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42

"이 사람 내 마음 알고 있나"

by 깨닫는마음씨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출간물이나 시장에 내놓은 콘텐츠가 없어서가 아니다. 작가라는 것은 나에게 가장 위대한 이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소설가들, 시인들, 예술가들, 디자이너들, 음악인들(특히 포크뮤지션과 락커들), 내가 작가라고 보고 있는 이러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우주를 보여주었다. 어떤 거대한 것의 앞으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아무리 소소한 소재를 묘사하는 작가라도 그 의미는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의미는 언제나 우주 전체와 동일한 크기로 내 가슴을 꽉 채웠다. 그렇게 결국 작가들은 내 가슴의 크기가 우주만큼이라는 것을 나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사람 내 마음 알고 있나?"


나는 이것이 정직한 작가를 만났을 때 보이게 되는 대표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공감된다, 머리가 끄덕여지네요, 좋아요는 눌러드릴게, 정도의 반응이 아니다. 이러한 작가를 만나게 된 이는 그 자신이 몽땅 허물어진다. 그동안 간절히 지켜온 그 무엇이 산산이 무너져내린다.


이제는 더 지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이해받은 듯한 그 어떤 완성의 감각 속에 이제 놓여 있게 되어서다. 그리고 소망하게 된다. 나도 이런 작가가 될 수 있었으면.


나에게는 작가라는 것은 그러한 이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마음을 다 안다는 놀라운 마음의 해커마법사가 지어낸 게임메뉴얼이라든가, 다 똑같이 생긴 일진깡패 고딩들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분할하며 그 세력을 다투다가 제일 잘생긴(왠지 제작자 자신을 닮게 생긴) 전설의 착한 일진이 무림을 통일한다는 열등감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든가, 정치방송에서 자기가 살 대저택을 구입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꾸며낸 선동의 음모론 같은 것을 만드는 이들을 나는 차마 작가라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도저히 양치기소년을 작가라고 부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저 자기 이득을 위해 활동하는 거짓말쟁이며, 남들을 자기 대신 불행하게 만들고자 하는 거짓말쟁이다. 누구보다 그들 자신의 양심이 그 사실을 잘 안다. 작가는 양심적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필력보다도 작가의 기본조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이것은 모든 전문가의 기본이다. 진짜 요리사는 요리실력 이전에 먼저 재료의 위생상태를 속이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길게 하는 것은, 내가 꼰대인 것이 99%의 이유일 것이고, 나머지 1%는 오늘날 작가라는 것이 마치 한 번의 대박을 노리는 투자종목 같은 이름이 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나는 탑툰도 좋아한다. 돈과 인기가 필요하다면 그 노골적인 소망만큼 똑같이 노골적인 성인물 작가가 되는 일 또한 정직해서 멋진 일이다. 대중작가라고 해서 내가 그것을 작가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돈과 인기에 고착되어 있으면서 자기가 마치 신성한 예수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돈과 인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좋은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간절히 전하기 위해 자기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위장하려는 기만자들을 나는 싫어하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이 포르노테이프를 팔려고 하면서 자기는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양 고고하게 구는 그 모습만이 나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풀고 싶지 않은 문제다. 오히려 나는 이 불편함이 나의 양심과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풀어내야 할 것은 오히려 그 마음일 것이다.


나는 감히 내 자신에게 작가라는 이름을 쉽게 붙이지 않는 일이 내 양심에 준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작가라고 하는 것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연인의 자리에 놓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분명히 작가를 우상화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는 작가라고 하는 것을 정말로 사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라는 것이 경박하게 취급당하면 내 자신이 모독받는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누가 내 연인에게 가래침을 뱉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내 자신이 가래침을 맞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실은 작가와 내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나는 이미 작가로 보이고 있었다.


이미 그렇게 보이고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 또한 양심에 위배되는 것이다. 양심의 거울은 내외부를 함께 비춘다. 외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면 나는 천상 그것이다. 작가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나는 이미 그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양치기소년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작가로 보이기를 너무나 원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작가라고 불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바로 작가라며 사방이 시끄럽도록 큰소리로 울부짖고 또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양치기소년들도 나만큼이나 작가라고 하는 것을 크고 중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은 작가를 어떻게 얻는지 그 방법론을 몰라 헤맸고, 그러다가 지쳐 종국에는 양심을 위배해서라도 가고자 하는 숏컷을 꿈꾸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은 영영 작가를 잃은 것과 같다. 작가의 빛은 양심의 빛 그 자체인 까닭이다. 그 양심의 빛은 정직하게 마음을 비추는 작용을 통해 마음을 그 어떤 스토리의 주박에서도 해방시킨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우주의 것으로 분명하게 기억하도록 돕는다. 마치 우주만큼 깊은 연인의 눈빛처럼.


떠올려보면 나는 내가 사랑한 작가들이 만든 임의적인 스토리에 반했던 적이 없다. 스토리는 언제나 나에게 졸린 것이었다. 그보다 나는 그 빛나는 묘사들에 반했다. 하나의 일상을 어쩌면 이렇게도 신비한 빛으로 가득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는지 나는 작가들의 감수성이 늘 놀라웠다. 같은 세상인데도 그들은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삶에는 깊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 눈치챘던 것이리라.


섬세하게 잘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잘 관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늘 내 문장력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지금도 그렇다. 더 짧게 함축하고 싶은데 늘 질질 늘어쓰게 된다. 비슷한 단어들도 반복되며 어휘력도 풍부하지 않다. 아주 많은 순간 순수한 묘사력의 한계를 느끼곤 한다. 그러나 나는 관찰력에 대해서만은 자신한다. 내가 정말로 좋은 상담자인 이유이기도 하다. 잘 관찰하기에 부족한 묘사력을 보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쓰려다가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잘 관찰하기에 어떤 언어도 그것을 충분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결국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늘 글을 쓰며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강의를 할 때나 상담을 할 때면 사람들은 나에게, 마음에 관해 부르는 정말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자주 들려주곤 했다. 내 강의는 어떤 지식전달의 장이 아니라 선율이 흐르는 공연장에 가까웠다. 심지어는 준비된 악보도 없었다. 늘 실시간으로 새로운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즉흥의 잼연주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제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분명 음유시인이었다.


시인은 작은 것에서 우주를 발견하는 이들이다. 작은 것에서 그 우주의 신비를 길어올리는 이들이다. 나는 글감이 막혀본 적이 실은 없다. 잠깐 산책만 나가도 글감이 밀려온다. 나는 정말로 작은 것에 진심으로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작은 것에 대한 그 우주적 감동을 묘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나는 정말로 엄청 외롭게 살아왔다.


그래서 내 곁에 잠깐 머무는 작은 어떤 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벤치에 머물다 간 방아깨비도, 고양이도, 하얀 꽃잎들도, 내 곁에 잠시 있어준 것만으로 나는 고마웠다.


어떤 것이 내 곁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기적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더 가까이 바라보고, 기적을 보는 마음으로 더 신비롭게 바라봤다.


나는 내 주위의 것들에 정말로 관심을 갖는 일을 나도 모르게 성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상담자 훈련에서 한 10년은 수행해야 할 과제를 자연스레 달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칼 로저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담자 중의 상담자라고 불리는 로저스는 그의 상담의 모든 역량은 자신의 외로움에서 비롯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정확하게 안다. 로저스의 그 말을 책에서 읽었을 때 나는 분명 그렇게 경험했다. "이 사람 내 마음 알고 있나?"


양심은 정직한 관심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그것은 힘이다. 그러니 양심의 힘으로 말미암아 작가라고 하는 것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양심의 힘을 '관찰력'이라고 말해본다면, 그것은 동시에 '정직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이 정직력이 증대되는 법을 정말로 잘 안다. 외로움이 정직력을 키운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집에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고 뒹굴면서 "아잉, 외로워. 뭐 재미있는 일 없나. 누가 나랑 놀아줄 사람 없나. 심심한데 거짓말이나 해서 사람들 좀 모아볼까."라는 반응양식을 뜻하지 않는다. 외로움은 먼저 외로움 그 자신에 정직함을 요한다. 우리가 실은 외로워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차라리 이러한 이해는 좋다. 정의, 진리, 이득의 성취, 자기실현, 선한 영향력, 무슨 깨달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런 것은 없다. 그냥 외로워서다. 외로운데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한다.


무슨 일을 해도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이해한 이는 더는 도망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차라리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공원벤치에, 강둑에, 밤거리의 보도블럭 위에 앉을 것이다. 나는 왠지 알 것 같다. 그는 이제 시인이다.


시인은 남들이 못보는 것을 보는 이가 아니다. 남들이 안보는 것을 보는 이다.


그러한 그는 그 자신에게 먼저 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자신이 가장 안보려 했던 외로움을 이제 보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보려 하고 있는 다른 모든 것도 그의 눈에 비친다. 영롱한 것은 그것들의 빛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인의 눈빛이다. 아아, 내가 사랑했던 작가들은 이러한 이들이 아니었겠는가. 나는 그들의 눈빛을 정말 사랑했다. 그 눈빛 속에는 언제나 내가 안보려 했던 내 마음이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내 마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얼마 전에 'authenticator'라는 표현을 들었다. 나는 이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정직한 증언자'의 의미다. 상담자라는 이름 대신에, 또 작가라는 이름 대신에 자주 쓰고 싶은 표현이다. '양심가' 또는 '정직가'라고도 번역해보면 어떨까. 나는 우리가 다 이 authenticator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글쓰는 능력을 하늘에서 재능으로 받지 않았다. 챗GPT가 더 잘하는 것을 하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이와 똑같이, 다만 나는 외로워할 줄 아는 능력과, 그래서 내 주위의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능력과, 그것들에 정성스럽게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능력을 받았다. 나는 곧 정직할 줄 아는 선물을 받은 것이다. 나는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인이 되는 것은 누구나의 인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시인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이며, 그렇게 그가 받은 선물 그대로의 모습으로 정직하고 싶어하는 이다.


나는 내가 지금 무슨 글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 내 마음 알고 있나?"라고 느끼게 될 어떤 신비한 인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전하고 있는 것이 그와 완전히 같은 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은 정직한 독자를 만났을 때의 그 반응이었다. 마침내 우리가 우주처럼 만나게 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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