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38

"유령제조업"

by 깨닫는마음씨




현대는 문명의 빛으로 인해 유령이 사라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유령이 창궐하는 시대라고 정직한 관찰자라면 그리 말해야 하리라.


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두가 똑같은 모습으로 유령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실상 그들은 각자가 생산수단을 확보하게 된 인민과도 같았다. 이제 그들은 자본가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예였다. 자기 자신이 유령들을 만들어내고 그 유령들에 두려움을 느끼며 고통받는다. 나는 이것을 스스로의 노예라는 표현 외에 달리 표현할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하겠다.


자기 마음이 괴롭다고 호소하는 이들의 많은 경우는 하나의 마음과 반대되는 또 하나의 마음 사이에서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말하곤 한다. 나는 이들이 정말로 마음을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들이 단지 생각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생각과 반대되는 또 다른 생각 사이에서, 즉 생각들이 충돌해서 이들은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있던 것이다.


생각을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이 지점은 유령제조업의 시작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유령제조업의 결과물이다. 공장의 기계들은 한참 전부터 기괴한 소리와 함께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공장을 유령아이 생산공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잠깐 고민한다. 본질적인 어떤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이 좋을지, 임의적인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실은 고민도 아니었다. 날숨처럼 터져나오고 싶은 것을 가로막지만 않으면 되리라. 나는 생각들 사이에서 정체하지 않고 마음을 뒤따른다. 내 글이 마음을 앞에서 인도하고 있지 않다. 마음을 뒤따른 내 발자국이 결국 글인 것이다.


현재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이들은 현재에 존재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현재에 존재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생각을 만들어낸다. 그 생각이 바로 유령이다. 이들은 현재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에 무척 외롭다. 자신이 현재를 소외시키기에 현재로부터 소외된 까닭이다. 그래서 이들은 생각이라고 하는 유령을 만든 것이다. 같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처럼 생각을 자기가 경험하는 외로움의 구원처처럼 삼은 것이다. 유령친구인 셈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외로워서 아이를 낳고자 하는 부모의 상태와 같다. 자기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생각은 그래서 '자기 아이'의 속성을 갖게 된다. 자기의 배가 아니라 자기의 머리로 친히 낳은 유령아이다. 유령아이를 자주 출산하는 이들이 머리아픈 증세를 만성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생각이라고 하는 유령아이를 태어나게 하기 위한 산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유령제조업의 핵심을 묘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자기의 현재를 소외시켜 시간의 미아가 된 이가 외롭지 않기 위해 유령같은 생각들을 친구처럼 만들어내고, 또 자신이 만들어냈으니 그 생각들에 아이의 속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는 부모와 같은 속성을 부여하는 그 모든 일이다.


그리고 이제 이 유령제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자기가 만들어낸 생각이라는 공산품에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사업적 슬로건은 출현한다.


"모든 마음은 괜찮다!"


이것은 이런 말이다.


"모든 내 생각은 괜찮다!"


자기의 생각이 괜찮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러한 말을 하는 이에게 있어 자기의 생각이란 자기가 낳은 자기 아이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기괴하게 곡해되고 남용된 결과물인 "니 생각만 정답이 아니고 내 생각도 동등하게 정답이다."라는 말은 이러한 유령제조업의 발상을 근거로 한다. 근본적으로는 "내 자식이니 무조건 옳다."라는 무식한 폭력성의 표현이다.


생각을 마음으로 착각하는 이들은 마음 때문에 힘들다고 경험할 때 이상한 생각의 마법사 같은 이를 찾아가, 서로 싸우며 힘든 마음들도 모두 자신의 동등한 아이이니 상냥하게 그 마음들을 다 알아주는 좋은 마음의 부모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럴 때 그들은 "그래 맞아! 나는 좋은 마음의 부모였어!"라고 마치 이제야 진정한 자신을 찾았으며, 앞으로 어떻게 마음을 대해야 할지 그 진리의 방법론을 알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감격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더욱더 노골적으로 유령제조업에 매진하게 된다. 이제 그것은 찬미받을 사업인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처참하게 잃어가는지를 잘 보아왔다.


자기가 만든 자폐적 생각을 사람들이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의 생각을 만들고 또 그것과 반대되는 생각을 만들어 서로 충돌시킨 뒤 이제 자기가 그 두 생각을 다 알아주는 진정한 마음의 대장이 되겠다고 하는 인형놀이, 아니 유령놀이를 하는 모습에 대해서만 말해보자.


평안하던 현재에, 하나의 생각과, 그에 반대되는 생각, 그리고 그 둘을 다 온전하게 알아주는 생각, 이렇게 3개의 잡생각이 생겨났다. 쓰레기는 3배씩 증가할 것이다. 이렇게 매일을 살아가면 생각의 쓰레기로 생활공간이 가득찬다. 생활공간이란 인간이 존재할 공간이다. 존재를 위한 이 공간이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과도 같은 생각이라는 것에 완벽하게 잠식된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나날이 좀먹고 있는 현실이다.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아니다. 당연히 아이도 아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을 자기 아이라고 믿으며, 그것이 소외되면 안된다고 자기가 반드시 그 온전함을 지켜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는 일은 그저 괴담의 소재다.


괴담은 인간성의 상실을 다루는 이야기다. 비인간적이며, 나아가서는 반인간적인 모습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현대에는 이러한 괴담들이 넘쳐난다. 현재에 어떻게든 존재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현재의 자신을 악착같이 부정하기 위해, 유령생산공장에 에너지를 들이붓고 그로 인해 더 많이 만들어진 유령들과 우리 아이 이쁘다며,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달밤의 춤을 춘다. 이 광란이야말로 비인간적이며, 또 반인간적인 것이다.


외로우면 사람은 조금 미친다. 이것은 이러한 종류의 일일 것이다. 미친 이가 도달하는 것은 결국 광신이다. 광신은 광신의 대상과 그 주체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나는 자기의 생각을 신처럼 모시는 일에 대해 결국은 쓰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생각이라는 신을 창조하는 '신 위의 신'처럼 자기 자신을 최상위의 창조주로서 간주하는 일에 대해서도 역시 쓰고 있는 것이다. 생각을 마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은 자기가 글쓰기 등의 특정행위를 통해 마음을 만들 수도 있고, 변화시킬 수도 있으며, 또 없앨 수도 있는 마법사 같은 인물이라고 믿는다. 자기의 생각을 마음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생겨난 망상의 결과다.


미친 마법사를 만든 것은 분명 외로움이다, 이렇게도 쓸 수 있겠으나 나는 더 정확하게 쓰고 싶다. 미친 마법사는 외롭지 않으려고 대신 미친 것이다. 그의 외로움은 그가 현재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외로움은 언제나 존재가 부정된 그 결과다. 현재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이는 그래서 늘 외롭다. 이야기로 만들어낸 유령 같은 허구의 자기정체성을 자기라고 믿고 있는 이들도 늘 외롭다.


이처럼 존재에 치를 떨며 기어코 존재를 부정하려는 고집을 달성하기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워지나, 그 외로움이라는 불쾌한 경험을 피하고자 또 빠르게 유령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미친 마법사는 홀로 머리아파 낳은 유령아이들을 그 주위에 거느린 채, 친절한 부모처럼 인자한 웃음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허깨비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마음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자신이 깨달았노라고 덩실덩실 도취의 춤을 펼치곤 한다. 그러한 그가 숲에서 가장 유령 같아 보인다. 분명하게 가장 외로워 보인다.


지겨워도 나는 다시 한 번 쓰고 싶다.


마음은 생각이 아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마음이 아니며, 언제나 자신이 만든 생각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만 싸우고 있다. 또한 우리 안에 서로 상반되는 여러 마음이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다 생각들이다. 생각들을 통합하든 변증법적 구조를 이루든, 생각에 대한 그 모든 일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 인형놀이일 따름이다.


생각을 마음이라고 착각하며, 심지어 그것을 아이의 속성으로 보며, 자기가 마치 보채는 모든 아이의 의견을 평등하게 존중해주고 그들의 모든 소망을 소외없이 다 들어준다는 방식으로 가장 아이를 잘 돌보는 좋은 마음의 부모인 것처럼 살려는 일은 영원한 고통일 것이다. 비인간적이며, 심대하게 반인간적이다. 심지어 이 모든 일과 실제의 마음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마음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유령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던 이들이 이를 갈며 철저하게 부정하고자 한 바로 그것, 현재의 자신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무리 만들어내어 부정하려 해봤자 도무지 부정될 수 없이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 존재다.


마음은 생각이 아니고, 아이가 아니며, 유령이 아니고, 존재현상이다. 그리고 존재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앞서는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존재를 다만 뒤따르는 일이다. 생각은 존재를 뒤따르는 이 일에 봉사할 때만 유일하게 가치있다. 유령 같은 생각이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끌려고 할 때 그것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난다. 하이데거도 선불교도 이러한 사실을 한참이나 말해왔다.


소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상실한 현상이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보충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령으로 존재를 보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표현 그대로의 정신병이다. 외로움이란 소외된 감각, 바로 그것이다. 외로움을 경험하는 이는 지금 다른 이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존재는 부정하기를 지속한 채, 자기의 생각들을 더욱 붙잡으며 생각의 소꿉놀이를 통해 자기가 무엇인가 놀라운 것을 체험해서 이루었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이 아마도 현대병일 것이다.


총체적으로 유령에게 홀린 상태와 같다. 다시 말해 유령제조업은 유령에게 홀린 상태의 총체다.


한 개인의 마음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만들어낸 유령 같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유령제조업을 폐업하고 이제 존재를 뒤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전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뒤집어 쓴 하얀 천을 벗으면 자유롭고 이제 외롭지 않을 것이다. 주위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들과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 현재에 살아 있어 생생한 풍경이고, 무척 사랑스럽다. 존재의 마음을 따라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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