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37

"만화적 상상력"

by 깨닫는마음씨




만화같은 상상력과, 소설같은 상상력과, 영화같은 상상력과, 게임같은 상상력은 다르다. 나는 이 중에서 시적 상상력과 제일 유사한 것은 만화적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표현되는 방향성이 반대이나, 표현하는 감수성이 같다. 시는 글로 쓴 그림이고, 만화는 그림으로 그린 글이다.


이것은 리듬과 호흡이 있는 상상력이며, 더 중요하게는 그 리듬과 호흡에 대한 묵상이 함께 있는 상상력이다. 숲길을 걷는 것과 같다. 원한다면 심지어 어디서나 멈추어도 된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풍경 같은 것은 없으며, 전진에 대한 압박도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다 설렘이다. 어떤 그림이 펼쳐질지에 대한 기대감이며, 그 그림이 의미로 다가올 감동에의 예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는 시와 같이 실은 여백의 예술이다.


『바쿠만』에서 "만화는 재미만 있으면 된다."라는 대사는 이를 함축할 것이다. 재미는 여백이 내포하는 자유의 가능성에서 비롯한다. 정말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만화다. 아무리 자유도가 높은 오픈월드 게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게임 내에서 더 많은 행위가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할 뿐이다. 그리고 행위의 다양성은 행위 자체에 오히려 자유를 종속시킨다. 가능한 행위 외에, 또는 더 많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방향 외에 상상력은 오히려 닫히는 것이다.


만화는 한 장면과 다음의 장면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이 있다. 그것은 행위의 자유가 아니다. 마음의 자유다. 셀 수 없이 무수한 마음의 그림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 중 하나가 다음의 컷에 임의로 구현되겠지만, 독자는 이미 그 무한한 세계를 자신의 몸으로 찰나에 체험했다. 그의 몸이 움찔거리며 약동한다. 자유의 날개가 돋아난 것만 같다. 2차 창작, 3차 창작이라는 말은 만화라는 분야에서 더욱 자연스럽다. 날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비상이 심지어 시험 전날 자신의 침대 위에 국한된다 할지라도, 마음은 가장 높이 날고 있었다.


나는 더 실증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보고자 한다.


"어디 만화에서 나온 애 같아."


이 말은 그 대상자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행위되는 방식과는 아주 다른 그 어떤 신비성으로 지금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나온 애 같아." 이런 말은 무엇인가 조금 세련되었고, 세상사에 노련하며, 의사소통에 있어 극적인 반응양식을 멋드러지게 활용하는 인물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 같다. "소설에서 나온 애 같아." 이 말은 어떠한가. 미묘하게 자기완결적이고, 예민하며, 매우 자주 사람들이 다들 짜장면을 시키고 있는 테이블 위에서 홀로 마파두부밥을 시킨 뒤 불현듯 서럽게 통곡할 인물일 것 같다. "게임에서 나온 애 같아." 이것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이다.


다 어떤 전형이 그려지기 쉬운 소재들이나, 만화만은 조금 다르다. 만화에서 나온 것 같다는 묘사에는 쉽사리 전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의 눈앞에 떠오른 뒤에야 비로소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나는 지금 무협과 판타지의 문법이 합쳐진 공장제 한국웹툰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게임적 상상력에 가깝다. 중2병 GTA 같은 것이다. 아이돌 헤어스타일을 한 키 크고 잘생긴 깡패들이 자신이 가진 행위의 다양한 표현들을 뽐내는 천하제일경연대회의 묘사도 물론 자유의 표현이지만 이것은 행위에 대한 집착에 갇혀 그 생명력을 상실한 자유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야."라며 자신을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행위를 이루려는 일은 이미 자유보다 큰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세간의 평가다.


오늘날은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 내에서 남의 눈치를 보며 해야 한다. 영화는 심지어 계몽과 윤리의 매체다. 어벤져스나 스타워즈 같은 오락물도 관객을 가르치려고 든다. 소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작동하곤 하는데,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당당하라는 어떠한 과장된 위악의 무게를 나는 종종 느끼곤 한다.


정말로 편하게 눈치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만화뿐이다. 라면을 끓여놓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 및 게임의 시간은 라면보다 빠르게 흐르며, 소설의 시간은 라면보다 느리게 흐른다. 정말로 라면과 함께 편한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만화가 분명하다. 편하다는 것은 여유가 있다는 것이며, 그 여백의 시간으로부터 자유는 태동한다.


"어디 만화에서 나온 애 같아."라는 말은 이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저렇게 하고 다녀도 될 정도로 뭔가 인생에 알 수 없는 여유가 있는 자유로운 애처럼 보인다는 말인 것이다. 대체로 그러한 이의 사회적 자원이 풍요롭지는 않을 것이며 너무 편하게 라면만 먹고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에게는 다만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것이며, 거기에서 비롯한 마음의 자유가 지금 훤칠하다는 뜻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러한 취지에서 『빌리 배트』를 통해 "왜 만화인가?"에 대해 충분히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만화적 상상력은 세간을 의식하며 남의 눈치를 보지 않기에 순수하다. 남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남의 욕망으로 살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화적 상상력은 욕망을 초월하는 것이다. 욕망 너머의 자유를 향한 순수한 소망이다. 그런데, 아마도 이것이 중요하리라, 자유라는 것은 언제나 함께 자유로움으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있던 욕망의 손아귀를 함께 풀어야 우리는 진실로 자유롭다.


그러니 순수한 자유의 소망은 언제나 함께 자유로울 현실을 꿈꾼다. 가만히 두어도 그렇게 향해 간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정면에서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배 꼬이지 않은 스트레이트한 감수성이다. 만화는 언제나 정면승부다. 만화적 상상력은 우리가 함께 자유로울 가능성을 정면으로 그려내고 있는 상상력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주인공들이 자주 던지듯이 시속 150km의 진심을 담은 직구다. 미트에 꽂혀 임의적인 하나의 운동은 끝이 났어도 침묵 속에서 여전히 공기는 진동하고 있다. 가슴의 떨림을 여운으로 남긴다. 묵상의 시간이다.


나는 더욱 과감하게 사람들이 만화적으로 살 수 있기를 꿈꾼다. 이 세상에서 좀처럼 살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그 존재가 진하게 드러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증대한 존재의 밀도에 힘입어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더 넓어지며, 보다 살 만한 세상이 된다. 숲을 향한 마음이다. 아주 섬세하고 깊은 밀도의 마음이다. 그러니 그 표현은 리듬과 호흡이 선명해진다. 색이 짙고 푸른 숲이며, 그 숲보다 더 그림 같은 인간의 자태다. 만화처럼 웃는다. 나는 지금 그 얼굴을 시속 150km로 상상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마음생활자의 수기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