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이즈 어프레이드(2023)

보이즈 어프레이드

by 깨닫는마음씨




이 영화는 오늘날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는 지배적인 심리적 역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심리학적 보고서에 가깝다.


아리 애스터는 누군가에게는 형편없이 욕먹을 짓을, 또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찬사를 끌어낼 일을 해냈다.


라캉 식으로 해석한 프로이트나 라캉 자체를 대입해서 본다면 아리송하거나 횡설수설하는 영화이고, 융은 일찌감치 저편으로 밀어두고 시작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신화적 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 이상'의 감추어진 의미를 은유하고 있지 않다. 대극의 그림자를 통합해 자기를 실현해가는 무슨무슨 법 같은 것은 여기에 없다. 보이는 것 그대로다. 차라리 이 영화는 너무나도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생물학적 전기다. 니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니체가 벼락과 함께 출현할 환경을 충분히 조성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사실 제일 가까운 것은 이토 준지다.


아리 애스터가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히브리적 부권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미련을 버리고 조금 더 정직해진 프로이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프로이트를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스타니슬로프 그로프를 말해보는 일이 더 효과적이다.


그로프는 인간의 심리적 문제에 있어서의 주산기 체험의 중요성을 주장한 연구자다. 쉽게 말해, 태아가 자궁 안에 머물다가 산도를 통과하는 그 체험이 개인에게 커다란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시야는 차단한 채 신경을 긁는 소리들로 주인공인 보(Beau)가 출생하는 과정을 관객들에게 전함으로써, 극도의 긴장어린 '불쾌함'으로 드러나는 주산기 체험의 한 양상을 관객들 또한 함께 체험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쩌면 이 주산기 체험이 보라는 인물의 인생을 핵심적으로 함축할 수 있다는 암시를 제공한다.


그로프에서 조금 더 나아가 주산기 체험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것은 한 개인의 인생의 방향성이나 그 성질이 모태에서 결정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러니 어머니라는 존재는 더욱 중요해진다. 모성은 한 개인에게 절대적인 운명의 세력으로 작동하는 신적인 속성까지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늘 두렵다. 그의 어머니가.


침대 밖의 세상은 정말로 온갖 이상한 위험들로 가득찬 곳으로 보에게는 지각된다. 가끔씩 그 위험한 가능성들은 직접적인 위협이 되어 보의 내밀한 공간을 습격하기도 한다. 마치 야동을 보고 있는 아들의 방에 과일접시를 들고 급습하는 어머니의 모습과도 같이. 결국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는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흡사 분열된 정신증의 모습처럼 묘사된다. 카메라는 다양한 이상심리학의 증세들을 보의 입장에서 묘사해나간다. 관객들도 그 지리멸렬함에 정신이 나갈 것 같다. 그 정도로 보는 두려운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러한 연기를 정말로 잘한다. '마스터'도 '조커'도 그리고 이 영화도 실은 부성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모성이다. 여신의 폭력적 지배다. 모성이 개인을 미치게 한 것이다.


"어디에서나 빅마더가 지켜보고 있어!"라며 마마보이는 두려움에 광란한다. 그가 세계 도처에서 보는 것은 전부 다 그의 어머니다. 그러니 그가 무서워하는 것도 오직 그의 어머니일 뿐이다. 빅마더는 자신을 가장 작고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그 존재감을 박탈시키는 것만 같다. 이것은 분명하게 거세의 공포다. 이 지점에서 아리 애스터는 네오 오이디푸스를 기획하거나, 또는 프로이트를 다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화적인 것이 아니라,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생물학으로서.


아이가 거세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가 직접적으로 그의 성기를 거세하려고 한다. 가장 무력한 아이로서만 지속되도록 한다. 오래된 신화들에서는 부권으로 대표되는 로고스가 율법을 내세우며 인간을 정죄했지만, 이 현대적 현실에서는 어머니의 임의적인 기분을 맞추어주지 않으면 인간은 즉각 심판된다. 원칙이 없으니 눈치만 발달한다. 무엇을 선택해야 혼나지 않을지를 도저히 알 수 없기에 선택장애와 그로 인한 책임감박약은 필연이다. 그렇게 자기 자식의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며 빅마더는 다시 불같이 화를 낸다. 보가 미칠 수밖에 없는 것도 운명이다.


정말로 아이는 두렵다. 어머니가.


동시에 아이는 두렵다.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아이를 잃을까봐 두렵고, 아이가 자기에게 반역하며 위해를 가할까봐 두렵다. 아이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서 아이를 전적으로 지배하려 하기에 이제 아이가 위험한 존재처럼 두려워진다.


또한 아이는 두렵다. 자기 자신이.


어머니가 아이를 두려워하는 그 이유가 언제라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기에 아이는 자기 자신이 두렵다. 이 시대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살해할 가능성 속에서 두려워하는 중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빅마더와 마마보이가 상호적인 두려옴으로 함께 써가는 공포극이다. 그 사이에는 늘 집요한 암투가 펼쳐진다. 콜타르처럼 어둡고 끈적하다. 아니 어쩌면 모태처럼. 빅마더와 마마보이가 싸우며 서로를 심판대에 올리고 있는 그 자리는 분명 자궁 안이다. 그러한 감옥 안에서 펼쳐질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생물학적 모성의 폭력이 두렵고, 감옥 안에 억압된 생명체가 반드시 표출하게 될 그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생물학적 본능의 폭력이 두렵다. 모태가 두렵다.


이처럼 모태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감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니 모태를 공포의 소재로 상기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정말로 이토 준지를 닮아 있다. 두려울 때 인간이 가장 돌아가고 싶은 최후의 피난처로서 낭만적으로 자주 상징되곤 하는 것을 뒤집어 오히려 그곳이 가장 무서운 곳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침대 밖은 무서운 것들로만 가득하니 침대 안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말은 일견 상냥하게 들린다. 자궁으로 바꾸면 어떻게 들릴까? 자기에게서 태어난 것이 죽을까봐, 또 자기에게서 태어난 것에게 죽을까봐 극도로 두려운 이가 태어난 것을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돌림으로써 두려움의 원천을 없애고 싶어할 때, 보는 이 최후의 공포에 도달한다. 이제 천지가 뒤집혀 양수에 휩싸인다.


이렇게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간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성교한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죽임당한다는 의미로서 존속살해를 실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것이다. 야생동물의 세계에서 유약하게 태어난 새끼를 어미가 죽이는 일은 그 어떤 신화가 아니다.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생물학적 본능일 뿐이다.


감독이 전작에서도 묘사한 것처럼, 가장 지키고 돌보는 빛의 세력을 가장한 것이 실은 가장 음험하고 폭력적인 어둠으로 작용한다. 가장 문화인 것처럼 위장해보지만 실은 가장 야만이었다. 가장 친숙하고 우호적이었던 것이 그 실체는 가장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다. 어떤 것의 절대화가 이루어진 지점에서 그 절대성의 권위가 도전되지 않고 지지되기만 함으로써 공포는 발생하는 것이다.


모든 다양성을 다 알아주고 품어주는 모성의 원리를 이 시대가 절대적으로 예찬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절대적인 두려움의 소재가 될 것이다. "보이즈 어프레이드(Boy's afraid)."라고 이 영화의 제목을 유사한 음가로 읽어보면 어떨 것인가. 이 시대의 아이들이 두려운 것은 세상에 아이들을 두렵게 할 소재들이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성주의가 성대하게 예찬되고만 있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정말로 왜 두려운 것일까? 여기에 대해 우리는 분명 질문해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영화는 그러한 촉진의 기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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