉴 수 없다. 사랑은 그것이 오히려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 까닭이다.


때문에, 완전한 순수함의 환상이 고결하게 지켜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불완전한 불순함의 현실 속에 기꺼이 내던져 피어나는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지옥 속에 자신을 던지는 지장보살의 은유와도 같다. 동시에 이것은 분명하게 니체의 몸짓이다. 이 모든 불완전한 것을 긍정하고, 긍정하고, 또 긍정하고자 한, 삶을 너무나 사랑했던 이의 노래다.


불순함, 그것이야말로 삶이다. 그것이야말로 실존이다. 사랑은 오직 이 불순함을 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칼 라너는 "인간은 먼지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더러운 먼지다. 불순한 티끌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이 먼지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으로 인해, 인간은 역설적으로 온전함을 획득한다. 깨끗하고 완벽한 신적 주체가 되기 위한 고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더럽고 불완전한 먼지인 그대로 괜찮다는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 인간은 이미 괜찮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순한 삶이 우리를 어떻게 해방시키는지에 대한 그 묘사다. 불순함은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가 아니라, 교류분석을 주창한 에릭 번의 표현에 따르면, "너도 나도 이만하면 괜찮다."의 직접적인 근거다. 우리가 모두 유한한 존재며, 그 불순한 한계 속에서, 동시에 그 불순한 한계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설레이는 씨앗이라는 것, 바로 사랑의 씨앗이라는 것, 이것이 해방이다.


순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끝없는 자책과, 자기비하와, 상대적 비교와, 열등감과, 증오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한 것들은 다 착각이다. 인간은 오직, 오롯이, 불순한 먼지로서 사랑의 개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며,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마법사다. 10세가 되었든 100세가 되었든, 인간은 언제나 불순한 까닭에 마법사다. 불순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 모든 다양한 양분으로 반드시 낙원을 창조할 수 있는 마법사다. 인간은 불순함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낙원으로도 피어날 수 있는 씨앗이며, 그렇게 모든 불순한 대지를 낙원으로 긍정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법사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전모가 드러난 호흡의 의미다.


숨만 쉼으로써 오늘도 부질없이 낭비한 것이 아니다.


숨만 쉼으로써 오늘도 여한없이 사랑한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마법이다. 정말로 가능한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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