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올해의 단어"
딕셔너리닷컴은 지난 2019년 '올해의 단어'로 [실존적(existential)]이라는 단어를 선정했다. 그리고는 이 단어가 "문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세계와 사랑하는 사람들, 삶의 방식의 존속을 두고 고심한 느낌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라며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배경을 밝혔다.
(관련기사: http://www.radiokorea.com/news/article.php?uid=330035)
우리가 어떠한 단어를 핵심적으로 발화하는 이유는, 그 단어가 함의하는 현실을 우리에게로 끌고 오고 싶기 때문이다. 즉, 그 현실은 지금 여기에는 아직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에게 가장 빈번하게 발화되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명징해진다. 그러한 현실이 더욱더 부재한 것이다. 그래서 긴밀한 필요로 더욱더 강렬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존은 지난 한해간 가장 요청되어 온 우리의 필요며, 이 단어가 개방해낼 수 있는 특정한 현실을 찾아 목놓아 부르던 노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토록 간절했던 그 현실은 대체 어떠한 현실일까?
그것은 바로 자유다. 자유의 현실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현실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실존을 청하고 있던 그 현실, 자유가 암담하게 부재했던 그 현실은 바로 노예의 현실이다.
그렇게 보자면, 지난 2019년은 전세계적으로 '노예의 해'였다고 과감하게 선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국내의 현실은 분명히 그러했다. 무오한 순수성을 주장하는 도덕주의적 통제와 억압 속에서 숨이 막혔던 한 해였다. 그러했던 만큼, 자연스럽게 자유는 우리의 깊은 목마름이 되었다.
실존철학자들, 그리고 실존상담자들은 저마다 이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중요한 한 마디씩을 보태왔다. 특히 니체는 자유와 노예라는 이 주제를, 스스로의 생명력에 입각해 선악의 너머에서 자유롭게 창조하는 주인의 도덕과, 다른 이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한 원한감정에 매여 증오하면서도, 그러한 자신을 오히려 선한 자로 위장하고자 하는 노예의 도덕이라는 구조로 풀어내는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니체를 이어받아, 무수한 실존철학자들 중에서도 자유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는, 동시에 노예성에 대해 가장 예리한 비판을 가하는 이는 아마도 베르자예프일 것이다.
베르자예프는 체험의 철학자며, 삶의 철학자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고, 그가 살아낸 것이 곧 그의 철학적 저술이 되었다. 때문에 그는 관념적인 차원 내지 이념적인 차원에서 자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즉, 마치 자유가 건강한 민주시민을 구성하는 원리 중의 하나라는 식으로 자유를 묘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에 탐닉했다가,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그 이념의 실현을 위해 얼마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지를 체험한 베르자예프는, 때문에 정치적 담론 아래에 자유를 위치시키는 일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자유는 정치를 위시한 그 어떤 체계들보다도 거대한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자유는 그 모든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하는 사르트르의 잘 알려진 선언을 가장 뜨겁게 밀고 나간 것은 분명 베르자예프다. 베르자예프에게 있어 실존은 곧 자유다. 때문에 상기한 선언은 이렇게 다시 변주될 수 있다.
"자유는 본질에 선행한다."
본질의 자리에는 종교,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존재, 신, 자아, 세계, 자연, 공동체, 민족, 가족 등, 인간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그 모든 것이 위치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는 그 모든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층위에 위치한 것이다. 때문에, 하늘을 나는 새를 지상의 군주가 구속할 수 없듯이, 자유는 인간이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될 수 없다.
본질처럼 가정되는 그 모든 소재는 실제로는 자유를 환원시키는 것들이다. 즉, 그것들로 인해 자유는 원래의 크기를 잃고 더욱 작게 축소된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며, 베르자예프가 지적하는 바, 이것이 바로 노예가 된 상태다.
정치라는 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축소시킨다. 그렇게 바라본 베르자예프는 무정부주의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정형주의자였다.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것처럼, 삶을 딱딱하게 굳혀 고정적인 명사로 만드는 일에 베르자예프 또한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것은 노예화다. 인간은 그러한 노예화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거대한 인간성[인격]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그는 이 모든 것을 관념적인 차원에서 주장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체포되고, 투옥되고, 추방되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자유를 향한 인격적 외침을, 곧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선포를 그의 삶 자체로 증거해내었다.
결국, 베르자예프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누구인지를 우리의 삶으로써 이해하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가상적 본질이 아닌가?"의 물음에 대해, "아니고, 아니다(Neti, Neti)."라는 부정적 검증을 거듭함으로써, 결국 그러한 가상을 해체하고, 그 어떠한 가상에도 갇힐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거대한 면모를 확인하는 일, 그것은 하나의 인간학적 혁명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본질로도 규정될 수 없는 인간이란, 그 어떤 크기로도 축소될 수 없는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의 실존은 가장 큰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것, 그것이야말로 자유다. 그렇게 자유는 가장 신성한 층위로 도약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가장 신성한 층위에 속하는 자유가 바로 이 세계 속으로, 이 역사 속으로 돌입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육화(incarnation)의 의미며,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자유의 현현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난 한해간 간절하게 노래해왔던 그 현실이다.
모든 체계는 필연적인 노예화를 야기한다. 때문에, 우리가 특정한 노예화의 체계에 의해서만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거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거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현실 속에 우리를 위치시키고 있을 경우, 우리는 필연적으로 비루해진다. 그것은 노예의 비루함이다. 새장 안에 갇혀 날개가 봉인된 새의 좌절이다. 이 우주에서 가장 신성한 이름의 몰락이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그토록 실존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이 대체 누구인지를 다시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존은 동세로 말하자면, 언제나 '밖을 향하는 움직임'이다. 장벽 밖으로의 탈출이 곧 실존이다. 하나의 장벽을 넘어선 곳에서 우리가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은, 분명하게 새로운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객체적인 의미로서의 새로운 현실이 아니다. 장벽 밖에서,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장벽보다 이미 더 힘있고 커다란 우리 자신의 면모, 곧 더욱 자유로운 모습으로서 새롭게 알려지는 우리의 면모가, 그렇게 전환된 우리의 위상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새로운 현실로 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란 언제나 인간의 내적 혁명이다. 바로 이 혁명을 위해 자유는 이 세상으로 돌입해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알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것이 궁극이다. 베르자예프는 은유적으로 말한다.
"신은 자유 속에서만 행동하고 인간의 자유를 통해서만이 역사한다."
실존은 자유다.
실존이 자유인 한, 그리고 우리가 인간인 한, 2019년의 올해의 단어는 분명하게 영원의 단어일 것이다. 자유는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잃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