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왜 울면서 웃는가?"
"노래는 현존재다."
이것은 언어의 의미에 대해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말, 아니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하이데거를 통해 선포된 순간이다. 이는 또한 '노래하는 인간(homo cantus)' 곧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누리고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의 출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시와 같다. 그리고 노래다. 때문에 언어는 근본적으로 노래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경이 속에서 체험할 때 노래는 흘러나온다. 그렇게 노래는 그 자체로 존재의 진리를 이미 밝히고 있는 행위다.
인간이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그가 느끼는 온전함과 관계된다. 인간이 그가 처한 상황에서 노래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 자신이 그 상황을 얼마나 온전하게 체험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이 시인의 임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곧 이 모든 것의 온전함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은 어두운 밤의 시대에는 더욱더 긴밀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밤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이 죽은 시대다. 즉,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중심이 부재하게 된 시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어둠의 시대 속에서,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온전하지 않고 잘못된 것처럼 경험되는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함을 노래함으로써,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을 준비하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가장 어두운 밤의 심연을 감내하고, 그 심연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자들을 요청한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려 부연하자면, 어두운 밤길에서도 휘파람을 부르며 걸어갈 수 있는 자들을 찾아 부르는 것이다. 이 '존재에의 용기'를 담지한 이들, 그들이 또한 시인이다.
모든 언어는, 곧 모든 노래는, 그 노래가 묘사하는 현실을 이곳으로 불러오기 위해 발화된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먼저 인간에 의해 자신이 체류할 곳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가 되돌아올 때 어디를 향해 와야 하는가? 만약 신성의 빛이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먼저 빛나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때마다 신에게는 자신에게 합당한 체류지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거기에 있었던 신들은 올바른 때에만, 즉 인간이 올바른 곳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전향했을 때만 되돌아온다."
이처럼, 시인은 신이 부재하는 가장 어두운 심연을 정직하게 직면함으로써, 신이 다시 이곳으로 초대되는 현실을 준비하려는 이들이다. 그렇게 보자면, 시인은 가장 종교적인 지향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매개가 되는 것은 분명하게 온전함이다. 가장 온전하지 않게 느껴지는 어둠 속에서도, 온전함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선이다.
"온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것의 흔적을 찾아 나서게 한다. 온전한 것은 성스러운 것을 부르면서 눈짓한다. 성스러운 것은 신적인 것을 불러들인다. 신적인 것은 신을 가까이 오게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임무다. 분리된 것을 다시 연결짓기 위해, 인간은 이 세상에 왔다. 이러한 까닭에 결국 시인은 인간을 대변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신의 자리를 돌이킨다는 것이 특정한 믿음의 대상을 추구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다. 신도 사실 그의 노래의 대상이 아니다.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을 그는 결코 노래할 수 없다. 노래는 대상화의 작용이 아니다. 노래는 오직 스스로 살고 있는 이에게서만 울려 퍼진다. 애초 대상화되어 붙잡힐 수 없는 삶에 대한 경이로움만이 시인을 통하여 노래가 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결코 신을 대상화하지 않지만, 즉 신을 포획하려는 의지 속에 있지 않지만, 시인은 그저 자신의 삶의 온전함을 노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을 초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은유적으로, 신이 인간 안에서 부활한 예수의 역사는 이렇게 시인으로 말미암아 확증되며, 또 재현 가능해진다.
그 구체적인 길은 모험으로 묘사된다. 시인은 모험하는 자다. 모험의 핵심은 정직성이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보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에게 "깨어나세요!"라고 말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금 잠들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자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자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자다.
이처럼 시인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임으로써 개방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온전함이다. "있는 그대로 다 있으라."의 선언이다.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삶의 측면들도, 그것들이 존재하는 한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서 좋은 것이란 없다."라고 말한 니체를 상기시킨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대긍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다.
그리고 시인은 이제 말하기 시작한다. 그 자신이 보고 받아들인 것을 증언하기 시작한다. 시가 쓰여진다.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의 참말을 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말해야 할 것을 따라가면서 유일하게 그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존재의 참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아주 쉽게 표현해보면, 있는 그 자체로 드러나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존재의 참말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한 존재가 가는 길에 동반하여 함께 모험함으로써, 그 존재가 간 그 길의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삶의 온전함을 개방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노래다. 시다. 이창동 감독의 걸작영화인 <시>에서는 이러한 참말이 발화되는 기제가 대단히 잘 묘사된다.
이처럼, 참말을 하는 자들, 곧 노래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온전함을 감히 말하려는 자들이다. 온전하지 못한 것 속에서도 온전한 것을 기꺼이 노래하려는 자들이다. 삶의 온전함을 벅차게 시작(詩作)하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고, 예언자며, 삶에 대해 가장 뜨거운 사랑꾼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시인은 그 자신의 사랑을 가득 드러냄으로써 신이 체류할 자리를 이 현실에 개방한다. 시인은 바로 그렇게 신을 연인처럼 그리워하는 인간의 대변자다. 인간의 모든 마음은 언제나 온전함만을 향한다. 곧, 인간의 모든 마음은 가장 온전한 것으로서의 은유인 신이 체류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만 가득하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삶은 마음이다. 신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갸륵하고 또 갸륵하다. 온화하고 또 온화하다. 어여쁘고 또 어여쁘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을 담은, 그로 인해 그 마음을 닮은 시인의 눈빛은, 심연처럼 깊고, 심연 속에서도 빛난다.
이로 말미암아, 시인의 시선은 하찮은 것들 속에서도 귀함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가 어떠한 것을 임의적인 기술을 사용해 귀한 것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것을 그의 마음속에 담아 있는 그대로 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전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있었던 온전함이기도 하고, 새롭게 찾은 온전함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늘 새롭게 부는 영원의 바람이다.
그렇다면, 옛 것과 새 것이 모두 온전함으로 가득한 이 삶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시인은 이 삶을 거듭해서 사랑스러운 것으로 묘사한다.
시의 핵심은 묘사와 진술이다. 그 중에서도 묘사는 언제나, 그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한 묘사다. 미운 것이 얼마나 밉게 사랑스러운지, 나쁜 것이 얼마나 나쁘게 사랑스러운지를, 무서운 것이 얼마나 무섭게 사랑스러운지를 시인은 묘사한다. 시인은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억지로 긍정으로 변환시키려고 애쓰는 자가 아니라, 부정적인 그것이 전체의 그림 속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도 부정적인 것 그 자체로서의 온전함을 발견하는 자다.
그렇게 시인이 정말로 긍정하는 것은 바로 인간 전체다. 모든 인간이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학의 실천자다. 시인은 그 모든 긍정적인 것과 그 모든 부정적인 것이 하나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에게는 "그것도 인간이다." 이를 다시 표현해보면, 시인에게는 "그곳(there of being)도 신이 체류할 거처다." 가장 비루한 마굿간에서도 체류했던 신은 지금 그 자체로 이곳도 그의 온전한 처소임을, 시인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선은 다시금 신의 시선을 또한 닮아 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는 까닭이다. 신은 이 모든 것을 만든 뒤, 있는 그대로 두었다. 다만 '보기에 참 좋아'할 뿐이었다. 신의 창조를 아름답게 완성시켜주는 작법도 결국 시적 묘사였던 것이다. 그 묘사 끝에, 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이 모든 삶이 참 좋다는 시적 진술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그렇게 시가 완성된다. 예술이다.
예술은 그 태생부터 종교적이다. 노래가, 시가, 가장 온전한 것을 이곳으로 부르고자 하는 제의의 기능으로 사용된 역사는 깊다.
龜何龜何 (귀하귀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 (약불현야)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구지가(龜旨歌)를 보면, 거북이라고 하는 신성함의 담지자에게, 머리라고 하는 새로운 존재를 요청하고 있는 모습이 잘 묘사된다. 그리고 이는 이미 역설로 성립되는 노래다. 아직 본 적도 없는 새로운 존재를 감히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러한 요청을 이루는 현실 자체가 새로운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곧, 새로운 존재를 찾아 부르며 노래할 수 있는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새로운 존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을 노래하고 있는 이의 가슴 안에는, 이미 재림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약속이 이미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노래하는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가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있는 신을 발견한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거기에 도래해 있는 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시인은 결국 울다가 웃는다. 늘 울면서 웃는다.
다시 또, 우리가 만났기 때문이다.
모든 분리의 아픔을 넘어, 이제 함께이기 때문이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아니, 아니다. 다만 이것이다.
"안녕."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담은, 가장 짧은 시다. 그리고 가장 깊은 실존이다. 우리가 늘 울면서 웃는 그 모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