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30

"나의 숲으로"

by 깨닫는마음씨


415.jpg?type=w1600



나를 질리게 하는 것은 지겨운 이야기들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듣곤 한다.


자기의 자아가 형성될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신에게는 분리불안이 생겼으며, 어머니와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유착됨으로써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동일시하는 것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또 방송에 나오는 상담프로그램들은 아이들의 문제를 교정하려고만 하지 실제의 문제인 부모에 대해서는 잘 다루지 않는다며, 그러면 자기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건강한 독립을 할 수 없는 심리적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고도 말한다. 아마도 자기의 생각에는 심리적 독립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경제적 독립이 되어야 하며, 자기가 애인과의 종속관계에 놓이게 되는 이유도 자신에게 경제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그러나 자기는 이 모든 심리적 역동을 다 파악하고 있는 까닭에, 어머니와 동일시된 감정을 알아차리기 위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아이들이 진정한 자기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어떤 권위적인 강요도 하지 않으며, 또한 애인이 자신을 지배하려고 할 때면 양팔로 X자를 그린 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애착이고 또 애증이라는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당당한 자기의 권리를 실현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자기에게는 이제 이 모든 심리적 문제를 다룰 힘이 있으며 그 힘으로 자기 주변에 있는 심리에 취약한 사람들부터 도와가고 있다는 뿌듯한 감상으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개 마무리된다.


미안하다. 너무 전형적이고 통속적인 아침드라마 내용 같아서 잘 듣지 않았다.


예시를 쓰면서도 졸립다. 지겹고도 지루하다. 활기가 아주 낮은 수준으로 감소되어 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늘 목소리가 크다. 억지로 에너지 수준을 끌어 올려 말해야만 비로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인생이 지루한 이들이 어떠한 축제에 가서 억지로 신나는 척 과장된 모습을 보이는 도취의 일과도 같다.


도취된 이들의 근처에 있으면 몹시도 짜증이 난다. 나는 이것이 도취자들이 도취라는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분명하게 쓰고 싶다. 이러한 양상의 졸림을 깊이 살펴보면 그 안에는 언제나 화가 있다. 몸이 피곤하지도 않은데 졸리고 멍해지는 일은 지금 어떠한 정서가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심히 졸립다면 그것은 커다란 정서에너지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반드시 화다.


자기의 화를 은폐하고자 사람들은 졸린 현실을 만들어내고, 또 그 화를 다른 이에게 떠넘기고자 사람들은 도취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내가 정말로 피곤하게 느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현재 화를 내고 있으면서 자꾸만 남들에게 "화났어? 지금 화난 거야?"라며 화를 떠넘기려는 이들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화를 내지 않는 인물인 것처럼 연출하며, 그것을 자기의 어떤 차원높은 성취 및 상태라고 곧잘 생각하곤 한다. 실은 자신이 화라는 상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한없이 무력하기에, 다른 이가 화를 내는 것처럼 기만함으로써 자기는 그 무력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의 정신병은 아주 많은 부분 "화를 내면 진 것이고, 화를 내지 않으면 이긴 것이다."라는 명제에 기인한다. 사실적인 세계에서는 어떠한가? 상대에게 화를 떠넘기는 식으로 상대의 화를 계속 돋우면 맞아 죽을 수 있다. 톰을 약올리는 제리는 사실적인 세계에서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한 제리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명을 이루는 사회적 법률과 도덕원칙 뒤에 숨어 사람들은 자기의 화를 남에게 떠넘기는 일을 쉽게 자행하곤 한다. 그러나 사회를 구성하는 그 모든 언어로 구성된 통제의 원리는 언제나 임의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기만하고 있는 상대의 행위를 일정 부분 제어하는 효력을 갖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언어에 신적인 힘이 있다고 착각하며 계속 상대들을 기만하다가 맞아 죽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지금 자기의 감정대로 분출하여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현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정확하게 바로 그 일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고 상대들에게 떠넘기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종류의 폭력의 대표적인 형태다. 물리적 폭력보다 언제나 더 가혹한 것은 정신적 폭력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남에게 자기 감정을 대신 소비하게 하는 것이 바로 모든 정신적 폭력의 구조다.


모든 지겨운 이야기 속에는 정신적 폭력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이제 이렇게까지 말하려 한다. 지겨운 것은 자신의 실제적인 상태에 접촉되어 있지 않기에 지겹다. 여기에서 접촉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두려움의 상태다. 누가 자기 옆에 있지 않으면 두렵다는 그 상태다. 이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자각되지 않으면 상대가 자기 곁에 있도록 만들기 위해 상대를 통제하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이 통제욕은 자각되지 않고 은폐되어 있는 것이기에 언제나 그 위력이 과잉되게 행사된다. 결국에는 폭력이 되는 것이다.


왜 화가 나는가? 혼자일까봐 두려워서다. 그렇다고 말하지 못해서다. 그 대신에 오히려 상대들에게 자기를 떠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자신의 화가 아니라 상대의 화라며, 오히려 상대가 화를 내는 금수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는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도덕적으로 가르치려고 한다. 자기 곁에 계속 두기 위해 상대를 동굴 속에 가두어 쑥과 마늘을 먹이고 있는 셈이다. 자신이 다만 혼자이지 않기 위해 상대의 자유로운 날개를 꺾고 심지어 도덕적 얼간이의 위치로까지 추락시킨다. 나는 이 감옥이야말로 정확하게 폭력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지겨운 이야기는 감옥의 이야기이기에 지겨운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가는 이득은 상대에 대한 통제력의 권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아직 마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인간이 마음을 알아가려는 것은 함께 자유롭고 싶어서다. 이는 내 자신이 상대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어떤 권능을 집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으면 내가 자유로워지며 동시에 상대가 자유로워진다. 엄마와, 아이와, 애인과 정서적으로 동일시되어 아직까지도 그들의 미숙한 마음 때문에 그 마음을 건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해 자신이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다만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이다. 지겨운 일들의 전모는 이러했다.


혼자이지만 하나인 감각으로 사는 일에 대해 나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해왔던가. 그러나 이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지겨운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을 관두고 난 나는 혼자다. 눈물이 벅차다. 그래서 올바른 길로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맑고 생생하다. 혼자일 때 나는 신비하다. 나라는 것의 신비가 다시 감각된다. 나는 거의 매일 우는데, 그 눈물 한 방울은 내가 써온 그 어떤 글의 총합보다도 진실하다. 고요한 숲속에서 마주친 사슴의 눈망울을 닮았다. 볼 수 없어도, 혼자인 나는 지금 그런 눈을 하고 있다. 숲으로 홀로 걸어들어가는 이는 자신의 깊은 눈빛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빛과 함께하기 위해.


나는 결국 이 신비에 관해 쓸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내가 혼자인 것은 나를 만나고 싶어서다. 나를 만날, 마음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나는 혼자다. 사슴이 더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남의 의무가 아니라 나의 기회다. 아아, 나는 평생 내가 반한 것만을 쫓다가 죽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신비를 향해서만 살고 죽은 인간일 것이다. 내가 쫓아 달리던 것은 나를 쫓아 달리고 있었다. 숲은 우리가 기쁘게 사랑을 나누던 영원의 놀이터였음이라. 나는 자신이 얼마나 큰 행복 속에서 죽게 될지를 알아버렸다. 눈물이 한 방울 빛의 선을 그린다.



작가의 이전글세상에 없던 상담소를 만들어보자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