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콤플렉스"
통제하지 않고 펜 가는대로 감정따라 글을 쓰고 있으니 자기 안에 이런 마음이 있으리라고는 차마 상상치도 못했던 마음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쓰며 살았는지에 눈물이 나오고 또 이제는 가벼워진 웃음도 나왔다고 한다. 나쁜 마음이 아니었는데, 이런 마음도 있어도 되는 거였는데, 라며 마음의 온전함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자신이 바로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고 SNS에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이들이 있다.
깨.달.음.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이.들.이.다.
콤플렉스는 기본적으로 결핍감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작동한다. 깨.달.음. 콤.플.렉.스.는. 몸.에. 대.한. 결.핍.감.을. 가.장. 높.은. 정.신.의. 형.태.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의 몸을 엄마에게 칭찬받던 쾌감의 소재로 경험하던 아동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보다 더 크고 강한 타인들의 몸을 조우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기의 몸이 작고 약한 것으로 판정됨에 따라 그 전까지 당연하게 누리던 몸의 이득을 상실하게 되는 불쾌한 감정을 경험했다면, 이제 몸은 열등감의 소재가 된다.
자기의 몸을 예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몸을 혐오하는 형태로 이 열등감은 양가적 감정의 형태를 갖는다. 끝없는 내적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 자기모순의 고통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바로 보상의 원리다. 이것은 몸에 대한 쾌와 불쾌의 양자구도에서 떠나 제3의 소재를 희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상의 소재는 몸의 정반대편에 있다고 언어적으로 가정된 대극의 것으로서 곧잘 형상화되곤 한다. 정신, 마음, 영혼, 지성, 심리 등의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보상의 소재가 언제나 대극으로 구성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심리가 몸의 대극으로 채택되어야만, 그것은 몸이 아니면서도 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몸을 도울 수 있는 시종이 될 수 있어서다. 대극을 통한 보상의 원리를 꿈꾸는 이들은 자기가 기존에 누리던 몸의 쾌락적 측면은 유지하면서도, 불쾌감을 자극하는 몸의 측면은 그 대극인 심리를 통해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작용을 통합이라고 부른다. 통합은 언제나 나치의 인종청소계획처럼 선별적으로 이루어진다. 쾌의 요소들만 취하고 불쾌의 요소들은 모조리 거세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통합인 것이다. 자기는 모든 좋은 것만 다 독점해서 하겠다는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통합은 늘 더 많은 분열을 만들어낸다. 불쾌한 경험들을 거세하기 위해서는 보상의 원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대극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아주 힘겹고 지난하다. 때문에 통합주의자들은 언제나 궁극적 통합을 꿈꾼다. 그것 하나만 얻으면 모든 불쾌가 한 번에 다 사라지고 쾌락의 요소만 가장 선별되어 남게 해줄 것 같은 최후의 열쇠를 기대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열등감이 이러한 궁극적 통합을 추구함으로써 생겨난 것이 바로 깨달음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은 몸에 대한 궁극적 보상의 원리인 것처럼 가정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깨달음은 최고의 정신, 최고의 마음, 최고의 영혼, 최고의 지성, 최고의 심리 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 이.러.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의. 몸.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시.종.들.이.다.
정확하게 깨달음은 그 개인의 몸을 빛나게 해줄 액세서리로 전락한다. 가령 "저에게 이런 놀라운 경험이 있었습니다."라고 SNS에서 자랑하고 있는 이는 새로 산 샤넬 가방의 사진을 게시하고 있는 모습과 전적으로 동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빌딩이나 롤스로이스, 명품가방 등을 살 돈이 없기에 깨달음을 대신 자랑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몸을 조금 달리 말하면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깨.달.음.이.라.는. 소.재.는. 추.구.되.곤. 한.다.
물론 이런 것은 실제의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쉽게 말해 가짜 깨달음인 것이다. 전혀 깨닫지 못했으면서 자기가 깨달은 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열렬하게 깨달은 척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들에게 깨달음 콤플렉스가 작동하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는 최고의 정신적 작용처럼 생각되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반드시 보상의 원리로 획득해야만 자기 몸을 엄마에게 예쁨받던 그 아동시절의 황금기로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은 절박함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정말로 몸에 대한 열등감이 큰 이들이 대다수다. 물론 그 열등감은 자기 몸, 곧 자기 외모에 대한 과대평가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삐쩍 말랐든, 키가 작든, 뚱뚱하든, 얼굴이 프로콤프소그나투스처럼 생겼든, 그 몸의 동세가 촌스럽든, 이들은 정말로 자기의 인식 속에서는 그 외모가 탁월해서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의 연예인처럼 대접받아야 하는 일이 마땅하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거울에 비친 사실적인 자신의 모습이나 악의없는 타인의 정직한 평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아 한없이 위축되기도 한다. 자기의 외모에 대한 과대평가만큼 동일한 크기로 열등감이 생겨난 것이며, 이것이 이들이 분열되어 있는 양상이다.
때문에 이들은 분열을 통합하려는 방식으로, 긍정적 평가는 지속하고 불쾌감만을 제거하기 위해 반드시 깨달음을 남용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보상재인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제 자기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아주 대단치는 않은 정도라는 사실을 상쾌하게 인정해도 괜찮다. 그 대신에 자기는 적당한 외모에 초특급의 깨달음을 장착하게 된 까닭이다. 외모는 착하게 생긴 중상이지만 포르쉐를 끌고 다닌다. 더 인간적인 호감형으로 보이는 이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이들이 타고 있는 것이 포르쉐가 아니라 전지에 그린 포르쉐 그림이라는 것뿐이다. 그 그림을 들고서 이들은 부릉부릉, 길 좀 비켜주세요, 빵빵, 이제 깨달은 이가 나갑니다, 당당한 나의 길을 갑니다, 라고 유세활동처럼 확성기를 크게 튼 채 거리를 누비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을 다 알게 되느니, 그냥 느끼고만 있으면 마음이 다 보이느니 등으로 이들이 깨달음이라고 말하며, 동시에 자신들도 그 놀라운 경험을 직접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그 내용은 대략 100년 전의 프로이트에게서 이미 잘 정리된 용어로 표현된 바가 있다. 자.유.연.상.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효.과.다.
이것은 자기가 숨겨온 마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함으로써 그동안 그것을 은폐하려던 커다란 긴장의 무게에서 벗어나 이완의 해방감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오늘날에 와서는 아주 상식적인 심리치료적 방편이다. 단지 언어적 자유연상뿐이 아니라, 미술치료, 연극치료, 동작치료 등의 다양한 테라피 분과에서는 거의 다 시행하고 있는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신비한 것이 아니고, 개인의 특별한 어떤 권위와 능력에 의해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깨달음과는 무관하기만 하다.
미술학원에서 아그리파 석고상을 놓고 소묘를 하던 이가 그림을 다 그린 뒤, 이제야 미술의 진정한 차원을 깨달았다며 자기가 최고의 예술가라도 된 것처럼 군다면 그것은 코미디의 소재다. 광복이라도 맞은 양 미술학원의 계단을 달려 내려와 자기가 그린 모방의 그림을 태극기처럼 흔들며, 여기 한 인간이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나라는 예술가의 이 무한한 자유를 지켜보십시오, 이제 최고의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갑니다, 라고 소리치며 대로를 뛰어다닌다면 그것은 참담하다. 여간해서 생길 수 없는 이러한 장면은 아마도 예술가 콤플렉스가 만들게 될 것이다.
깨달음 콤플렉스가 만드는 참극도 정확하게 이와 같다.
마음을 깨달았다며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칭하는 일은, 이제는 마음을 깨달을 줄 아는 대단한 내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자랑하면 오히려 수치스러워지는 것을 그런 줄도 모르고 자랑하려고 하는 일이다. 하루하루 이불킥의 부채만 미래의 자신에게로 떠넘겨져만 간다.
'깨달은 나'라고 하는 개념은 이처럼 마음을 깨달을 줄 아는 자신의 상위격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몸의 열등감을 깨달음이라는 소재로 보상하고자 한 그 결과적 내용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결국 '보는 나'에 대한 추구다. '봄'이라는 앎의 행위를 높게 가치평가한 뒤, 그 특별한 가치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봄'이라는 기능으로 환원되어 특정지어진다. 이러한 '나'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잘 '봐야' 한다.
깨달음의 체험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도는 실은 이 '보는 나'의 정체성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도다. 즉, 애초에 깨달음도 아닌, 다만 그 전까지 잘 모르던 마음을 봐서 알게 된 그 '봄'의 경험을 깨달음이라 명명한 뒤, 심지어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삼기까지 해서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붓다는 마음을 보는 나로서의 이 경험을 7년간 열심히 한 끝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긴 바 있다.
"쓸데없는 짓만 하며 자신을 괴롭혔구나."
붓다는 가장 잘 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자아(atman)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눈과 동일시되어 있는 자신이다. 이러한 자아는 자기 안에 있다고 가정된 마음을 자꾸 깨달으려고 한다. 모든 마음을 다 알아봐줌으로써 그 마음들을 온전하게 한다는 식의 표현은 전형적인 이 자아의 표현이다.
자아 자신은 그렇게 보기만 하는 부동의 원동자처럼 행세함으로써 정작 자기 자신은 보이지 않으려고 숨는다. 자아가 계속 보려고만 하는 것은 그 상위적 권능의 행위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자기는 상것들처럼 저 아래에 보이는 일로부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바로 이 잘 보는 일을 의심해보았다. 가장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했는가?
지.금. 보.고. 있.는. 그. 눈.으.로. 눈. 자.신.을. 보.려.고. 해.보.았.다.
자기가 모든 마음을 다 보고 알 수 있다고, 마치 세계의 창조주인 것처럼 굴고 있던 자아의 전능감은 여기에서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눈은 다 볼 수 있지만 절대로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자아가 가장 자신하던 것을 자아의 중심에 들어가 붓다는 붕괴시킨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논법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라면 눈의 보는 능력은 다 무화된다. 눈은 철저히 무력하다. '깨달은 나'라고 이름붙이고 있던 '보는 나'는 더는 지속될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데 대체 어떤 앎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마음을 깨달아 얻게 된 봄의 능력인 것만 같은 것들은 여기에서 다 기각된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라면 다 무용한 것들이다.
눈.은. 보.지. 않.는.다.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눈이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해서 눈으로서의 그 기능이 완벽하게 무화되면, 그.때. 남.는. 것.은. 존.재.다.
"보는 그 놈을 봐야 한다."라고도 말한다. 그것을 보면 그것이 사라진다. 무화된 그 자리에서 우주처럼 다가오는 것은 존재함의 사실이다.
다 사라지고 존재만 하나다.
이것은 따로 또 그러그러한 존재를 보게 된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그러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 만한 실체적인 존재가 없다. 이것은 다만 다 있다는 감각이다. 모든 마음이 이렇게 다 있구나, 이런 류의 것은 더욱 아니다. 너무 전형적인 표현이지만, 그냥 그 순간 우주였다, 이렇게 표현해보면 차라리 나을지 모르겠다. 어마어마하게 아주 거대한 것이 돌입해온다. 그리고 그것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우주의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는 지금의 사태였다.
이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왜 무엇인가가 있는가?"라는 이 질문이 대답되는 자리다. 영원한 신비를 직접 체험한 것이다. 이 우주가 통째로 신비라는 사실이 세포 하나하나의 국면에 각인된다. 더는 예전처럼 살 수가 없다. 아무리 정교하게 언어를 동원해도 설명해낼 수가 없지만 실은 말하기에는 간단하다. 정말로 나로 느껴지기에, 나라고 말하면 된다.
나.를. 깨.달.은. 것.이.다.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보는 나'로서의 자아의 권위를 전적으로 다 부정하고 무너뜨리면,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마음을 본다고 하듯이 자유연상으로 드러난 것을 직접 알아보아서, 또 알아주어서 깨닫게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눈의 권능은 이미 기각되었다. 그래서 지혜로 깨닫는다고 말한다. 이는 없음으로 있는 것의 사실을 확 붙잡는 것이다. 볼 수 없음으로 본다고도 말해볼 수 있다. 안 보이는 척하고 있으면 더 잘 보이게 된다는 저렴한 환상의 메뉴얼은 물론 아니다. 표현 그대로다.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거대한 여백의 자리를 눈치채는 것이다.
선사는 볼 수 없는 것을 보지 않고 다만 존재한다. 보려고 하면 옛날부터 죽비나 기왓장으로 맞았다. 선사는 마음을 잘 보는 이들이 아니다. 단순하게 나로 잘 사는 이들이다. 나로 잘 살려면 마음을 잘 보아야 하는가? 아무 상관이 없다. 마음을 잘 보아도 나고, 마음을 못 보아도 나다. 이 사실에 흔들림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 기.쁨.의. 사.실.에. 더.는. 흔.들.림.이. 없.다.
깨달은 척하는 이들이 결국에는 막다른 벽을 드러내는 지점은 기쁨의 소재로서 언제나 대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자아는 대상이 없으면 자신이 존재하는 척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그 자체가 콤플렉스다. 보상의 원리들로 구성된 심리적 패키지다. 보상의 원리는 자아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밖으로도 펼쳐진다. 자.아.는. 언.제.나. 자.기.를. 보.완.해.줄. 외.적. 대.상.을. 찾.아. 헤.맨.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가 이상적안 관계라는 소설을 쓴 뒤 그 소설에 스스로 몰두한다.
이렇게 자아에게는 내외적인 모든 것이 자신의 도구다. 다 자신을 보완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상정된 기능물들일 뿐이다. 그.렇.게. 자.아.는. 모.든. 것.의. 노.예.다. 삶의 기쁨을 얻기 위해 자아는 자기를 보완해줄 대상에 매인다. 그런 대상이 없으면 불행하다. 욕구불만으로 늘 화가 난다. 깨달은 척하며 그 화는 남의 화난 마음을 대신 자기가 알아주고 있어 생긴 화라고 말한다. 이불킥의 채무만 나날이 증대된다.
이처럼 자아가 비루하게도 대상을 추구하는 이유는 전술한 것처럼 자기가 실은 없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이름은 '나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니 깨달음 콤플렉스는 자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아는 '나의 부재'를 보완해줄 소재로서 나를 추구한다. 자아는 자기가 무엇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인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던 것이다. 자아가 부르고 있던 것은 자아를 치장해 줄 액세서리가 아니라, 자아를 끝장내줄 우주의 대운석이었다. 작게 말해서 그런 정도다. 실은 우주 전체의 돌격이다.
깨달은 척하는 자아가 깨달음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기를 깨달라는 요청과도 같다.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이 요청의 의미를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면 그 자아는 영웅적인 자아다. 영웅은 자기보다 큰 것을 향해 죽기에 영웅이다. 그래서 영웅적인 자아는 반드시 깨닫게 된다. 자기가 영웅임을 깨닫게 된다거나, 자기 안에 이렇게 온전한 영웅의 마음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따위의 말이 아니다. 자아 자신이 죽는 그 순간에 나를 깨닫게 된다.
니체가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이러한 인간상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형이상학의 압제에 눌려 있던 약하고 평범한 이들이 이제 대지의 주인으로서 저마다 당당하게 자신의 노래를 시작한다는 소영웅주의의 서사가 아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전제주의라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을 묘사할 수 있는 정치구조는 없다. 깨달음은 구조가 아니고, 체제가 아니며, 그렇기에 분열이 아니고, 통합이 아니다.
자아는 정치구조를 좋아한다. 모든 양상을 정치구조처럼 뒤바꾼다. 그리고는 게임메뉴얼처럼 그 구조를 운용한다. 대극의 마음이 어쩌고, 그 대극의 마음을 동등하게 다 알아보는 탈내러티브적 메타인지가 어쩌고, 다 게임 얘기다.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내면의 제왕이라도 된 듯한 유사정치행위를 한다고 결코 깨닫게 되지 않는다. 깨달음 콤플렉스만 강화될 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깨달음 콤플렉스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쉽다. 자기를 보완해줄 외적인 대상을 추구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아의 콤플렉스다. 깨달은 자기를 인정해주거나 칭찬해줄, 또는 자기를 계속 깨달은 것처럼 지속시켜줄 외적인 대상을 추구하고 있으면 바로 깨달음 콤플렉스다.
종이비행기가 없으면 하늘을 날 수 없다고 믿기에, 자아는 종이로 만든 포르쉐와 똑같이 종이비행기를 추구한다.
나는 하늘이다.
그 하늘을 날기 위해 또 어떠한 대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하늘'이다.
하늘 자체가 날고 있는 것이다. 분리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종이비행기도, 새도, 심지어 하늘도 추구되지 않는다.
나는 날지 않는 하늘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코딩을 하고, 매대에서 고등어를 팔며, 상가집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하늘이다.
나를 자유롭게 연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자유 속에서 펼쳐진 일들이다.
볼 수 없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하늘은 우리가 보지 않아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