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상담소를 만들어보자 #20

"스무째 날"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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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이 일상을 위협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심리적 수난도 있다. 울지 못한 눈물이 적체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한 번에 터져나온다. 그럴 때는 눈물로 나오지 않는다. 단지 모종의 파괴적 질량감을 가진 사태다. 화가 두렵다고 할 때 우리는 울지 못한 눈물에서 비롯한 이 치명적인 사태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남의 가슴에 눈물이 쌓이게 하면 결국에는 힘들어지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다. 그러나 가장 울지 못하는 이들이 또한 남의 가슴에도 눈물이 쌓이게 한다. 세상 모든 곳에서 눈물을 봉쇄하려 한다. 모든 것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자신 앞에서 흐르는 눈물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자유를 빼앗긴 이, 그것은 울 자유마저 빼앗긴 이이리라.


자유를 잃어 억압된 눈물은 격랑으로 돌아온다. 전부 파괴하고 그 자신도 사라지고자 한다. 심리적 수난의 결과다.


스스로 수난(受難)받고자 하여 생겨난 수난(水難)이다.


자신의 자유를 가장 뺏는 이는 언제나 자신뿐이다. 스스로에게 울음을 봉쇄한 것은 자신이다. 자신은 다 받아줌으로써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울면 안된다. 무너지면 안된다. 약해서 안쓰러운 것들을 온전함으로 다 받아주어야 한다. 이것이 수난받음이다. 심리적 수난은 언제나 이 수난받음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화는 결국 스스로가 수난받고자 해서 만들어진 자신의 화다. 울면 안된다고 참고 참다가 끝내는 상대를 오열하게 만들 그 파괴성은 이율배반적이라 자신도 더는 존재해선 안될 것 같다. 수난은 이처럼 주위의 모든 존재를 휩쓸어가려고 한다. 무로 돌리려 한다.


이와 같이 자신이 모든 존재를 다 받아준다는 수난자들은 실은 모든 존재의 부정자다. 그는 자신만이 부드럽고 너그러우며 의식의 수준이 높은 신격이어야 한다. 그런 모습이 되는 방법론을 곧잘 심리학이라고 부르곤 한다. 심리학은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인간의 일상을 파괴하는 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수난(水難)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지켜질 수 있기를 바랐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수난(受難)에 빠트리지 않기를 바랐다. 수난을 건너가는 배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일찍이 정한 바 '마음의 방주'였고 '심리학적 일상'이라는 부연을 달았다.


이것은 울음을 참으며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는 일상이 아니라, 그 어떤 수난도 괜찮지 않다고 마음놓고 울 수 있는 일상을 뜻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마음의 자유만은 결코 잃지 않을 그 희망이 담겨 있는 일상이다.


나뭇잎배도 희망을 싣고 수난의 세계를 건너가는가. 아니 오히려 수난 속에도 떠있는 나뭇잎배 자체가 희망이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희망이 될 그러한 심리학적 일상을 나는 분명 희망하고 있었다. 스무째 날, 나뭇잎배는 분명 그곳에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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