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째 날"
생각없이 해야 예쁘다. 디테일을 살려야 할수록 더 머리를 비운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그냥 슥슥 해버린다.
사람의 몸은 자연스럽게 알아서 균형감을 찾아가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에디슨 전구를 20줄 정도 추가해 레일에 다니 또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공방 같은 느낌에서 이제 북카페로 한층 더 보이게 된 듯 싶다.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더욱 자주 멈추며, 외부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도 많아졌다. 건너편 편의점 사장님은 지금 이 공간이 거리의 화제가 되어 있다며, 언제 영업을 시작할지를 다들 관심어리게 기다리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셨다.
강퍅한 전직 오타쿠 꼰대인 나를 제외하면 다들 잘생기고 총명해보이는 젊은이들이라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래도 뭔가 좀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섭게 느껴진다고도 보고된다. 외모나 몸집, 말투 또는 태도 때문이 결코 아니다. 표정 때문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 표정에서 전혀 추측할 수 없어서 괜히 그 앞에서 불안해진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표정이다.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욕망을 자극해 그것을 빠르게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상대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려는 이들이 특히 나를 무섭다고 자주 말하곤 한다. 생각이라는 소재로 상대를 통제함으로써만 자신이 안정될 수 있다고 경험하던 이들이, 그럴 수 없는 존재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존재가 자기를 두렵고 불안하게 만든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내가 왜 좋은 상담자의 적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다.
상담자는 동행자이지만, 그 동행은 내담자의 좌절을 위한 동행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상담자는 좌절시키는 자다. 세상과 삶이라는 것이 자기 생각대로 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유아적 전능감을 좌절시키는 일을 돕는 것이 상담자의 진짜 역할이다.
실은 상담자가 잔혹하게 좌절시키는 것도 아니며, 좌절은 상담소를 찾는 내담자에게 이미 이루어져 있다. 내담자 자신만이 좌절이 아닌 척 시치미를 떼며 장미빛 망상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억지의 망상은 결국 악몽이 되며, 내담자는 자신이 스스로 붙잡고 있는 악몽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호소하게 된다.
상담자의 동행은 내담자의 악몽을 함께 걸으며 이것이 정말로 악몽이라는 것을 같이 이해해가는 것이다. 좌절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히려 더 지난한 악몽 속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내담자가 자각하게 될 때, 내담자는 성공적으로 좌절하게 되며 상담자의 임무도 완수된다.
정말로 이것이 끝인가? 그렇게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내담자가 좌절에 성공한 것이 상담의 끝이라면 이것은 별로 좋지 않은 결과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놀이터의 미끄럼틀에 자꾸만 자기 머리를 들이받고 있던 이가, 그 일에 성공적으로 좌절하여 이제 미끄럼틀을 들이받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는 완전한 정상이며, 미끄럼틀을 들이받을 시간에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그의 에너지는 이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자유롭게 동원될 수 있다.
미끄럼틀을 들이받던 이는 1억 번을 채우면 이세계로 떠나는 문이 미끄럼틀 위에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 있다. 듣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말이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 자기만의 이상한 말에 사로잡혀 이처럼 살아간다.
이상한 말은 이상한 생각이 만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상한 생각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의 마음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회피의 오랜 습관으로 굳어진 생각이 이상한 생각이 된다.
결국 상담자가 좌절시키는 것은 이상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생각없이 사는 일은 상담자의 좋은 적성이다. 그 자체로 내담자를 위한 하나의 표지가 된다.
물론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선택이나 판단의 주체인 양 그러한 표현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다가왔다가 사라졌다고 쓰는 말이다.
우리는 생각이란 것에 살을 불여 가속시킬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생각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간주하곤 한다. 그래서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많이 굴린 생각일수록 그것은 소중한 자신의 것처럼 착각되기 때문이다.
생각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대한 소유권을 쉬이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거창하게 좌절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 생각은 매우 쉽게 상시 포기되며 오랜 습관처럼 굳어질 일이 없다.
생각을 포기하기에 좋은 요령도 있다.
보기에 좋은 것 앞에서 늘 생각을 포기하면 된다. 생각대로 된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보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여행지에 가서 멋진 경치를 보게 되었을 때, 그 앞에서는 생각이 자연스레 멎는다. 우리는 이미 보기에 좋은 것이 정말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보기에 좋은 것보다 자꾸 자기의 생각이 더 좋아야 한다고 고집할 때 생기는 것이 정신의 병이다.
보기에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기 위해 이상한 생각들은 생겨나고, 또 고집되며, 나날이 이상심리학의 교과서들은 새로운 챕터를 증보해나간다. 파푸아뉴기니 제도의 나무들도 불쏘시개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그 마음이 아프다.
실존주의를 좋아하는 정신분석가인 얄롬은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라는 멋진 책을 썼다. 좌절에 대해 말했지만, 실은 어떤 상담자도 내담자를 좌절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상담자가 더 하기 싫은 일은 내담자가 계속 고통받게 되는 일이다. 이상한 생각은 구원책처럼 착각되지만 순도 100%의 고통만을 결과짓는다. 그래서 차라리 상담자들은 이상한 생각에 도전하는 것이다. 마치 내담자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에게 도전하는 엑소시스트처럼.
중요한 것은 도전은 언제나 진지하게 상대를 마주보는 친밀한 대화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꾸짖거나 혼내기 위해 또는 자기를 뽐내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내담자의 안녕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다.
우리 상담실에 들어서면 분명 그러한 멋진 일이 일어나리라는 아주 설레는 기분이 든다.
신비하고, 따듯하며, 전적으로 우호적이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들으면 그 순간부터 바로 안녕해질 것이다. 떠날 것은 떠나게 되며, 자연스럽게 알아서 건강한 균형감이 자리잡을 태세를 갖춘다. 생각없이 맡기면 예뻐지는 미용실만큼이나 당신은 이곳에서 아주 어여쁜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는 것이다.
서른아홉째 날도 말이 많았지만, 우리가 만나게 될 그 날에는 다 자연스레 쓸데없어질 말들이다. 생각없이 살기에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