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두째 날"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해가는 방주의 안쪽에서도 여행은 동시에 펼쳐진다. 마음의 숲을 향해 깊이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과 마음, 바다와 숲이라는 은유는 함께 작동한다. 이 공간에는 분명 그러한 은유적 그림을 담으려 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커다란 나무가 반겨준다. 이것은 일상의 영역과 비일상의 영역을 경계짓는 일종의 신목이다. 나무를 지나 중앙으로 들어서면 푸른빛의 달이 떠있는 덩굴숲이 펼쳐져 있다. 달빛을 따라 여행자는 숲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이르게 되면 갈대 사이로 아늑한 숲속의 공터가 자리잡고 있다. 여행자가 몸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는 안심의 장소를 형상화한 것이다.
인디언 텐트 안에 들어가도 좋고, 갈대들로 살짝 주위의 시선을 차단하며 쿠션에 몸을 맡겨도 좋다. 잠깐 누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또 다르게 보일 것이다. 걸어온 길 위에 놓여 있던 모든 것이 지금 이 숲속의 공터를 지켜주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임이 분명하다.
인간을 지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스스로의 시간이다.
그때는 분명 힘들고 외로웠으나 이제는 그것이 자신을 지켜준다.
나는 결국에는 시간은 인간의 편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처음 그때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가상의 시간을 추구하며 자신의 시간을 배신하는 경우가 빈번해, 미처 시간이 우리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뿐이리라.
자신의 시간을 사는 인간의 이름을 나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숲으로 깊이 들어가는 이유는 나를 찾기 위해서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평온하게 펼쳐진 그 공터에 나는 위치해 있지 않다. 오히려 공터는 언제나 비어 있다. 이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나를 맞이하기 위해 공터는 늘 그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 것이다.
숲을 걸으며 자신의 시간을 살아온 이가 공터에 도착해 이처럼 나를 깨닫는다.
걸어온 그 존재가 나였음을 안다.
마음의 방주는 결국 나를 실어가는 것이며, 나로 실어가는 것이다. 가는 것과 도착하는 것이 일치한다. 그러니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매일의 변화를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이미 나다. 꼭 유쾌한 변화가 아닐 수도 있다. 바라지 않던 변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으로도 또 나다. 잃은 적도 없으며, 갖지 못한 적도 없다. 나일 뿐이며, 단 한 번뿐이다.
마흔두째 날인 오늘도 단 한 번뿐인 나의 시간이었다. 이 오늘은 누구에게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떻든 또 나였고, 내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안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 탄산수를 제조해 축배를 들어본다. 저마다 자유롭고 그만큼 무엇으로도 자유롭게 나였던 각자의 시간에서 우러나온 고밀도의 마력을 담은 엘릭서다. 같이 잔을 부딪힐 날도 머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