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의 틈새를 조금이라도 비집어 열면 우리의 승리다"
승리의 조건은 언제나 자유가 아니던가?
나는 정직하게 자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승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또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유를 투쟁이라는 단어와 엮는 일이다. 자유는 투쟁으로 쟁취되고 증진될 수 있다는 발상에 대해 나는 몹시 회의적이다. 자유롭기 위해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나를 가둔 것은 대체 누구인가?
싸워야 한다면 오직 내 자신에 대해서뿐이리라. 내 자신만이 내가 자유로울 일을 봉쇄하는 최고의 간수다. 그러나 간수와 정말로 투쟁하는 일은 필요한 것인가? 간수는 명령받은대로만 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차라리 나는 명령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살피는 일의 유익성을 말하고 싶다.
명령된 것은 인식된 것이다. 그러니 자유를 봉쇄하는 명령의 한계는 곧 인식의 한계일 것이다. 인식의 한계! 이것만이 우리에게 문제이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경험하는 것은 그들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원하는 것을 원없이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다. 인식이 좁게 닫혀 있는 그 한계 때문이리라.
나는 인식의 한계를 만드는 것이 성공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성공경험은 하나의 완성된 완결의 경험이다. 자, 이제 박스는 닫혔다. 그것이 성공적일 때 그것은 동시에 한계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현상적 경험은 그 완성된 박스의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되고 다루어진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이 박스의 크기로 환원되는 일과도 같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이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성공경험을 마패처럼 들이대며 탐관오리 같은 이 모든 세상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투쟁일 것이다. 암행어사가 탐관오리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면 자유가 쟁취된다. 고을민들이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된다. 자신의 성공경험에 근거해 세상을 이기기 위해 투쟁을 펼치는 이는 자신을 자유의 해방자라고 간주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단지 인식의 한계에 갇힌 이라고만 말하고 싶다.
그가 세상과 자꾸만 싸우려 하는 것은 아마도 답답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이 그를 가두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옥죄이고 갑갑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좁은 인식이다. 자신의 인식이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간수는 그 좁은 인식의 명령을 다만 그대로 집행하고 있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심지어 간수도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이 죄수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고 카프카는 쓰고 있다.
그래서 자유롭기 위해 내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일도 아니리라. 내가 승리하고 싶은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 나는 내 인식의 한계에게 승리하고 싶다. 비루한 인식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사람들은 곧잘 실패의 경험이 그 사람을 작게 만들고, 성공의 경험을 거듭해야 큰 사람이 된다고 말하곤 한다. 나는 이것이 도전되지 않은 환상이자 폭로되지 않은 거짓말이었다고 쓰고 싶다. 우리는 이보다는 훨씬 정직하게 경험했다. 우리를 위축되게 만든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었다. 자신이 성공의 기준으로 정했거나, 또는 과거에 경험했던 그 어떤 성공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를 위축되게 만든 원인이었다. 실패는 실패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성공의 이미지와 비교됨으로써만이 심리적 수축을 야기한 것이다.
실은 어떠한 결과가 실패로 판정된 것도 이처럼 이미 특정한 성공경험에 고착되어 생겨난 인식의 한계 때문에 일어난 일이리라. 자기완결적인 작은 박스 안에 담기지 못한 것들을 다 결함품으로 판정해버린 것이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정말로 소중했던 것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잃어지는 광경을 너무나 많이 목격해왔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는 싸우고 싶다. 그러나 싸우지 않는다. 작은 박스와 싸우는 일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길 위의 사과와 싸우는 일과 같다. 그 결과로 자유로워지기는 커녕 싸우는 일 위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속박된다. 승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승리해봤자 얻는 것이라곤 없다.
나는 차라리 사과를 들고 길가에서 비켜난 숲으로 들어가고 싶다. 길 위에서 싸우다가 홀로 말라죽어갈 그 고집스러운 운명을 비켜나서. 아삭, 사과를 베어물며 선선한 바람 속에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 앉아 쉬고 싶다.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나는 이것이 세련된 자유라고 참으로 쓰고 싶다. 이것은 결국 길 위의 사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자유다. 인식은 나의 적이 아니다. 나의 것이다. 함께 가야할 것이다. 나는 나와 관련된 그 모든 것과 함께 가는 일에 내 자유를 쓰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차라리 조금 미칠 것이다. 나는 우주의 것이다. 나는 우주로부터 소외된 외로운 방랑자 따위가 결코 아니며, 우주와 싸우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겠어, 라고 외치는 중2병 히어로가 더욱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우주이며, 나는 우주의 것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우주와 함께 갈 것이다.
이 말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나는 지금 나보다 훨씬 큰 것 안에 담기기로 한 것이다. 작은 박스도 그 안에 함께 담긴다. 나보다도 크고 작은 박스보다도 큰 것 안에 담겨 있으니 나는 이미 작은 박스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다. 열어보니 박스 안에는 원래 아무 것도 없었다. 보물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렇게 내가 이 우주의 것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전과 똑같이 그대로였지만, 나를 속박하는 것은 더는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자유였고, 처음부터 승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우주 안에 담겨 있던 보물로서.
작은 성공경험 따위가 아니라, 나는 가장 큰 것에 나를 묶었다. 아니 원래부터 거기에 묶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아무리 성공하든, 또 아무리 실패하든, 우리 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지구는 자전하고 있었고, 해는 동쪽에서 뜨며, 나는 자유로웠다. 아아, 나는 다시 이해한 것이다. 지구는 자전하고, 해는 동쪽에서 뜨라는 그 변함없는 명령처럼, 나는 자유롭기만 하라고 명령되고 있던 것이다.
명령된 것은 인식된 것이다. 좁은 길가에서 비켜서 이 모든 일이 가장 거대한 사태로 인식되었을 때, 그 명령에도 한계가 없었다. 끝없이 자유롭고 그렇게 영원히 승리하라고 우주는 나에게 가장 크게 열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따를 것이다. 작은 박스 하나가 이 신성한 명령을 받고 돌격하는 우주의 권속을 막을 수나 있을까. 조금의 틈새라도 비집어 열어내면 즉각 우리의 승리다. 우주와 나 그리고 작은 박스가 함께 승리했다. 다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