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욕의 말을 들어보았다"
날 속박하지 마, 난 자유로울 거야, 독점욕이 큰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으로써 상대가 언제라도 도망갈 것 같은 자기를 더 강렬하게 붙잡아주기를 소망했다. 울상어린 상대의 얼굴 앞에서 이들은 마지못해 그 자리에 다시 앉는 시늉을 했다. 실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든 적도 없다. 정말로 자유를 소망했다면 이미 한 자리에 같이 앉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울상을 짓는 이가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제발 자신을 자유롭게 해달라며, 이제는 풀어달라며, 호소하고, 간청하고, 때로는 화내고, 두 손을 모아 빌던 이도 동일한 소망을 갖고 있었다. 그 모든 행위를 통해 상대가 자신을 더 강렬하게 붙잡아주기를 바랐다. "넌 내 거야."라는 단호하고 힘찬 선언이 그 입에서 나오기를 기대했다.
독점욕이 큰 이들은 자기가 상대를 독점하는 방식보다는 상대의 독점재가 되는 방식을 자주 택했다. 자유롭고 싶다는 표현으로 이들은 자기를 독점해달라는 지령을 내리곤 했다. "나를 독점해줘."라는 지령을 상대가 실현되는 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가장 큰 독점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노예의 변증법의 실제적인 예화다. 노예를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주인 역시도 전적으로 노예에게 매인다. 주인과 노예, 둘 중 누구도 실은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소유되어 늘 함께하기만을 원한다.
이러한 주인과 노예의 모습을 나는 무척 귀엽게 본다. 상대가 자기를 떠나는 것이 두려울 때는 자기가 먼저 상대에게 떠나겠다고 말하며 상대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 지친 나머지 상대가 자신을 놓으려고 하면, 그때서야 왜 자기를 붙잡지 않냐고 절박하게 화를 내면서 자기가 운다.
외로운데, 그 외로움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을 귀엽게 보는 것은 내가 짓궃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태인지를 사실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다. 이처럼 사람의 귀함을 알고 있기에 이들도 귀엽다. 동시에 나는 이들이 작고 소박하게만 자신들의 소망을 풀어내고 있기에 이들을 귀엽게 본다. 실은 다 갖고 싶으면서, 옆에 두는 것만으로 다 이룬 것처럼 짐짓 만족해보려고 하는 이들은 귀엽다. 엄마의 새끼손가락 하나만을 두 손에 꼭 쥔 채 잠든 아이 같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조금 덜 귀여워지더라도 그 독점욕이 절대적으로 채워지기를 바라고도 있다. 한 번 태어났으면서 이번 생에 다 갖고 싶은 것은 그 마음대로 다 가지면 좋지 않을까. 미련없이. 후회없이. 독점욕은 정말로 적당히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다 자신의 것으로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실 독점욕은 엄청난 소망이다. 이것은 인간만의 아주 고유한 특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동물들은 아무리 알파개체라 하더라도 적당한 상위의 정도를 가지면 충족된다. 나아가 거기에서 물러날 줄도 안다. 그러나 인간은 소유양식이 특별하게 발달했다.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하며, 보는 것마다 또 가지고 싶어한다. 모든 욕망은 결국 가장 강한 소유의 열망인 독점욕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독점욕을 나는 인간의 불우한 특성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독점욕이 이러한 형태로 작동하는 데는 무엇인가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 갖고 싶다는 독점욕을 가장 크게 펼쳐놓아서 최대치로 갖게 된다면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싶다.
독점욕이 큰 이들이 늘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며, 독점욕과 자유를 자기도 모르는 새 연결짓고 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독점욕과 자유는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정반대로 모순되는 것이지만, 절대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절대적으로 드러난 독점욕은 곧 절대적인 자유다.
나는 아주 단순한 상상을 제안한다. 세상 모든 것을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고 실감하는 이가 있다. 그러한 그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놓아둘 것이다. 무엇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완벽하게 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나 붓다를 금욕주의자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억지로 가지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인 차원에서 다 가졌다. 그러니 여분의 행위로 소유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성인군자들에게서만 경험되는 감각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충분히 그것을 누렸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이제 집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이 분명하게 다 가진 것에는 이제 그들과 상관없이 그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자유가 개방된다. 나는 예수나 붓다가 이러한 맥락에서 우주를 다 가진 이들이었다고 떠올려본다. 그러니 그들의 우주는 자유로웠다. 자유로운 우주에서 살아가던 그들 자신도 자유로웠다.
그렇다면 현명한 이들은 이제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지를 벌써 묻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나는 또 마음 얘기를 준비했다.
어떤 것을 갖는다는 것은 실은 그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비싼 가방을 가진 이가 있다. 그가 지금 가진 것은 비싼 가방을 통해 경험되고 있는 기쁜 그 마음이다. 기쁜 마음을 갖기 위해 그는 돈을 지불하고 가방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대상을 가짐으로써 마음을 갖고자 하는 상대적인 방법론이다. 절대적인 방법론은 다르게 작동한다. 이것은 바로 마음으로 간다. 가보면, 마음에는 원래 임자가 없다. 먼저 말한 사람이 임자다. "넌 내 거야." 그렇게 말하면 자신의 것이다.
상대를 보면 순수하게 기쁜 마음으로 "넌 내 거야."라고 말할 때, 상대는 결코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구속하겠다는 뜻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을 한 이가 얼마나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그 따듯한 눈빛에 담고 있는지를 실감하며 그렇게 오롯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아주 기쁘게 경험한다. 이것은 이렇게 말한 것과도 같다.
"넌 자유야."
나는 자신의 자녀에게, 친구에게, 부모에게, 애인에게, 배우자에게, 또 이 우주를 향해 이렇게 들려주는 조금 미친 이들을 아주 많이 보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진실로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말을 듣게 된 이는 더는 그가 혼자라서 외롭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다. 가장 함께하고 있는 든든한 세력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영원의 향기가 묻어온다. "내가 영원히 함께할 거야."라는 말과 "너는 영원히 자유로워."라는 말은 동일한 영원의 선언이다. 독점욕이 큰 이들은 바로 이것을 꿈꾸고 있던 것이다.
이들은 영원이라는 것을 아직도 믿고 있었다. 너무나 귀여운 이들이다. 그 귀여움을 한껏 살려 말해보면 가능한 것을 믿고 있기만 하며 조금 외롭던 이들이다. 이제는 말해도 되리라. 당신은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