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소리"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페달밟는 일을 멈추고 핸들에서 두 손을 뗀 채 바퀴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다. 물리적 음량은 작으나 마음의 울림이 큰 소리다. 지금 모든 것이 다 순항중이라는 기분좋은 소리다.
더 듣기 좋은 소리도 있다, 그것은 침묵의 소리다.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다. 가령,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며, 태양계의 행성들이 운행하는 소리다. 더 가깝게는 내가 살아가는 소리다.
아주 큰 것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들을 수 없다. 가장 중대하고 큰 소리들은 오히려 침묵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 나는 침묵하는 신이라는 것이 이러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신이 침묵하고 계시다면 나는 모든 면에서 괜찮다는 것이다. 괜찮지 않다면 신은 번개를 던지거나, 운석을 떨어뜨리거나, 회초리라도 들면서 어떻든 간에 소란스러운 소리를 냈을 것이다.
신이 없으니 자신이 대신 신인 것처럼 자임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모든 것이 다 똑바로 되지 않았다면서, 새벽의 주택가에서 굉음을 내며 바이크를 질주하여 일부러 사람들의 잠을 깨우고, 유튜브에서 3분 안에 놀라운 성공의 비밀을 전하기 위해 분주한 딱따구리에 빙의되며, 말로는 모자라 신체 이곳저곳을 두드리면서 그 속에 소외된 마음들을 알아주어야 한다고 요란법석을 떨며 온몸에 소음을 더한다. 실은 자기 혼자만 괜찮지 않아 어설프게 시끄러운 큰소리를 내는 이들이다.
진짜 큰소리는 어설프게 시끄럽지 않다. 진짜 큰소리는 침묵으로만 소리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삶에는 원래 소리가 없다. 삶은 가장 큰소리라서다. 이 삶의 소리는 바로 몸을 알리는 진짜의 큰소리다.
우리가 외부에서 어떤 소리를 듣기 좋다고 느낄 때는 그것이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와 파장이 일치할 때다. 슬픈 경험을 했을 때면 실연의 심정을 담은 애절한 발라드곡이 자꾸 듣고 싶은 이유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큰소리가 듣기 좋다고 느끼는 이라면, 그는 자신의 내부를 그처럼 아주 크게 느끼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것이 유의미하게 한 개인이 자신의 몸과 친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을 크고 중대한 사태로 경험하고 있을 때 외부의 침묵은 확실히 반가운 것이 된다. 자신이 정말로 지금 괜찮다고 정확하게 비추어주는 거울을 보게 된 것과도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몸에 대해 내고 있는 어설픈 큰소리를 묘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나 영성수련 등의 기제를 통해 자기의 감정들을 억압하며 몸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모습을 뜨겁게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는 그렇게 비겁하게 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몸에서 비롯한 감정들을 조금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몸으로 사는 뿌듯한 책임의식을 느끼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고 큰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지금 몸을 거부하는 두 방식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몸을 벗어나려 하고, 다른 하나는 몸을 조련하려 한다. 몸에 대한 도망자와 몸에 대한 투쟁자의 방식이다. 도망자는 언제나 소리가 작고, 투쟁자는 그 소리가 크다. 실제로 시끄러운 문제가 생겨나는 것도 후자다.
몸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고통이 온전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경험될 때까지, 심지어는 어떠한 초월적 기쁨의 상태가 될 때까지 그것을 받아들여 느끼고 있는 일은 실은 마조히스트의 조련이다. 그 피학의 일을 자신에게 제공하고 있으니 동시에 이것은 사디스트의 조련이다. 자신의 몸과 투쟁하고 있는 이들의 일이다. 모든 투쟁은 극복의 투쟁이며, 이들은 자신의 몸을 극복하고 싶어 조련의 방식으로 자신의 몸과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몸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몸을 긍정하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줄 안다. 그 도취감에 몸에 대한 도망자들을 비난하며 큰소리도 낸다. 자각이 없는 것이고 병식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병식이 없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병이다.
차라리 도망자들이 순수하다. 그들은 몸이란 것을 아주 크고 거대한 것으로 직감하기에 몸이 무서워 도망가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몸을 조련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훨씬 희망적이다. 도망가다가 그들은 숲에서 자기의 발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지금 순항중이라는 그 소리를 불현듯 알아듣고는 깨닫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침묵으로만 들리는 가장 큰소리를 듣게 되는 일은 분명 한 개인의 삶을 완전히 변혁시킨다. 이러한 진짜 큰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어설픈 큰소리를 그만 만들어야 한다. 페달도 멈추고 무엇보다 핸들에서 손을 떼어보는 것은 좋다. 그러면 삶이 자신을 실어가고 있는 그 기분좋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좋은 상태가 마련된다. 아무 문제가 없기에 소란스럽지 않으며 주위도 듣기 좋은 소리다. 누구의 마음에도 울림이 큰 소리다. 그렇게 이 세상의 감동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소리다.
그러한 소리가 바로 몸의 소리인 것이다. 몸의 소리는 내부에서 들리지 않고 오히려 외부에서 들린다. 가장 중대한 큰소리라 침묵으로 들린다. 나는 지금 거의 다 말해온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과 친해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침묵과 친해진다는 것이리라.
침묵이 견디기 힘들어 자꾸만 어설픈 큰소리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을 싫어하고 있는 중이며, 그 몸과 투쟁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내는 침묵의 진짜 큰소리와 싸워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몸과 싸우면 몸이 힘들고 기분이 좋지 않다. 몸이 편하면 기분이 좋다. 붓다는 깨닫고 난 뒤 삶만 따라갔는데, 그 길은 언제나 몸이 아주 깊은 침묵으로 평온해서 기분이 좋은 숲길과도 같았다. 그러나 붓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그 침묵의 소리를 가장 큰 소리로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그 큰소리를 묘사할 수 없어, 다만 꽃을 들었다. 아주 고요한 침묵의 미소만을 남겼다. 우주의 모든 뇌성을 다 합친 것보다도 쩌렁쩌렁한 그 소리였다. 붓다보다 그 수준이 턱없이 미천하게 묘사하자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너는 살아라."
자전거에 타고, 또 마음에 타고 가만히 실려가며 가끔 듣는다. 들어도 들어도 더 듣기 좋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