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몸에 관한 것이 삶이다. 나는 이 말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대하는 태도가 곧 삶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맺고 있는 관계성이 곧 삶이다.
자신이 아무리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호소하고, 획책하고, 유도하고, 조작해봤자 삶은 속일 수 없다. 삶을 속이려 할 때 생겨나는 것을 심리적 문제라고 말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이며, 모든 심리적 문제는 이 속성을 갖는다.
나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을 얼마나 많이 인용했던가. 질리지도 않고 또 한다. "나는 몸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메를로퐁티는 몸을 세계와 연결짓고자 했고, 앙리는 몸을 삶 그 자체와 연결짓고자 했으며, 이것은 신체현상학이다. 핵심은 결국 몸은 어떤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단 하나만 제대로 몰라야 한다면 바로 몸을 몰라야 하리라. 몸이야말로 신비다.
자신의 몸이 소외되어 있는 것이 거의 모든 심리상담의 주제라고 내가 말하면 "아 몸과 마음이 함께 통합적으로 건강해야 하는구나. 그동안 내 몸을 잘 못챙겼네. 이제 내 몸을 아껴주며 몸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겠다."라고 사람들이 말하곤 하는 장면들을 나는 무수히 보아왔다. 나는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몸을 대상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또 "이 몸으로 마음들을 다 수용해서 온전하게 만들어주리라."라고 하는 말도 많이 들어왔다. 또한 나는 "괴로워도 그 마음을 가슴에 넣은 채 꾹 품고 가만히 있으면 마음에 대해 다 알게 되면서 지복의 상태가 찾아온다."라는 말도 제법 들어왔다. "이 몸은 모든 마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거주하는 곳."이라는 말도 상당히 들었던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몸을 도구로 남용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라고 나는 이어 말하기도 했지만, 듣는 귀는 없었다.
자기의 정신적 생각이 몸보다 더 높은 것이라는 이 고집을 나는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계속 꺾으려 했다면 나는 아마도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보다는 왜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는가를 묻고 있던 나는 천상 심리학자였다.
나는 자기의 생각을 자기의 정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는 이 상태가 이미 분열된 출발점이라고 이해한다. 생각은 몸에서부터 나오지 않는다. 생각은 오히려 몸과 가장 분리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발생한다. 그러니 생각은 가장 몸과 거리가 먼 것이며, 몸을 가장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자기의 정신 그 자체라고 믿고 있는 이는 그러니 몸으로부터 괴리되며, 삶으로부터 괴리된다.
결국 그 출발점은 무엇인가. 결과의 지점과 동일하다.
자기의 몸을 현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모든 심리적 문제의 이유다. 죽음과 시간의 문제도 이와 같다. 존재의 시간이란 결국 몸의 시간이다. 지금의 자기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이 모든 것에 대한 소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자기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일수록, 자신이 그 몸으로 소외된 마음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자신을 소외된 것들의 구원자처럼 입지화함으로써 가장 첫 번째의 소외를 무시하려는 의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경우 몸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도구로 전락한다. 구원자가 구원자로서의 자기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남용할 뿐인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구원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나는 이것이 자기의 생각과 동일시된 상태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모든 생각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생각이며, 그 생각을 자기로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더 중요한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생각은 가상의 몸이다. 자기의 몸을 거부하는 이들이 허구의 언어로 만들어낸 대체품으로서의 가상신체다. 차라리 유치하게나마 토니 스타크가 갈아입는 다양한 아이언맨 수트들을 떠올려본다면 이해는 한결 수월해진다. 그래서 생각에 동일시되는 작용은 더 우월한 생각으로 끝없이 자기의 몸을 바꾸어가는 과정을 거듭한다. 뭔가 어려워보이는 책을 읽거나, 또는 더 빈번하게는 그 어려운 책을 누군가가 쉬운 말로 정리해주면, 바로 그렇게 획득된 생각을 이제 자기의 몸으로 삼는다. 남들 앞에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라는 가상신체로 사는 모습이다.
이러한 생각의 몸 중에서 결국에는 가장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은, 다른 모든 생각을 구원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구원자는 언제나 피구원자보다 우세한 힘과 권위를 갖고 있다고 가정되기에, 이러한 메시아적 성격의 생각은 결국 다른 모든 생각 위에 설 수 있는 궁극의 생각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자기의 정신적 생각이 자기라고 믿는 이는 사람들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니 모든 생각을 구원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그에게는 결국 다른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자기의 모습이다. 이것은 분명 메시아 콤플렉스의 구조이며, 자기의 몸을 부정하는 이들이 종국에는 도달하게 되는 그 형상이다.
나는 메시아 콤플렉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군상이 바로 일진깡패라고 생각한다. 느와르 영화는 분명 그러한 주제를 다룬다. 이것은 언제나 몸에 대한 폭력의 표현이다. 하나의 몸으로 다른 몸에 폭력을 가하며, 상대를 생각대로 제압할 더 크고 강한 몸을 갖지 못한 비애감을 묘사한다. 이 경우 '생각대로'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이 몸대로'라는 표현과 동일시된다. 생각은 정말로 가상의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더 재미있는 말을 전할 수도 있다. 선량하고 부드럽게 마음을 대하는 것의 가치를 말하는 이가 있다. 어떤 마음이든지 간에 유한 태도로 알아주고 또 받아주면 그 마음이 스스로 깨어나게 된다고 주장하는 이것은 실은 마음에 대한 조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조련법을 말하는 방식은 마치 아이를 어르듯이 조곤조곤 설명하는 방식이다.
왜 조련하려 하는가? 자기의 몸이 그것보다 작고 약하다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보다 크고 강한 것을 자기의 생각대로 하려면 자기의 정신적 생각이라는 가상의 몸을 우월하게 꾸밈으로써 상대를 따르게 해야 한다. 그렇게 정신적 가치는 예찬되며, 심지어 심리학의 놀라운 비밀 등의 이름으로 이 예찬의 방식은 변주된다.
만약 이 조련자가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했다면 결코 이러한 '유한' 방식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의 목에 초크슬램을 걸며 그냥 내 생각대로 따르라고 이미 말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자기가 정말로 꿈꾸고 있는 것을 소외하고 있는 모습이다. 실은 일진깡패가 되고 싶으면서 자기의 몸이 그 소망을 이루기에는 적합하지 않기에, 이를 억압하고 소외한 채 그 반대로 선량한 유함의 가치를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신포도의 우화다.
조금은 산만하지만 나는 거의 핵심에 근접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몸을 부정하는 이들은 결국 자기의 몸이 모든 것을 자기의 생각대로[그 몸대로] 할 수 없는 작고, 약하고, 못나고, 힘없는 몸인 것 같기에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이 진정한 자기의 몸처럼 믿고 싶은 것은 일진깡패의 몸이다. 그러나 그 몸이 자기에게는 없으니, 이들은 대신 생각이라고 하는 가상의 몸을 발명해내었다. 그러한 가상의 몸은 언제나 드래곤볼의 초사이어인 같은 형상일 것이다. 이들이 자기의 정신적 생각에 대단하게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그 정도만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이라고 하는 가상의 몸을 크고 강한 것처럼 설정한다 해도, 실제의 몸은 어디에 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은 늘 비위를 맞추며 조련해야 한다. 자기는 유한 것을 원래 좋아하니 이처럼 상냥한 것이라고 속여보고 싶지만, 실은 배알이 뒤틀린다. 자기의 실제 몸만 드웨인 존슨이었다면 인생이 달랐을텐데, 라며 괜히 부모도 원망되고, 확정적으로는 자기보다 더 좋은 몸을 갖고 있는 것 같은 이들을 열등한 것으로 말하게 된다. 나는 가상의 몸을 궁구하는 이들이 자기보다 실제적으로 더 크고 강한 몸을 가진 이들을 자기의 정신적 지위를 통해 아랫사람으로 두며 쾌감을 느끼는 모습도 빈번하게 목격해왔다. 이를테면, 엑스맨의 능력이 각각 무엇인지를 암기하지 못한다며, 그래가지고 어떻게 엑스맨의 놀라운 심리학적 비밀로 사람들을 깨우쳐줄 수 있겠냐고 선비처럼 타이르는 그 모습은 희극이었다.
자기의 생각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는 그 자체가 이미 희극이지만, 이것이 언제나 희극인 것만은 아니다. 비극으로 전환되는 시점은 결국 몸 대신에 돈이라는 결론을 얻을 때다. 실제적인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돈에 집착한다는 것은 거의 절대율처럼 작동한다. 느와르 영화도 끝내는 돈이다. 더 탁월한 생각으로 더 우수한 가상의 몸을 얻으려는 기획은 결국 조련사라는 한계로 드러나며,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추구되는 것이 돈이다. 몸의 힘보다도 돈의 힘은 더 강력하게 경험된다. 그러니 돈만 있으면 몸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돈에 대한 집착은 거의 종교에 가깝다. 돈은 초월의 도구이며, 일종의 수행기제다. 종교적 현상으로서의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어쩔 수 없이 이 현상은 가장 초월적 소재인 것처럼 우상화되어 있는 돈과는 정반대편에 놓인다. 더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깨달음은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로는 어떠한 수를 써도 당연히 성립되지 않는다. 어떠한 종교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도 결국 돈에 대한 집착의 문제로 평정된다. 깨달으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이니 당연히 많은 돈이 들어와야 하는 일이 당연하다는 판타지는 그저 그가 어떠한 종교체험으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유인 그 집착의 표현일 뿐이다.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도와 돈에 집착하는 정도는 진실로 비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돈이야말로 정말로 가장 대상화된 몸의 형상일 것이다. 생각은 그래도 실제의 몸과 어떠한 내재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돈은 실제의 몸과 철저하게 분리된 외부에서 몸에 영향력만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돈을 마침내 자기의 몸으로 삼으려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기의 몸을 완벽하게 떠나고 싶어하는 그 입장을 표명한 것과 같다. 최대의 자기증오자다.
자기증오자들이 돈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진정한 몸'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실제적인 자기의 몸은 이 진정한 몸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몸 안에 '진정한 자기'가 갇혀 있는 동안에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안되니 이들은 또한 충실한 도구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온갖 건강식품들을 사먹으며 거의 건강염려증의 수준으로 몸을 관리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몸을 상냥하게 돌보는 성숙한 존재라고도 간주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과잉행위를 통해 또 갈등의 구조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진정한 몸인 돈이 빨리 모여야 하는데, 이 더러운 몸을 관리하느라 더 많은 돈이 쓰인다. 거의 미칠 지경이다. 힘든 삶이다. 그래서 나는 글의 서두에서부터 말한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몸을 대하는 그 태도가 삶이라고.
자신의 몸을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 나는 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세계가 잃어버린 바로 그 마지막 퍼즐로 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몸에 대한 비유로 엄밀하게 정확한 비유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을 때 분명 환기되는 감수성이 있다. 나는 이것을 지금은 중요하게 취하고 싶다.
자기의 몸은 그 자체로 퍼즐의 조각이다. 세계가 필요로 하던 바로 그 조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세계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이다. 하워드 서먼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자기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생각이라는 가짜 몸을 만들어, 그 가짜 몸을 대신 세계에 끼우려고 한다. 당연히 맞지 않는 조각이니 한층 억지를 부려야 하고, 억지가 통하지 않으니 더욱 고집스러워진다. 나는 이러한 고집을 꺾는 일은 포기했다. 그래서 다만 하나의 감수성만을 환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자기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아 그 몸을 잃은 이는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도 그의 몸을 잃은 것이다. 세계와 조화롭게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갈 그 사랑스러운 몸을 잃어 세계도 그 삶이 힘들다.
내가 나답다는 것은 내가 이 몸이라는 의미다. 하나의 퍼즐조각은 그 조각의 몸이면서 동시에 전체퍼즐의 몸이다. 그러니 이 몸은 세계의 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에는 내가 나를 잃어 슬프다면 세계도 슬픈 것이다. 애초 끼울 수 없는 가짜의 것을 끼우려고 하면 슬픈 심리적 문제가 출현한다. 세계의 기쁨이어야 할 이 몸이 슬픔의 이유로 화한다.
그러나 나는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떠한 기쁨의 이유로서의 자기의 몸이 발견되어야 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자기의 그 어느 감정이라도 거부하지 말고 아무리 괴롭더라도 "이것이 내 마음이야."라고 느끼고 있으면 무슨 연금술의 항아리처럼 자기의 감정들을 황금과 같은 놀라운 것으로 변화시키고 있던 자기의 몸이 기쁘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몸에 대해 상냥한 것 같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자기의 정신적 생각을 그리고 돈을 가장 우월한 것으로 놓고 있다면, 그렇게 가상의 몸으로 실제의 몸을 상냥하게 대하고 있다면, 나는 이것이 바로 몸을 향한 교묘한 폭력이라고 다시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몸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말할 필요가 없다.
몸이 말할 것이다.
몸의 말이 바로 마음이다.
그것은 몸 안에서 무슨 가상인격체들이 말하는 소리가 아니다. 마음은 눈앞에서 삶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삶은 속일 수 없다. 삶을 펼쳐내는 마음은 세계의 말이기도 한 까닭이다.
칵테일파티 효과라고 들어보지 않았는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아무리 시끄러워도 알아들었다는 그 사실을 속일 수 없다. 그렇게 세계가 자신이 잃어버린 이 마지막 퍼즐을 부르고 있다. 나를 부르고 있다. 그에 관해 대답한다. 내가 바로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