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상담소를 만들어보자 #19

"열아홉째 날"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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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에서부터 절반 정도 가린 발을 지나 슬라이딩 도어를 밀고 들어서면 드디어 화장실 내부에 진입한다. 마지막 나무문이 남았다. 위생기는 코앞이다. 긴 여정이었지만 드디어 보낼 것을 잘 보낼 수 있다.


사라질 것은 살아진 것이다.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것을 정말로 잘 살았다는 증거다. 이렇게 사라지는 것들은 미련과 후회로 매달려 있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사라질 것을 억지로 자기 안에 붙잡아두며, 이것은 자기 것이라고, 이제야 다시 찾은 소중한 것이라고, 나의 것이 이렇게 꽉 차있어 아주 든든한 나의 존재감이 확보된다며 그 배출을 반려하곤 한다.


나는 변비에 대해 이렇게 애절하고 절박한 묘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심리적 변비를 갖고 있는 이들은 완벽주의적 성향을 갖는다. 자기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며 순도 100%의 무오성을 주장하고, 늘 자기를 합리화하는 데 갖은 깔끔을 떤다. 자기는 그렇게 늘 선하고 우아한 척만 하나 실제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우렁찬 배설을 하고 도주해온 후다. 프로이트가 묘사한 항문기에 고착된 성격의 특징일 것이다.


똥은 남의 집에, 꽃은 우리 집에. 그렇게 잘못 배웠을 수도 있다. 심리적 배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렇게 잘못 배운다.


그러나 꽃을 키우는 것은 똥이다.


잘 사라진 것이 잘 살아질 것이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은 이제는 너무 형식화되어 감동이 사라진 말이다. 감동이 사라지니 곡해도 생겨난다. 그 말을 들으면 무엇을 비워야 하는가를 우리는 묻곤 한다. 화장실 위생기에 앉아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안심스테이크는 오랜만에 먹었으니 조금 더 남겨두고 양배추만 먼저 처리하자고 몸이 일하지는 않는다.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창시자이자 선사이기도 했던 펄스는 『통째로 버려라』라고 그의 자서전 제목을 정했다. 이것은 절에서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부르는 그 의미다. 우리는 선별해서 근심만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통째로 버리는 것이다.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필요는 없다. 초가삼간을 통째로 버리고 자신이 나가면 된다. 그러면 먹을 것이 없어진 빈대들도 사라질 것이다.


줄행랑은 분명 36계의 정당한 계책 중 하나다. 그것은 '전략적 철수'다. 심리상담에서는 타임아웃이라는 기법으로 말한다.


나는 화장실이 분명 이 '전략적 철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장님에게 이유없이 갈굼을 당한 뒤에는 잠시 화장실로 향한다. 엄마에게 야동을 보는 모습을 들킨 뒤에도 조용히 화장실로 향한다. 침대 위에 누워 삶이 왠지 무료하고 공허하게 경험되면 또 화장실로 향한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철수해 태세를 가다듬을 수 있는 쉼표의 공간이 바로 화장실인 것이다. 그렇게 화장실은 너무나 일상적인 구조물이지만 동시에 일상적 세간의 근심을 끊어내는 가장 비일상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화장실 좋고 이쁘다는 말이다.


위생기로의 진입까지는 3개의 관문을 거쳐야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세상이 쫓아오려고 해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관문들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심이 된다. 삼국지의 관우처럼 라면이 식기 전에 관문들을 넘어 추격해오겠다고 하는 세상이 있다면 세상도 출입금지를 시킬 것이다.


정말로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원래 상담자의 임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없이 안심하고 통째로 버릴 수 있도록 돕는다. 상담소에서 나갈 때 내담자들은 다들 꽃 한 송이씩은 들고 나온다. 상담자가 준 것이 아니다. 잘 사라져서 그 즉시 잘 살아지게 된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거울을 슬쩍 볼 때 비치는 그 표정이다. 조금 더 미남미녀가 된 것 같고 그 얼굴이 밝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나는 상담자는 화장실의 파수꾼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내담자가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큰 일을 하고 계시는 동안, 상담자는 허튼 세상이 방해하지 않도록 멀찍이서 그 문앞을 지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꽃이 정말 예쁘네요."


세상에 없었다면 이제는 있어야 할 상담소다.


열아홉째 날, 위생기에 직접 앉아 바라본 문의 뒤편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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