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힘겨움을 호소하는 그대에게

"아름다운 구속의 의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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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디에 가든 언제나 착취되는 것 같다고 불평을 한다. 모두가 자기를 호구 취급하는 것 같다며 속상해하기도 한다. 그대는 인간적인 호의로 상대를 배려하며 맞춰주려고 하지만, 상대의 요구에는 끝이 없는 것만 같다. 마치 주인의 명령에 가까운 이런저런 요구들이, 점점 더 그대를 노예처럼 예속하는 것으로만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날, 그대는 불현듯 상대의 곁을 떠나 사라졌을 것이고, 그 자리에는 차가운 그대의 원망과 성마른 그대의 피로만이 남겨졌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절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군대 위병소 앞에 남겨질 가래침의 굳건한 맹세처럼.


그러나 실제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좌절이다. 그대와 상대의 동시적인 좌절이다.


그대여, 대체 무엇이 좌절되었을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대의 표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그대가 새롭게 찾은 장소에서 분명 그대가 짓고 있는 표정이 있다. 늘 반복해왔듯이 그 새로운 자리에서도 또 다른 주인을 영접했을 것임이 분명한 그대가 짓고 있는 표정이 있다.


그대는 수줍게 웃고 있다. 설렘을 감출 수 없는 그러한 수줍음이다.


그대가 그토록 힘들다고 말하는 노예의 운명 속에서 그대는 대체 왜 웃고 있을까?


그대여, 그대는 사랑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사랑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반복적으로 노예가 되는 이유는, 그대가 반사적으로 노예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반사적이다. 빈사 상태의 동물과도 같다. 그대는 사랑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스스로 꾸어낸 사랑의 꿈 앞에 그대는 반사기능이 탁월한 자동인형이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그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대는 최선의 서비스를 다한다. 그대여, 기억해보라. 언제나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사랑의 예감과 함께 노예의 예속은 시작되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는 분명하게 노예를 자처하였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자초되었다.


그대가 사랑을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름다운 구속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까닭이다.


그대여,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대가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다는 것은, 곧 그대가 노예가 되는 일을 상대에게 허락한다는 것이다. 허락은 주는 것이다. 그대는 그 허락으로 말미암아, 상대에게 행복감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노예로서 고생하는 만큼, 상대는 주인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대의 오해다.


그대가 상대에게 노예가 된다는 것은, 상대에게 그대를 관리할 임무를 주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상대는 매일매일 그대를 실수없이 관리해야 하는 일을 떠맡게 된다. 그대가 일을 시키고, 상대가 그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실제로 상대는 그대의 노예가 된다.


그대여, 이 사실이 중요하다.


그대가 상대에게 노예가 되려고 하는 것은, 상대도 그대의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노예가 있는 곳에는 그에 상응하는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노예라는 이름의 노예, 그리고 주인이라는 이름의 노예, 그렇게 노예만이 2배로 있을 뿐이다.


노예 둘이서 서로를 줄로 묶고, 그것을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말하며 가장 온전한 행복감을 느끼는 척 할지라도, 이는 그저 갑갑한 구속에 다름아니다. 분명하게 여기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은 자유를 바탕으로만 드러날 수 있는 까닭이다. 애초 자유가 상실된 노예 둘이서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사랑 대신에 좌절이 있다. 사랑에 대한 좌절이 있다. 사랑에 닿지 못한 그대와 상대의 동시적인 좌절만이 쌓여서, 그대의 삶을, 또 상대의 삶을 무겁게 만들 뿐이다.


그대여, 한번 떠올려보라. 그대가 정말로 꿈꾸고 있는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를 한번 떠올려보라.


그대는 정말로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싶은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노예가 되는 현실을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는가?


그대는 결코 그럴 수 없다. 그것이 비록 좌절로만 반복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언제나 사랑을 꿈꿀 수 있었다는 것은, 그대에게는 분명 사랑을 꿈꿀 수 있는 터전인 자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랑을 꿈꿀 자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던 그대는, 결코 상대가 자유를 잃고 노예가 되는 일을 소망할 수 없다.


자유의 철학자 베르자예프는 그대에게 전한다.


그대와 상대가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함께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그대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꿈이며, 그대가 이룰 수 있는 가장 최대치의 자유라고.


바로 그렇게, 그대의 자유는 상대의 자유를 꿈꾸는 것이다. 그대의 자유는 상대의 자유를 위해 증거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언약이다. 상대의 자유를 향해, 오롯하게 그대의 자유를 묶는 것이다.


상대를 묶는 것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묶는 것이다. 묶는 것은 거는 것이다. 상대가 자유로운 현실을 향해, 그대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거는 것은 또한 던지는 것이다. 상대가 자유롭게 이륙할 수 있도록, 그대 자신을 활주로로서 던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결코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그대가,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결코 노예가 아닌 자유를 상대가 꽃피울 수 있도록, 기꺼이 그대 자신을 상대에게 묶었다. 걸었다. 던졌다.


그대여,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간절하게 꿈꾸어 왔던 아름다운 구속의 진짜 의미다.


이 의미로 말미암아, 언제나 자유는 2배가 된다. 그리고 2배는 곧 최대치다. 그대도 이미 알지 않는가. 그대와 사랑하는 상대, 그렇게 둘만 있으면 이 세상은 꽉 찬다.


바로 이 자리에서 사랑과 자유는 결코 대립항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사랑 때문에 그대의 자유를 희생한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대는 아직도 사랑과 자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또한 자유가 있다. 땅이 있는 곳에 꽃이 피고, 꽃이 핀 곳에 땅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꽃이 가득 피어나 있는 대지 위에서 환히 웃고 있는 이가 바로 자유인이다. 그대와 상대의 공통된 이름이다. 이 열린 하늘 아래에는 주인도 노예도 없다. 자유로운 그대와 상대, 그 둘만 하나의 이름으로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꿈꾸며, 그렇게 가장 자유로워서 가장 사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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