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아빠는 늘 작은 고모의 옷을 뺏어 입었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던 옷은 꽃무늬 레이온 블라우스였단다. 아프로펌을 한듯한 곱슬머리에 여성용 블라우스와 501청바지를 입고 워커를 신은 채 한여름에도 팔을 걷은 레인코트를 걸치고서 신촌의 민속주점들을 유랑했던 철학도가 있다면 그게 우리 아빠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당신의 취향으로 나에게 자주 입히던 옷은 보라색 옷들이었다. 심지어 셋업이었다. 공교롭게도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내가 꽃무늬 셔츠와 데님, 워커, 밀리터리 코트, 보라색 옷들을 좋아하는 것은 유전과 학습의 두 영향력이 다 작용한 결과다.
연보라색으로 벽을 칠하는 일에는 이처럼 유서깊은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한여름에 레인코트를 입고 대로를 활보하는 아프로가 모두에게 치유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전통만큼 냉엄한 현실을 존중할 줄 안다. 그러나 베이지만은 제발 아니었으면. 베이지는 아니된다.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간 어느 여름 오후 3시의 태양에서 살짝 몸을 숨기기 위해 부라보콘을 손에 든 아이가 걸터앉은 조금 촉촉한 느낌의 녹색빛이 은은하게 도는 시멘트계단색이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내벽에 채워질 목재들과 어울릴 색이면 다 좋으니 맡기겠다고 했다. 베이지는 그래도 아니라는 둘째 날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덧 외부 테라스의 철골작업은 마무리되었고 비가 오지 않으면 바로 나무들을 붙이게 될 것이다. 지붕까지 목재로 다 덮어 밖에서 보면 아늑한 통나무집 느낌이 나기를 소망한다. 상담실을 3군데 만들 예정이고, 하나는 집단상담이 가능할 정도로 조금 넉넉하게 구성하고 있다. 나무벽을 이중으로 세우고 방음재를 단단히 넣어 내담자분들이 충분히 안전하게 또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목수반장님이 오셔서 내부 목공작업도 한창 진행 중이다. 코타츠를 놓고 좌식으로 설계한 상담실 벽면에도 나무를 대고 싶지만 예산이 없다. 인조식물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 같다. 화분들과 책이 함께 진열될 선반의 크기를 논의하며 잠깐 시간을 보냈다. 사실 가장 즐거운 시간은 완성된 순간보다도 새로운 가능성들이 나누어지는 이 순간일 것이다.
가능성은 기능성이어야 한다. 이 말은 참 멋있게 들린다.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가가 하는 말은 언제나 하나로 통한다. 인간을 위해 인간이 생각한다. 인간이 빠진 가능성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일 것인가. 어디서나 인간의 마음에 관해 배울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한여름의 신촌거리를 활보하던 아프로의 남자도 그렇게 햇살 가득한 길 위에서 마음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리라.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가 온다면 연보라색 비옷을 입고 집을 나설테니 그것도 좋다. 나는 지금 감개가 무량한 시간 위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