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넷째 날"
내 자신으로 예로 들자면 생긴 것은 개처럼 생겼는데 고양이 같은 습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습성도 개 같았던 날들은 많았다. 관계가 최고인 줄 알고 관계에 몰두해 있던 시절에는 내 사람이라고 판정된 이들에게 언제나 충직하고 신실한 모습이고자 노력했다. 돌아보면 외롭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으리라.
그러니까 처음부터 개 같았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습성이었다. 외모는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시바견처럼 생기기로 타고났지만, 요즘에는 외모도 둥글둥글한 개냥이처럼 보이게 된 듯도 싶다.
그런데 개와 고양이가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실은 나는 잘 모른다.
개도 많이 키워보고 현재는 7마리의 고양이와 1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거의 똑같이 경험된다. 서로 안기는 것을 좋아하고, 체온이 좋아서 꼭 붙어 있고 싶어하며, 늘 말을 많이 걸면서 다가온다.
개 같거나 고양이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의 개와 고양이라면,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 둘은 개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 어느 동질의 속성으로만 느껴진다.
굳이 까탈스럽지 않고, 자기가 선호하는 취향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다른 것을 죽어라 문제시하지는 않으며, 근본적으로 순박하고, 정직하며, 일관적이다. 섬세하게 현상을 느끼고 있지만 적당적당히 넘어가는 유연한 수더분함이 내가 기르고 있는 고양이들에게서 받는 핵심적인 감상이다.
집에 들어서면 현관 앞으로 7마리의 고양이들이 다 달려나와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거는 장면은 내 평생의 장면이다. 이 친밀감을 매일 경험하고 있으니 나는 복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결국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MBTI 유형처럼 '개 같음'이나 '고양이 같음'이 엄밀하게 구분지어 정의될 수는 없다는 것이며, 우리가 실제의 개와 고양이를 큰 핵심적 차원에서 닮을 수는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에게 진심으로 친밀해질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닮은 정도일 것이다.
나는 아주 많이 닮고 싶다. 더 닮고 싶다.
사자를, 양을, 늑대를, 여우를, 사슴을, 수달을, 코끼리를, 하마를, 펭귄을, 오리너구리를, 흰긴수염고래를, 그리고 사람을 가득 닮고 싶다.
존재한다는 사실이 친밀하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이는 행복할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의 눈빛에는 바로 그러한 행복의 기운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래전에 실존상담연구소 입구에 앉아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주던 한쌍의 셰퍼드 인형을 다시 데리고 왔다. 친밀한 존재의 그 눈빛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내 관점에서는 개냥이의 눈빛이다. 물리적으로 음성을 낼 수는 없어도 이미 그 눈빛이 말을 건네고 있다.
잘 지냈냐고, 건강했냐고, 또 보게 되어 반갑다고.
그런 눈빛을 더욱 자주 만나, 우리가 결국 같은 눈빛으로 닮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이곳은 우리 존재의 본성, 곧 개냥이의 본성을 회복하기를 꿈꾸어보는 공간이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 늘 평생의 장면이 펼쳐지며, 그렇게 우리 자신이 일상적으로 평생의 장면 속에서 상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분명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마흔넷째 날 소망해본 개냥이의 행복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