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것을 위한 감사
나쁜 말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떤 배역은 배우와 완벽하게 동일시된다. 아마도 그 배우가 아니라면 더는 존재할 수 없는 배역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해리슨 포드가 인디아나 존스고, 인디아나 존스가 해리슨 포드다.
3대째까지 묘사된 존스 박사의 가계처럼, 3대째 존스 박사를 좋아하던 동방의 어떤 가계도 있다.
그러니 정말로 나쁜 말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리움을 가득 담은 박수로만 화답한다.
신성한 것의 신화로부터 강제로 끌려나와 강제로 날개가 뜯겨야만 했던 그 뒷모습에.
그렇기에 더욱 박수로만 화답한다.
그것은 신화를 위한 박수다. 이 마음속에서는 변치않을 영원한 신화일 것이라는 다짐이며 또 언약이다.
탈신화화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신화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화의 문자주의적 차원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화가 담고 있는 신성한 의미를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회복하려는 것이다.
탈신화화로 아주 지독하게 오해되는 개념은 비신화화다. 이것은 이러한 슬로건을 갖는다.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
특정한 인물들만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두가 신이 될 수 있으며, 그렇기에 특정인물들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졌던 신화를 거세하고 개개인이 저마다 모두 신이 되는 신화를 새로 써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그러기 위해 이 비신화화의 운동은 신성한 것을 평면적으로 환원시키려는 전략을 갖는다. 신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 실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그렇기에 그가 얼마나 평이하게 인간적인지를 묘사하는 데 집요하게 심혈을 기울인다.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약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러니 그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우리도 그처럼 될 수 있다구!"
때문에 비신화화 운동이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의 문자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비신화화 운동은 무엇보다 신화를 문자주의적으로 소비하고자 한다. 해체는 단지 그 대상에 대해서다. 문자주의적 원리가 특정인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체제의 문법이며, AI가 찍어내는 모방과 복제의 주술이다.
디즈니는 이 비신화화 운동의 첨병에 서있고, 존스 박사는 또 다른 희생양이다.
3부작을 통해 신화가 되었고, 그 번외격인 4편을 통해서라도 신화는 불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게 해주었던 그 신성한 지평에서부터 인디아나 존스는 강제적으로 소환되어, 이제 늙고 외롭고 고집스러운 홀아비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망막과 영혼에 새겨지라는 최후의 임무를 맡았다. 이 세상의 온갖 신비한 보물을 찾아다니던 트레져헌터가 최후로 발견할 수 있었던 진정한 보물은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온세상에 널리 계몽하라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존스 박사 이상으로 똑똑하고 당찬 알파걸 공주와, 그녀의 사이드킥인 불굴의 용기와 재치를 가진 유색인 소년 종자에게서 영화 내내 무시되고 조롱받으면서 인디아나 존스는 이 최후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낸다.
그러니 나쁜 말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으며, 단지 박수만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서럽게 고이는 눈물은 이것이 한 편의 수난극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만 같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은 비신화화의 의도였다. 어떻게든 너도 약하고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그러면 살려주겠다고 군중은 신성한 것의 몰락을 강요하였다. 예수가 묵묵히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들이 신성한 것과의 연결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그 말이었다.
그의 말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고, 그 말이 울리는대로 신성한 것을 향해 떠났다. 존스 박사가 신성한 유물을 찾기 위해 떠난 그 여정과도 같다. 그것은 자기보다 더 거대한 것을 향해 모험하는 일종의 순례였다. 이러한 감각을 경외감(awe)이라고 부른다.
실존심리학자들은 현대의 문제는 인간이 경외감을 상실한 것이라고 곧잘 지적하곤 한다. 그래서 시도되는 것이 탈신화화다. 쉽게 말하면, 탈신화화는 신화를 설명문이 아니라 시로 다시 보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징적 시어들이 어떻게든 묘사해보고자 한 신성한 것을 향한 경외감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모험하는 인간은 언제나 자기보다 더 큰 신성한 것을 향해 모험하며, 신성한 것이 야기한 경외감을 통해 모험한다. 인디아나 존스는 그 자체로 정확하게 이 경외감으로 가득찬 인간의 상징이었다.
비신화화는 "대단한 것은 없고 그것도 실은 약한 것이니 약한 나도 그것과 똑같이 대단한 것이다."의 의도를 갖는다. 탈신화화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대단한 것이 정말로 있으니 그것을 향해 나는 모험한다."의 의도를 갖는다. 비신화화는 초월성의 환원이고, 탈신화화는 초월성의 복원이다. 그래서 비신화화는 모든 것을 더욱더 실은 약한 것으로 몰락시키며, 탈신화화는 모든 것을 더욱더 정말로 대단하게 상승시킨다.
인디아나 존스의 주제곡만 울려퍼져도 이 상승작용이 무엇인지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체감된다. 거기에는 약하고 평범한 것은 없다. 신성한 것을 향해 힘차게 돌진하고 있는 인간만이 있다. 신성한 것에 끌려 들썩거리고 있던 바로 그 인간이 신성한 것 그 자체라는 사실을 눈부시게 개방해낸다.
이 수난극의 영화에서는 사라져 있는 감수성이다. 존스 박사가 늙었기 때문은 분명 아니다. 3편에서 존스 박사의 아버지 역을 맡았던 숀 코너리가 노화와는 아무 상관없이, 아니 오히려 노화가 있기 때문에 한층 더 고귀하고 우아한 인간의 초월적 면모를 드러낼 수 있었던 전적을 우리는 이미 목격한 바가 있다.
디즈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멀쩡하던 존스 박스의 아들을 죽여가면서까지 무대에 세운 알파걸 공주를 혹시라도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세운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인디아나 존스는 이렇게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가 인디아나 존스의 신화를 사랑했던 이들이 수난극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끔 의도된 것이라면, 또 다른 박수를 보낼 수 있다. 그것은 비신화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최상의 끝맺음일지 모른다.
이제 인디아나 존스는 나치의 제3제국에서 풀려나, 아니 디즈니의 제4제국에서 풀려나 우리의 마음속으로 왔다. 신성한 것이 이동했다.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가슴에서 영원한 것이다. 다만 박수를 보내고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전송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영영 돌아온 신성한 것을 맞이하던 환대였다. 그리고 벌써 또 아틀란티스를 찾아 에게해로 떠난 영원한 모험가의 뒷모습에 전하는 뜨거운 감사다.
영화보다 한참을 커서 영화로는 끝날 수밖에 없던 이 인간의 신화에, 정말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