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응답

"아이와 어른: 실존철학자란 누구인가?"

by 깨닫는마음씨



실존철학자의 의의를 밝히고자 한 하이네만은 실존철학의 가능성을 고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실존은 체계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억지로 누이는 데 저항하는 삶의 원리다."


그래서 실존은 결코 체계화될 수 없다. 체계를 꿈꿀 때 이미 그것은 실존이 아니다. 이 말은, 삶의 모든 양식에 늘 일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완벽한 만능열쇠와 같은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 속에서 애초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다.


때문에 실존철학 및 실존심리학이 왜 정신분석과 같은 구조적 접근에 가장 반대하는지는 명백하다. 구조주의는 언제나 실존주의의 가장 큰 앙숙이다. 인간의 삶을 보편적인 구조[체계]의 설명으로 환원시키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심층성을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실존의 입장에서는 결코 '깊이'가 아니다. 얕은 평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존적 입장에서 말하는 '깊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도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면모고, 곧 인간 자신의 거대한 크기며, 인간에 대해 무엇을 상상해도 언제나 그 이상일 것인 신비다. 즉, 깊이란 인간의 경이로운 미지성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무의식이 잠재의식, 집단무의식, 신의식 등의 이름으로 아무리 그 자신의 거대한 크기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보다는 크지 않다.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다. 아무리 전우주적인 꿈일지라도, 그것은 가장 작은 다락방에서 그 꿈을 꾸고 있는 평범한 이가 잠에서 깨는 순간 모조리 사라지고 마는 허상일 뿐이다. 어떠한 꿈도, 어떠한 무의식도, 인간보다 대단할 수는 없다.


이 사실을 2500년 전에 일찌감치 발견한 이가 바로 붓다다. 그래서 시대를 넘어 이러한 붓다의 이해를 정확하게 이어받은 선(禪)은 실존주의의 가장 친밀한 이웃사촌이다. 부모는 다를지라도 실질적인 영혼의 가족이다.


(논외의 이야기로, 선과 정신분석 특히 라캉과 같은 입장을 엮는 일은, 선이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뢰야식 등과 같은 무의식의 근친개념들을 가장 멀리하는 관점이 바로 선이다. 분석행위과 유사하게, 애초 무의식을 탐구하려는 목적의 명상과 같은 방법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또한 선이다. 재미있는 예로, 하이데거는 일본의 스즈키 선사에 대해서는 그를 자신보다 탁월한 인물로 평가했지만, 자신에게 저서를 보낸 라캉에 대해서는 오히려 라캉 본인이 심리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감상을 남겼다.)


모든 것이 다 설명될 수 있는 체계를 꿈꾸는 것은 말 그대로 꿈이다. 이 꿈으로 사는 것이 아이다. 꿈을 사실이라고 믿으며, 때문에 자기의 꿈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야 하는 일이 마땅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 앞에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 또한 아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아이가 원하는 현실을 이루어주기 위해 힘쓰는 이가 출현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다. 그래서 부모는 해결사다. 아이의 꿈을 어떻게든 실현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이 부모의 몫이다.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분석가[상담자]가 건강한 부모의 역할을 자처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비밀이 아니다. 아이가 자기의 꿈을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룰 수 있도록 부단히 조력하는 것이 분석가의 임무다.


그래서 많은 정신분석가들의 말년은 편하지 않다. 끝없는 소진 끝에 실어증에 걸리거나, 분열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운명이 분석가들에게 놓여 있다는 사실은 아주 일상적인 탐구로도 확인 가능하다. 우리가 실제의 부모에게, 평생동안 다른 이의 몽상을 이루어주기 위해 쉼없이 오직 희생만 하며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본다면, 그들로부터 돌아올 가장 정직한 대답은 "그렇게 사느니 죽고 싶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말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정신분석은 열등하고 실존상담은 우월하다는 식의 메시지가 아니다. 꿈꾸는 아이와, 그 꿈을 실현시켜주고자 하는 부모가 통합된 해결의 체계로는, 인간의 운명은 착취와 희생 속에서 더욱더 비루해지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체계가 아니라면, 해결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엇일까?


하이네만은 여기에서 응답(response)의 개념을 제시한다. 윤리학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응답은 상황윤리적인 것이다. 늘 유동적인 세계에 대해 개방되어 있는 태도다. 그래서 응답한다는 것은 개방한다는 것이다.


즉, 응답은 해결을 위한 항구적인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삶과 함께 늘 다르게 대답해가는 것이다. 때문에 응답은 그 자체로 체계의 안정성을 벗어나 불확실성 속에서 모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험하는 자들을 하이네만은 실존철학자라고 부르며, 우리에게는 실존철학이 아닌 실존철학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응답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실존철학자는 해결사가 아니다. 즉, 부모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해결을 바라고 있는 아이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입장에서 실존철학자의 이름은 잠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 묘사될 수 있는 정격한 그 이름, 그것은 바로 어른이다. 이처럼 실존철학자라는 것은 어른을 암시하는 이름으로 먼저 제시된다.


그동안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부모와 어른이 같은 것이라는 착각이, 곧 부모가 되는 길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는 착각이, 인간의 '깊이'를 실종시킴으로써 인간 자신의 거대한 면모가 망각되게 한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착각이다. 번식할 수 있는 기능을 얻게 된 성체는 분명히 유체와는 변별되는 생태양식을 갖는다. 그러나 생물학적 성체가 곧 인격적[인간학적] 의미에서의 어른은 아니다. 생물학적 성체와 생물학적 유체의 변별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생물학적 주체와 인격적 주체의 변별은 두드러진다. 니체는, 인간이란 동물과 초극인 사이의 존재라며, 이러한 변별을 특히나 강조한다.


다시 언술하건대, 생물학적 성체와 유체를 변별시켜주는 조건은 바로 번식력이다. 즉, 생식기능이다. 이에 따라, 생물학적 성체를 인격적 어른과 동일시하는 착각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가장 번식력이 왕성해서 자식을 많이 낳은 이가, 가장 지혜롭고 신성한 인간이라는 평가에도 동의해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 코미디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에서의 인격적이라는 표현 또한 함정에 노출될 수 있다. 그것은 유교주의적인 관점에서, 인격을 마치 특정한 가치덕목들이 실현된 도덕적 특성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소위, 여여하고, 자비로우며, 화내지 않는 성인군자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인격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인격은 오로지 다양성의 의미다. 한 인간이 무수하게 다층적인 면모로 드러날 수 있는 입체적 깊이를 가리키는 표현이 바로 인격이다.


이를 역으로 이야기하면, 어른이란 다면적인 깊이를 갖고 있는 이를 묘사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낭만적으로 묘사해보자면, '모든 인간을 그의 가슴에 담아 살며, 그 모든 인간을 가슴으로 노래하는 이'가 바로 어른이다.





그래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무한한 면모를 만나서 개방해가는 일인 까닭이다. 즉, 무한으로부터 힘을 얻는 일이다. 때문에 어른의 현실은, 아이의 현실처럼 몽상과 그로 인한 좌절 속에서 무기력하게 되지도, 부모의 현실처럼 해결과 그로 인한 소진 속에서 공허하게 되지도 않는다.


부모-아이의 통합적 체계를 벗어나서 어른이 드러나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해온 이들이 바로 실존철학자들이다. 키르케고르의 단독자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반대편에 서있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존의 방향성 속에서 동의되는 하나의 지점은, 바로 집을 떠나는 모험의 감수성이다. 어른은 부모와 같은 체계를 벗어나 모험하는 자며, 곧 그 자신을 개방하는 자다. 그리고 개방은 바로 응답이다.


이처럼, 어른은 응답하는 자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른이 먼저 존재한 뒤에 그 어른에 의해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응답이 선행한다. 응답을 통해 비로소 그렇게 응답할 수 있었던 어른이 드러나는 것이다. 곧, 응답이 어른을 만드는 셈이다.


이러한 응답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해결하려는 의도의 포기다. 곧, 부모의 기각이다. 예수와 붓다 또한 그들의 경전에서 끊임없이 부모의 해체를 호소한다. 물론 이는 생물학적인 부모를 경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에 대한 경계를 분명하게 하듯이, 생물학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경계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부모를 존중하되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모의 기각이란 곧 이 부모의 우상화에 대한 해체를 의미한다. 더욱더 건강한 부모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른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부모 자체가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운명의 갈림길과도 같다.


부모가 전적으로 포기된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목도되는 것은 모두가 아이뿐인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직하다. 우리는 정직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모는 아이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는 아이라는 이름의 아이와, 부모라는 이름의 아이, 그렇게 둘만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 자신이 무력한 아이라는 사실을 가장 싫어하는 아이가 부모라는 이름을 스스로 채택했고, 채택한 이름에 따라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자신은 아이와는 철저하게 다른 존재가 된 척을 했다. 즉, 자신은 이제 아이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유능하고 힘있는 존재가 된 척을 했다.


그러나, 부모의 우상화가 해체된 우리의 시야에 그 기만은 잘 포착된다. 자신이 아이인 것을 가장 싫어하는 아이, 즉 가장 아이같은 아이가, 바로 부모처럼 행세해온 것이라는 그 사실은 분명 웃프게 알려진다. 부모 행세를 하면 아이와는 다른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근본적으로 착각하며, 아이는 더욱더 비루한 현실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밖을 향한 모험이 아닌, 자폐적인 우물을 팠던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부모라는 정답을 갖고 우물로 들어간 이가, 자신의 심층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부모뿐이다. 동어반복이며, 곧 동일성의 폭력이다. 이러한 의도 속에서, 심층심리학은 자기 안의 모든 사람, 곧 자기 내면의 무한성을 발견하는 '깊이'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폐심리학일 뿐이다. 무엇을 보더라도 전부 다 부모의 체계로만 환원시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라는 것은 곧 부모를 꿈꾸는 아이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결국 아이가 아이만을 끝없이 보게 되는 현실이다. 즉, 아이만 홀로 있는 외로운 현실이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근본적인 입장이다. 부모의 해체는 바로 이 근본적인 날것의 입장으로 정직하게 우리를 안내한다.


그렇다면 이제 실존철학에서 날것의 아이를 묘사하는 용어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유한성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입장은 이 유한함이다.


유한성은 해결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인 한, 유한성은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아주 단순하게, 아무리 유능한 부모가 된다고 해도,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제할 수는 없다. 이 유한성이라는 것은 애초 문제가 아니다. 즉, 잘못이 아니다.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잘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다.


유한성은 잘못이 아니라는 이 말은, 어떤 아이도 잘못된 아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아이는 무고하다. 아이인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우리가 아이라는 것, 곧 우리가 유한하다는 것은 사실의 범주에 속하지, 잘잘못을 가리는 가치판단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아이가 잘못이라고 말하며, 이 범주의 오류를 범하는 이는 사실 부모다. 즉, 부모행세를 하는 아이가 또 다른 아이에게 잘못을 규정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저주받은[힘없는] 아이가 아닌, 구원받은[힘있는] 부모의 입장인 것처럼 유지하려는 의도다. 동일한 을 사이에서 하나가 갑질을 하려 하는 그림이다. 그리고 모든 갑질은 해결을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유한성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해받아야 하는 것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생기는 그 모든 슬픔과, 아픔과, 애달픔은 다만 이해받아야 하는 것이다.


조작과 통제를 통한 해결에의 의도를 포기할 때, 우리는 정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현상학의 핵심이다. 그리고 어떠한 것이 정말로 이해되었을 때, 그 이해는 이미 응답을 수반한다.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


유한한 인간에게 전해져야 할 말은, 아이에게 들려져야 할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이것이 응답이다. 그리고 이 응답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은 어른의 사랑이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잘잘못을 가려 해결하려고 한다. 정말로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어른이다.


아이를 이해하는 자, 아이에게 응답하는 자, 그렇게 아이를 사랑하는 자, 그것이 어른이다.


이것은 초월성이라는 표현으로 실존철학에서는 알려진다. 그리고 초월성은 한 몸의 유한성을 통해서만이 성립된다.


그래서 응답함으로써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아이라는 사실 속에서만 가능하다. 사랑은 사랑할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것과 분리되어선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때문에 어른은 아이와 늘 동행한다.


반면, 전술한 것처럼 부모는, 즉 부모를 꿈꾸는 아이는, 자신이 아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거부한다. 아이로부터 철저한 분리를 꿈꾼다. 그로 인해, 어른을 부모라는 이름으로 착각하는 속에서, 어른과 아이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엄격한 법칙을 율법화한다. 때문에 부모-아이의 통합적 체계는, 실제로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통합에의 의도는 역설적으로 가장 큰 소외를 야기한다.


그러나 어른은 아이를 소외시키지 않고 언제나 함께 간다. 실존철학의 언어로는 유한성은 초월성과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관계고, 선(禪)의 언어로는 번뇌(煩惱)는 보리(菩提)와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관계며, 기독교의 언어로는 인간은 하느님과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관계다.


이 관계성은 통합이 아니라 연합이라고 불린다. 통합은 양자간의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며, 연합은 문제가 아닌 제3의 것을 향한 것이다. 이 어른과 아이의 연합이 향하는 것, 그것은 다시 한 번, 사랑이다.


"너는 잘못된 존재가 아니란다."


착한 눈을 가진 모든 아이를 향한, 그 아이의 눈빛을 마주하여 지금 막 어른으로 깨어난 이의 상냥한 응답이다.


종교심리학과 미국의 실존심리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끼친 윌리엄 제임스는 이 어른의 특성을 성자성(saintliness)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카뮈는 그의 걸작 『페스트』에서 이렇게 자문한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성자로 사는 일이 가능할까?"


실존철학자들은 바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거하려는 이들이다.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고백한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실존철학자들은 "나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고백한다.


해결할 수 없는 유한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려는 그 자신 역시도 유한한 인간이며 똑같은 아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려는 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사랑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그 사랑에 응답받으려는 이다. 그렇게 실존철학자는 아이인 그 자신을 긍정하며, 동시에 아이인 그 자신에게 개방될 어른을 긍정하는 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자는 가장 아이이며, 그로 인해 동시에 가장 어른이다.


이것을 크기로 비유하자면, 실존철학자는 아이인 가장 작은 인간의 면모와, 어른인 가장 큰 인간의 면모 양자를 모두 긍정하는 이다. 이 양자가 긍정됨으로 인해, 그 사이의 크고 작은 무수한 인간의 면모가 통째로 다 긍정된다. 인간의 스펙트럼이 전부 다 긍정된다. 이 스펙트럼이 바로 깊이다. 그래서 이것이 가장 거대한 것이다. 가장 광대하게 열린 가슴이다.


가장 큰 것만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결코 크지 않다. 가장 작은 것이 있을 때 비로소 가장 큰 것이 의미있어지며, 그 사이의 공간 또한 가장 풍요로운 신비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 아이의 꿈이 거대한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작은 아이를 상냥하게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 그 아이와 어른의 관계성이 진실로 가장 거대한 것을 개방한다. 가장 거대한 것, 그것은 다시 한 번, 사랑이다.


아직도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의 면모가 있다. 동시에 이로 말미암아, 여전히 더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면모가 있다. 때문에 사랑은 결코 그 전모가 드러날 수 없는, 무한한 진행형의 신비다. 인간을 향한 무한한 응답이다. 실존은 바로 이 응답이며, 실존철학자는 응답하는 이들이다. 그치지 않는 사랑의 모험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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