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째 날"
현관의 나무문은 안쪽으로 열릴 것이다. 문의 창살 사이로 덩굴식물을 늘어뜨리며, 문의 양편에는 고전적인 디자인의 벽등을 달 예정이다. 물론 벽등에도 식물들이 휘감길 것이다.
어느 정도는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놓아두면 나는 또 문명을 파괴할 것이다.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식물의 이미지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버려진 놀이동산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북서울 꿈의 숲이 조성되기 전 그 자리에 드림랜드가 멈추어 있던 시공간을 나는 자주 찾았다. 녹슨 철과 빛바랜 페인트는 초록의 식물들과 결코 대립하고 있지 않았다. 아빠의 손을 잡고 드림랜드를 찾았던 어린 시절처럼 나는 웃었다. 작동이 멈춘 놀이기구의 트랙 위를 홀로 걸으며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아이였고, 그때의 환한 미소였다. 예전과 똑같이 분명 어떠한 신비를 반갑게 만나고 있던 얼굴이었다.
어린이대공원도 그런 경계에 서있다. 그 옆에 있는, 과거의 어린이회관을 나는 조금 더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도 나는 그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를 어떻게 묘사할까. 망해가는 냄새라고 해야 할까. 예전의 이대 정문쪽 잔디밭이나, 서강대 후문쪽 잔디밭에도 그런 냄새가 났다.
내가 망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생명활동이 멈추어간다는 식의 어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망해가는 그 냄새 속에서 나는 가장 왕성한 생명활동을 느낀다. 나는 멸망의 징조를 자학적인 허무주의의 쾌락으로 소비하며 그에 도취되는 데카당스가 아니다. 망해가는 냄새 속에서 내가 보는 것은 오히려 헤밍웨이적인 것이다. 불굴의 희망이다. 망해도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신비의 빛이다.
내가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사회적 성공이라는 것을 가져보지 못한 것은 거의 언제나 스스로 그것을 무너뜨렸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그런 성공보다 더 큰 것을 얻고 싶었다. 자존심 따위를 지키려 했던 것이 아니다. 언제나 내가 원한 것은 빛이다. 빛나는 미소다. 신비 앞에 서서 그 신비를 향해 걸어가는 인간의 얼굴이다.
나에게 돈이 아주 많다면 큰 부지를 구입해서 아예 거기에 버려진 놀이동산을 짓고 싶다. 실은 그 본질은 식물원일 것이다. 작동이 멈춘 바이킹 안에 무성하게 벚나무를 심고, 쓰러진 목마들 사이로 꽃이 가득 피어나있는 화단을 조성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산 것들을 위한 위로이고, 그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며, 또 새로운 세상을 다시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약속이다.
그러기 위해 현관의 나무문에서 망해가는 냄새를 적당한 어느 정도만큼이나 풍길지를 생각하고 있던 중이다. 나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공정하게 다시 쓰자면 그것은 희망의 냄새다. 희망은 신비의 다른 이름이다. 긴 여행의 끝에 이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맞이하는 위로이고, 다짐이며, 약속이다.
결국 내가 지향하는 것은 디테일이다. 그리고 디테일이야말로 희망이다.
뒤집어 말해도 좋으리라. 희망은 디테일이다.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이다. 그러지 않고 막연한 것은 희망이 아니다.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식물들은 그 디테일이 생생하다. 그래서 희망을 풍긴다.
우리는 분명 디테일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무심히 지나가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잠깐 멈춰서 바라보면 신묘하다. 그래서 결국 디테일로 살아가는 이는 천천히 걷게 된다. 볼 것도 많고 감동도 그치지 않아서다.
나는 지금껏 마음에 관해 말하고 있던 것과 같다. 마음은 아주 거대한 것이며, 그러나 아주 거대한 디테일이다. 상담은 투박하게 뭉뚱그려져 그저 막연하게 촌스러운 형상이 되어 있던 마음의 디테일을 회복하도록 돕는 활동이다.
망해가는 냄새, 그것은 마음이 살아있는 냄새다. 그러한 마음을 희망해가는 냄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냄새를 잘 맡았고, 아주 좋아했다. 찾아오실 여러분들도 신비로운 냄새를 입구에서부터 맡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희망한다. 내외부에 준비된 디테일들에 그 희망의 냄새를 풍기고자 즐겁게 궁리하던 스물두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