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실존철학은 분명하게 방향성에 대한 것이지, 그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실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정형적인 체계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라는 표현은 방향성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의 측면에 있어서도 실존적인 어떤 것의 핵심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실존철학의 전통 속에서 희망에 대해 가장 많이 말한 이는 역시 가브리엘 마르셀이다. 마르셀의 모든 이야기는 "존재는 신비다."라는 문장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말은, 어디 멀리에 신비로운 존재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라고 하는, 인간의 모든 탐구의 출발점이 된 놀라운 물음에 대한 마르셀의 부연에 가깝다.
마르셀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 몸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다.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경이로운 기적이다. 그러나 이 동일한 사실은 그의 동료이자 경쟁자인 사르트르에게는 구토감을 유발하는 소재다.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곧 우리가 그렇게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지금까지의 현실을 굳건하게 구축해주던 당연한 상식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낯설게 화하게 되는 부조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를 실존의식이 태동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어느날 자신에게 익숙한 길을 걸어가던 누군가가 "아,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구나!"를 발견하게 되는 체험과도 같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공포와 불안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을 이 지점에서 마르셀은 신비로의 전환을 이룬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도, 우리는 이미 살아간다. 이유는 앎에 대한 것이다. 때문에 이 말은 이렇게 다시 표현될 수 있다.
"앎이 없어도 우리는 산다."
우리의 삶이 앎에 의해 복속될 수 없다는 의미다. 즉, 삶이 앎보다 크다는 것이다. 언뜻 지당해보이는 말이지만, 절대로 우리는 이를 지당하게 느끼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삶의 이유가 중요하다.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이념을 위해 등과 같이, 삶을 영위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들을 언제나 확보하고 싶어한다.
이유는 몹시 인과론적인 것이며, 대상지향적인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인과론적인 앎과 대상지향적인 앎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다 설명될 수 있는 체계를 열망하고, 대상을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갈망한다.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마치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는 마치 삶을 실종한듯한 입장의 물음은, 기존의 체계와 대상을 상실한 체험 속에서 곧잘 야기되곤 하는 물음이다.
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는 물음은 그래서 욕망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인과론적이며, 동시에 대상지향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무의식이 되었든, 결핍에서 비롯하였든, 의지의 소산이든 간에, 욕망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인과론적 기제에 따라, 그것을 성취시켜줄 대상에 대한 추구로 귀결된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욕망의 대표적인 목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마르셀은 이를 전면적으로 뒤집는다.
"그것 없이도 우리는 살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속박하는 당위적 앎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빛나는 날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어떤 이유 없이도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이유에도 우리의 삶은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이유라고 할지라도, 감히 우리를 존재하지 못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코 우리가 살지 못하게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이미 살아 있는 이 몸을 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존재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음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것을 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래서 우리의 존재함은 신비(mystery)라는 이름을 얻는다. 우주의 심원한 미스테리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앎이 아니라 모름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지지된다. 모름은 그 모든 앎의 이유를 기각시키고,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 희망의 무조건성은 이렇게 출현한다.
무조건성은 틸리히가 말하는 것처럼,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표현이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들이 무제약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성립 가능한 역설의 의미다. 즉, 그 어떤 조건으로도,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모든 조건 위에서, 우리가 기꺼이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마르셀은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이를 존재의 힘이라고 명명한다. 희망은 이 존재의 힘이다. 곧,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중요하게 추구하던 어떠한 욕망의 대상이 사라졌어도, 그 상실의 사실이 우리를 죽이지 못한다.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대상이 상실된 순간에,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의 몸을 발견하며, 우리가 엄연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이해하게 된다. 욕망의 대상이 없어도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르쳐주는, 대상보다 커다란 우리 자신의 존재감을.
이것이 다시 한 번 희망의 의미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할지라도, 이 몸뚱아리만 있으면 다시 또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그 의미다. 나아가 이것은 하나의 신성한 명령이기까지 하다. "너는 살아야 한다."라고 하며,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고 또 긍정하는 존재 그 자체의 명령이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이유다. 우리 자신이 바로 존재의 이유다. 때문에 이 말은 다시 한 번 이러하다.
"우리 자신이 희망이다."
마르셀의 표현으로는 이 붕괴된 세계에 우리가 그 희망이다. 이 어두운 우주에 인간만이 유일한 희망의 빛이다.
모든 대상에 대한 추구가 무너진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일견 체험되는 것은 절망이다. 그러나 이 절망 속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은 조우된다. 우리 자신이 희망이라는 그 사실은 비로소 알려진다. 표현 그대로,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유일한 빛이며,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반짝이는 최후의 보석이다. 그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던져진 채 있다는 사실, 곧 실존은 그 자체로 희망과의 동의어다. 실존은 희망이다. 이로써 우리의 모든 위상은 전환된다.
우리는, 우리가 던져진 그 어느 곳에서라도, 희망으로서 그곳에 온 것이다. 바로 그곳의 희망으로서 온 것이다. 더는 버려진 것이 아니다. 더욱 바라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궁극적으로 바라진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최후의 희망이다.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