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39

"왕자병의 끝은 어디인가"

by 깨닫는마음씨




왕자병은 나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정상적인 발달과정에서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겪는다면 반드시 일별하게 되는 것이다. 자매품인 공주병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 병들이 지속된다면 우리가 의심해야 할 것은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나는 분명 이것이 부권의 상실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본다. 이유는 단순하다. 왕자병은 사실 대단히 쉬운 방식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자병을 앓는 이의 아버지가 이렇게만 말하면 된다.


"나는 왕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아버지는 이 말을 할 기회조차 갖지 못할 만큼 이미 권위를 상실해 있다. 자식에게는 거의 처음부터 권위를 잃어 있다. 모성이 여신처럼 그 권위를 대신한다. 그러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것은 왕자병이 불치병이 아니던 시절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자식은 일종의 하인인 아버지가 열심히 노력해서 왕의 권위를 획득하기를 바란다. 물론 그 심사위원은 어머니다. 그가 섬기는 여신을 가장 만족시킬 수 있는 기사왕의 풍모가 아버지에게는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이상 아버지가 "나는 왕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오히려 자식은 그 말을 들으면 화가 난다. 왜 더 노력해서 왕이 될 생각을 안하고 한심한 소리나 하는지 '쯧쯧, 참 불쌍하고 안타까운 양반.'이라는 생각만 든다. 자기도 당당한 여신일가의 일원으로서 왕자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경건하게 노력하고 있는데,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알 수 없는 군상이다.


이처럼 아버지에 의해 쉬이 깨질 기회를 상실하게 된 왕자병은 이제 아주 멀리 돌아간다. 물론 자신이 왕자병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또 주변에 "이 새끼, 존나 왕자병이네."라고 말해줄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상황은 희망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자각이 없다면 곁에 그런 친구가 이미 없고, 그런 친구가 없다면 자각도 매우 어려운 법이다.


대체로 왕자병은 남들 앞에서는 큰소리로 말하지는 못해도 자기가 정말로 좀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기초적인 증상이다. 그 표정에서부터 진심으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여기에서 연장되어, 왕자병은 자기가 남들보다 실은 더 개성적이며 자기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옷을 잘 입는다고도 생각한다. 90년대 HOT나 투투 같은 바지를 입으며 그렇게 생각한다. 나아가 이제는 분명하게도 자기가 상당히 머리가 좋은 인물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한다. 조금 더 내디디면, 자기는 영적으로 특별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간주하기도 한다.


왕자병의 공식적인 명칭이 자아팽창이라는 사실은 잠시 언급해두고 싶다. 나는 자아팽창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행사되는 방식에서 어떤 비겁함을 본다. 팽창에 대한 어떤 것에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하다. 왕자병이 자기를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 상대적 기준선은 언제나 대중에 대해서다. 대중보다는 자기가 똑똑하고 개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자병이 자기의 위에 안전망으로 설정해놓은 기준선은 전문가다.


즉, 왕자병은 대중과 전문가 사이에 위치하며 양쪽에서 최대치의 이득만을 얻으려 한다. 전문가의 언행을 모방해 대중에게 잘난 척을 하며, 대중에게 비난될 위기에 처하면 전문가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반대로 전문가에게 향해질 자원을 자신이 중간에서 대신 가로채며, 전문가에게 비판받을 위기에 처하면 자기는 알알이 보석처럼 빛나는 대중들의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긴다고 민족의 역군 행세를 하며 대중을 핑계로 삼는다. 그렇게 자기만은 늘 좋은 사람이며, 어떤 방식으로라도 잘난 사람이다. 왕자의 품위를 잃지 않는다. 늘 남탓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정말로 섬세하게 쓰고 싶다. 여기에서부터가 이제 왕자병의 본격적인 심화증세인 까닭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둘까 싶다. 왕자병의 심화증세는 오히려 그 주체가 왕자병을 자각하고 거기에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인 것처럼 펼쳐진다.


왕자는 그동안 남탓만 하고 남을 핑계로 삼아서만 살아온 삶에 문득 수치스러워진다. 자신이 너무 어린아이 같다. 이제는 당당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다가 왕자는 결국 자신의 마음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확히는 마음을 대하는 자신의 유치한 태도가 문제였다는 것을 자각하는 모습을 취한다. 왜 자신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남에게 그 책임을 돌려왔을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 마음은 내가 책임지고 싶다.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길이라 하더라도. 왕자는 결심한다.


어찌 보면, 자기는 지금껏 AI처럼만 살았다. 삶에 중심이 없었다. 알고리즘에 따라 편한 마음만 취하고 불편한 마음은 소외시키려 해왔다. 편식하는 어린아이와 똑같았다. 이제는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체로 서고 싶다. NPC에서 벗어나 아무리 작고 초라한 모습이더라도 한 사람의 플레이어가 되어 부끄러울 일 없이 당당하게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소외시켜왔던 그 마음들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의지어린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쥔다.


그래, 밀려들어온다. 이 슬픔, 이 외로움, 이 수치심, 이 분노, 이 죄책감, 무겁다. 마음이란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던가. 이렇게 실감나고 그 통증만큼 존재감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었던가. 묵직하다. 그동안 도망다니고 회피하려고만 했던 책임의 무게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 알 것 같다. 이 가슴을 채우는 묵직함이 나의 든든한 중심이 되어간다. 이런 것이었던가. 내가 지금껏 중심없이 흔들리는 AI 같았던 것은 마음을 나의 것으로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구나.


이제는 이 마음들, 내가 다 짊어질 것이다. 내가 다 받아들일 것이다. 내 마음이다. 괴롭다. 힘들다. 몸이 떨린다. 숨이 버겁다. 그러나 내 마음이다. 내가 사랑해야만 했던 바로 내 마음이다! 이제야 만났구나. 이제야 다시 찾았구나. 나는 인간이다. 이 뿌듯한 내 마음의 무게를 가슴속에서 느끼며, 그렇게 내 마음의 소중함을 실감하며 저 거친 지평선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아아, 이것이 자아라는 것이었구나. 나는 지금 자아를 얻었다. 몽유병 같은 부유에서 벗어나 명확한 내 자신이 되었다. AI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얻었다. 한 명의 당당한 인간이 되었다. 말려 들어온 것은 나만의 마음이 아니었다. 모두에게서 온 마음이다. 모든 인간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자아의 주체성은 관계의 연대로 수육되었다. 그래, 이것은 당신들의 슬픔, 당신들의 외로움, 당신들의 수치심, 당신들의 분노, 당신들의 죄책감, 내가 이 인간의 마음을 기꺼이 짊어질 것이다. 내 소중한 이들의 무게를, 그 크고 벅찬 실감을, 이 가슴에 묵직하게 담고서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아바마마,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의 길이라는 것이었군요. 왕이 된다는 것은 이 몸으로 마음의 고통들을 다 받아서 그것들이 실은 얼마나 귀하고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알아주며, 그렇게 온전해진 마음들과 함께 마음에 대한 억압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었군요. 그래, 이제 내가 간다. 왕의 귀환이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섬세하게 묘사했는가. 이것은 아주 돌아가는 길에 대한 묘사. 왕이 됨으로써 왕자병을 끝내고자 하는 길이다. 왕이 되어주지 못한 아버지 대신에, 자기가 마음에 대한 권위를 가진 마음의 아버지 같은 왕이 되고자 하는 길이다. 정당한 왕이 되어 철없는 왕자병을 극복한 것처럼 연출해보려 하지만, 실은 가장 왕자병의 심화증세를 알리고 있는 바로 그 길이다.


왕좌의 게임 같은 판타지 영주물이나 무협판타지 등을 보고 자란 이들이 이 영원히 돌아가는 길로 자주 가게 된다. 그 대사나 전개가 지극히 전형적이다. 왕좌의 게임을 노골적으로 참조해 만들어진 요즘 파이널 판타지 16 같은 게임의 경우에는 아예 위에서 묘사한 것과 똑같은 대사를 주인공이 발화하곤 한다. 게임에서는 왕인 아버지를 잃고 왕국을 잃은 주인공이 그동안 자신을 괴롭게 하던 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얼마나 늠름한 왕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지를 묘사해간다.


물론 이러한 소설과 게임, 영화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재미있는 스토리며, 멋진 대사다. 그러나 이러한 스토리에 심취한 왕자병들이 이 스토리를 자기가 왕이 될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허구의 것에 사실의 것을 끼워맞추려는 일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 일은 왕이 되는 일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정신승리를 이루는 것뿐이다. 게다가 그 정신승리의 방식은 대단히 이상심리학적이다.


모든 이에게는 다들 그러한 경험이 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갑자기 의식이 전환되며 몸도 편해지고 큰 이완감이 밀려옴으로써 이 모든 것이 왠지 온전하고 기꺼이 살 만한 감동으로 느껴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자신이 이러한 상태여도 되었던 것이구나, 하며 마치 자기가 신성한 어떤 것으로부터 허용된 것처럼, 또 이제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겠구나, 라고 감격스레 생각하게도 된다. 무엇인가 아주 큰 레벨업을 이룬 것 같으며, 아주 큰 장애물을 자신이 극복한 것만 같다.


너무 큰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뇌가 지금 화학물질을 분비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러너스 하이와 전적으로 동일한 현상이다. 마약을 경험한 것과도 같다. 그리고는 그 마약기운에 도취되어 자신이 이제 유치한 왕자를 초월하여 성숙한 왕이 된 줄 아는 것이다. 마약기운을 통해 자기를 왕처럼 경험하려는 이 방식은 분명히 이상심리학적이다.


나아가 이것은 마음에 대한 어떤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성군의 상태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무수한 자기고문자이자 자기쾌락자인 이들의 상태와 같이, 자신의 의지어린 생각으로 감각 및 감정을 지배하고자 하는 상태다. 다만 그 지배가 마음을 자기의 몸으로 받아 알아준다는 식으로 '부드럽게' 행사되는 것처럼만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든 그렇지 않든 지배는 똑같은 지배다.


또한 이것은 주체성을 가진 자유로운 자아가 출현한 순간도 아니고, 단지 자아가 팽창한 순간일 뿐이다. 자아가 믿고자 하는 궁극의 환상은 주체성이다. 그러나 자아는 결코 주체적일 수 없다. 애초 자아의 주체성이라는 말 자체가 착각이다. 이 말은 정신분석이 더 많이 한다. 자아는 타자의 욕망에 의존해서만이 자아다. 주체성은 자아의 망상에 불과하다. 팽창한 자아가 그러한 망상을 한다.


더욱 통속적인 판타지들의 스토리에서는, 나만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나의 소중한 자아로 나를 억압하는 신과 싸우리라, 라며 수염기른 검사가 대검을 휘두르곤 한다. 인간을 자아가 없는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신의 압제에 맞서, 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렇기에 이 소중한 마음의 무게를 가슴에 담고서 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보여주겠다며 검사가 또 다른 신적인 존재로 변신도 한다. 사악한 폭군을 넘어선 진정한 만물의 왕이 된 것이다.


아주 전형적인 알고리즘이다. 이것은 AI를 벗어난 길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이 길 자체가 가장 AI의 길이다.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벗어나 왕자병을 지속하는 가장 아이의 길이다.


이런 것을 실존주의라고 말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나는 거의 토하는 줄 알았다. 실존주의가 언제부터 자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도가니탕 속에서 결국에는 아버지를 한참 초월한 왕의 모습이 되어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침드라마가 되었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영영 알고 싶지 않다.


왕자병이 전시한 자아팽창의 수준을 목격해야 하는 일은 마치 8월 한 달간 씻지 않은 비만의 동성친구에게 자기 뱃살 좀 만져보라고 강요받는 기분이다. 나는 모르고 싶고, 나는 살고 싶다.


내가 얼마나 숲으로 향하고 싶어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왕자병임을 지적받아 바로 끝내는 길 대신, 또 왕이 되어 왕자병을 끝내려고 아주 멀리 돌아가지만 실은 영영 끝내지도 못하는 길 대신, 나는 결국 제3의 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통속적인 책을 따라 살지 말고, 숲에 가서 나무에 기대 책을 많이 보면 어떠한가. 좋은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만 끝내는 것은 또한 어떠한가.


이야기를 이야기로만 기쁘게 향유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자신의 삶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그 경계다. 이상심리학은 언제나 경계가 흐려진 문제다. 경계가 분명해진 이는 오히려 경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다. 자기가 잘생겼는지 또는 못생겼는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며 살지 않는다. 양쪽의 기준점들 사이에서 최대치의 잘난 이로 보이려는 줄타기를 하지 않는다. 왜인가?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잘생겼고,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못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 그 외적인 평가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 수천의 왕국을 통일한 패왕이 되어도 누군가는 거지로 볼 것이고, 거지처럼 살아도 누군가는 왕자처럼 볼 것이다. 아빠엄마는 아마도 그럴 것이다.


자기의 아빠엄마에게만 왕자면 인생의 한 때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인가. 병신이지만 아빠에게는 왕자이니까 유산도 물려주고 그런다. 아빠를 왕 대접도 안하면서 억지로 혼자 왕자를 성립시키려는 일을 우리는 이제 왕자병이라고 부를 것이다. 숲에서 책이나 볼 수 있는 일이 왜 가능한지를 떠올려보면 왕자병의 끝은 머지 않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지만, 나는 왕자처럼 만들어주려고 한 모순을 살다간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었다. 여느 아버지와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중 하나였고, 나에게만 그랬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다 충분했다. 가슴에 그런 아버지의 무게를 담고 있지 않다. 아버지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묵직하게 나만의 길을 가고 있지 않다.


아버지는 내가 짐 따위 짊어지고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그 경계가 분명한 까닭이다. 모든 아버지가 "나는 왕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제 왕자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더욱 커다란 것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너는 자유다." 그래서 나는 숲에서 쓸데없이 이런 글이나 쓰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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