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천국"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이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슬쩍 뒤로 물러나, 나른하고 퇴폐적인 눈빛으로 어딘가 저 멀리에 있는 그대의 불가시적 낙원을 응시하는 그대여.
언제인가 보았던 감각적인 예술영화나 일본소설의 주인공과 자신을 일견 겹쳐보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무상성과 잃어버린 사랑의 슬픔을 담아 그대가 있는 모든 장면을 코발트색의 배경으로 채색하는 그대여.
우연히도 서점에서 접하게 된 인문학서의 한 페이지에서 '존재론적 고독'과 같은 심오한 용어를 보게 된다면, 어디 가서 차마 낯뜨겁게 이야기하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이 아마도 그대의 공허감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한 키워드일 것이라는 사실에 내심 동의하며 쓴웃음을 짓고 손에 든 5900원짜리 플로랄향의 커피를 한입 머금을 그대여.
아무 염려말라, 그대여. 고독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특히나 인생의 공허함에 대해서는 더욱더 걱정하지 말라.
인생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그대의 인생이 공허한 것이 아니라, 그대는 그저 놀 사람이 없는 것뿐이다.
그대가 놀 사람이 없어진 것은, 그대가 놀 사람을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친구, 애인, 동료, 친척, 심지어는 그대의 가족을 만나도, 그이들은 그대가 놀 사람으로 상정해놓은 그 대상이 아니기에 그대는 공허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엄마 아빠하고만 놀고 싶어한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정해놓았다.
맞벌이로 인해 텅 빈 집 안에서도, 밖에서 들리는 부부싸움의 소리에 숨을 죽이며 눈치만 보던 그대의 어두운 방 안에서도, 엄마 아빠가 서로 각자의 길로 갈라서야만 했던 그 갈림길 위에서도, 더는 엄마의 가슴을 만지며 잠들지 못하게 되었던 그대의 침대 위에서도, 엄마가 외출한 주말에 아빠가 스팸을 넣고 끓여준 짜파게티 냄비 앞에서도, 마지막으로 함께 떠났던 가족여행의 옛 사진 앞에서도, 그대는 단지 그대의 엄마 아빠하고만 놀고 싶어했을 뿐이었다.
그대의 황금기는 상실되었다. 좋았던 시절은 흘러가버렸다. 엄마 아빠가 그대를 보며 웃어주던 그 표정 속에 담겨있던 그대의 천국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대는 그것을 동생이 빼앗아갔다고도, 혹은 돈이 빼앗아갔다고도, 아니면 잘못된 이 나라의 교육정책이 빼앗아갔다고도 생각하며, 그 모든 소재들을 미워하기도 했었다.
그 미움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은, 그대가 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금기가 끝나게 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다만 그대의 몸이 자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빠보다 훌쩍 커진 그대에게 아빠는 더는 강인한 히어로가 아니었고, 엄마보다 더 자란 그대에게 엄마는 더는 가슴섶을 쉽게 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대는 또 하나의 제제였다. 라임오렌지나무와 함께 크고 싶지 않은 아이였다. 늘 아이로 머물며, 유년의 천국 속에서 엄마 아빠와 마냥 노는 현실이 계속되기만을 꿈꾸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이 그러한 아이라는 사실을 소외했다. 이제 얻을 수 없는 것 앞에서 계속 그것을 바라는 일은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여전히 끈질기게도 그것을 강렬하게 원했고, 결국 그대는 그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급기야는 아이를 나쁜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소망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금기시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그대가 무력하고, 연약하며, 여린 을의 입장을 왜 싫어하게 되었는가의 그 이유다. 그대는 을의 입장에서 자신이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소외시켜버린 아이의 모습을, 즉 그대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꼴보기 싫어서, 그대는 결코 을의 입장에 서지 않으려고 모든 노력을 다한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현실을 원하면서, 누구보다도 아이의 현실을 거부하는, 지난한 쉐도우복싱이 시작된 것이다.
이 끝없는 쉐도우복싱에 의해 그대는 지쳐가고, 그 지친 피로감을 이제 그대는 공허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그것의 기원이 유치한 감정이 아니라는 자기방어책을 위해, 거기에 고급언어로 구성된 유려한 수사들을 덧붙인다. 참다운 인간 되기, 어른으로 홀로 서기, 당당한 갑으로 살기, 고독의 삶, 존재의 슬픔, 자기실현, 독립성, 영성 등등, 그대가 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기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소재들은 무한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활용되는 소재는 '스승되기'다. 스승은 그대가 부모처럼 행세할 수 있는 좋은 형식이다. 자상하고, 친절하며, 부드럽기까지 한다면, 그대는 좋은 부모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그렇게 부모 행세를 함으로써, 그대는 성공적으로 자신이 아이에서 벗어난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대가 스승이 됨으로써 얻는 더욱 핵심적인 이득은, 그대가 사람들의 경탄어린 시선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대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우호적인 눈빛은, 그대를 경이롭게 바라보던 부모의 눈빛의 대체물이다. 그렇게 스승처럼 행위하는 그대는 외연적인 형식으로는 아이가 아닌 부모의 입장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아이로서 소망했던 그 내용물인 천국의 자취들을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그대는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결코 인생의 공허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은 공허하지 않다.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이 공허할 뿐이다. 모든 쉐도우복싱은 공허한 법이다.
그대는 스승이 되어 부모의 눈빛의 대체물을 사람들에게 긁어 모아야 하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고, 또 그 눈빛을 얻기 위한 대가로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지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성의를 다해 가르치는 일이 소진을 부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이인데, 아이가 아닌 척 하며 엄마 아빠의 인정과 사랑을 다른 이들을 통해 성취하려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복잡하게 힘든 것이다.
그대여, 왜 이렇게 복잡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아이를 부정하는 이는 오직 그대뿐이다. 사실은 복잡하지 않다. 그리고 그대가 아이를 그토록 완강하게 부정하는 이유는, 그대 자신이 너무나도 아이가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결코 복잡하지 않다.
아이가 아이인 것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아이가 자신의 엄마 아빠가 아닌 이들에게 자신의 엄마 아빠와 같은 혜택들을 제공해달라고, 마치 갑의 입장처럼 당연하게 구는 일이 피곤한 일일 뿐이다.
찾아오는 명절은 유용한 사태다. 그대의 진짜 엄마 아빠를 찾아가라. 전화를 하고, 또 성묘를 하라.
그리고는 그대가 늘 엄마 아빠를 그대와 함께 놀 유일한 자격의 대상으로 정해놓았다는, 즉 그대의 유일한 연인으로 정해놓았다는 그 고백을 하라.
몸이 이렇게 컸지만, 한번만 업어줄 수 있겠냐고 아빠에게 물어보라. 몸이 이렇게 자랐지만, 한번만 가슴에 안겨봐도 되겠냐고 엄마에게 물어보라.
엄마 아빠랑 영원히 매일매일 같이 놀고 싶었다고, 그것만이 그대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었다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지금껏 이 모든 것을 해왔다고, 가장 정직하게 이야기해보라. 엄마 아빠의 앞에서, 묘석 앞에서, 시리게 파란 하늘 앞에서, 그렇게 그 모든 것을 마주서서 이야기해보라.
정말로 그대는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대는 다시 찾은 천국 앞에 서있다.
인생은 공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