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째 날"
달 위에서 노래하는 커트 코베인을 나는 꿈꾸고 있는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도 『빌리 배트』도 분명 이러한 감수성을 담고 있다. 『지』와 『100M』의 작가인 우오토 또한 유사한 감각을 펼쳐낸다. 나는 이들이 만화를 통해 롹킹(rocking)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세상에 없던 것을 세상으로 끌고 들어오고자 하는 그 몸짓이며, 일렁이는 그 노래다.
그러나 실은 없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던 것이다. 어찌보면 무엇보다 가장 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 대다수의 합의된 기억상실하에 가장 망각되었기에 이제 그것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보인다. 지구가 파랗다는 당연한 사실은 달 위에서야 비로소 다시 기억된다.
결국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보려는 일은 정직하게 상기하려는 일과 같을 것이다.
대체 어떠한 고집이 우리를 자발적인 기억상실증으로 이끌었는가? 마흔여섯째 날에는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만 할 것 같다. 왜 이 공간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최소 한국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떠한 마음의 흐름을 거칠게 묘사할 수는 있다. 정교하고 친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루뭉술하고, 빈 곳도 많다. 만약 그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함축해서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간명한 용어를 창발해서 현상을 정의가능한 이가 있다면 그런 이가 시대의 사상가로 불리게 되는 것이리라.
요는 나는 생리적으로 지겹고 답답한 것을 일단은 먼저 말하고 본다.
화, 지금 세상은 화로 가득 차있다. 이것은 열등감의 화다. 열등감은 이룰 수 없는 크기의 욕망이 만들었다. 욕망을 부풀린 것은 가상현실을 에덴동산처럼 키워간 미디어다. 실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누구나 다 알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얘기는 이러하다.
자신의 열등감은 아이에게 투사된다. 이에 따라 아이는 더욱 미숙한 존재처럼 보이게 되며, 미숙하고 부족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도 커진다. 그러한 자신의 죄책감을 씻기 위해 여러 형태의 악마들을 만들어내어, 자신은 악마들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수호자처럼 행세하려 한다. 죄가 있는 것은 그 악마들이지, 자신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 미숙하고 부족한 모든 아이를 자신이 지키겠다는 선한 영향력의 주체가 되기를 꿈꾼다. 해도 해도 잘 씻어지지 않는 죄책감의 크기만큼 수호자의 정체성도 더 커져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착한 일진의 출현이다. 착한 일진은 오늘날의 이상적인 부모상과 같다.
착한 일진은 자폐, 아스퍼거, ADHD 등의 발달장애들을 오히려 더욱 과잉되게 판정시키는 요인이나, 그 자신은 스스로를 다만 선량한 수호자로만 생각한다. 자기 혼자 이 모든 미숙한 아동을 왕처럼 다 알아주고 존중하는 진정한 사람 중의 사람이라고 여긴다.
실은 그저 자기의 죄책감을,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의 열등감을 해소하고 싶을 뿐이면서, 끝없이 아이의 핑계를 댄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불행하다. 그들은 아주 빈번하게 희생양이 되어 있다. 양육을 잘 하지 못하고 아이를 유기하거나 방치하는 이들에 의해 희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자기가 아이의 모든 것을 진정하게 알아준다는 바로 그 착한 일진들에 의해 가장 착취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착한 일진들은 원래 자기들이 누리던 것을 거의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의 욕망도 채우면서 아이도 잘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육아가 힘들다. 사회가 왕자와 공주를 제대로 함께 부양해주지 않아서라기보다 자기가 원래 보던 넷플릭스 드라마를 다 챙겨보며 육아도 하려 하니 시간이 부족하고 몸이 축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자기의 욕망에 치여 사는 아이가 왜 아이를 낳아 키우려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 아이를 자기의 욕망이 만든 열등감 및 죄책감에 함께 사로잡히게 만들어야 하는가. 부모의 신체적 건강만큼이나 심리적 건강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시대다. 지금은 가상현실 속에서 감당도 안될 만큼 커진 욕망의 버블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시대인 까닭이다.
심리적 건강은 쉽게 말해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을 자신이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잘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에 무한히 가깝다. 몽상적인 남의 욕망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더 어렵고 힘들어지기만 하는 길이다.
가장 힘겨운 길은 이룰 수 없는 모든 욕망을 자기가 바라봐주고 알아봐주면 그 욕망들이 처리가능해진다고 믿는 길이다. 착한 일진들은 거의 다 이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자기의 미숙하고 부족한 마음들을 보호하고 왕처럼 다 귀하게 알아주려는 일진부모 같은 메타인지를 만들어내서는 그것이 심리학적 비결이라고 환상을 소비한다. 그렇게 모든 마음을 돌보고 지켜주는 착한 일진 놀이를 보급하며 자기가 인생스승인 줄 안다. 유튜브와 SNS 등지에서 떠드는 오늘날의 많은 스피커들은 결코 노골적으로 자신들이 인생스승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상태 속에 있다. 왕 놀이를 하며, 소외된 다른 것들도 왕이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착한 일진이 좀 어리숙하고 모자라지만 애는 착해보이는 찐따를 또 하나의 늠름한 착한 일진이 되도록 도우려는 그 모습과도 같다. 요즘 웹툰들에서 자주 묘사되는 그 광경이다.
열등감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이 왕이 되는 일이고, 그 왕은 착한 일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착한 일진은 정확하게 다른 부족한 것을 수호하는 부모의 역할을 한다. 이로써 부모 없이는 모든 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유아적 환상만 실체처럼 공고화된다. 총체적으로 시대가 유치해진 이유다.
소위 인플루언서나 오피니언 리더라는 이들이 소꿉놀이처럼 서로 갈구고 싸우며 놀리다가 다시 친밀하게 화해하는 장면을 보며 까르륵 환호한다. 인생의 낙이라는 것이 그러한 영상을 몇 시간씩 멍하니 보고 앉아 있는 것뿐이다. 뽀로로나 토마스기차를 보고 있는 아이의 상태와 전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착한 일진들이 이러한 쇼를 기획하며 연출한다. 이렇게 모든 마음은 다 온전하다는 것을 바라봐주고 알아봐주기만 하면 모든 일은 다 잘 될 것이라는 망상을 현실에 이식하려고 한다.
나는 바로 이 일진들의 세상이 너무나 지겨운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에 없던 것을 갖고 오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결국 왕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고집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실제적으로 왕 같은 인물로 대접받는다고 열등감이 해소되지도 않으며, 욕망이 멈추지도 않는다. 오히려 왕이 된 결과는 더 심대한 화의 증가다. 계속 화가 나는 현실만이 펼쳐진다. 오늘날 왕처럼 대우받는 성공적인 유튜버들은 왜 다 우울증인가? 화가 많이 나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화를 다룰 역량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화는 계속 억눌려지기만 하며 신체적 건강까지 해치게 된다. 몸이 힘들어지면 정신은 더 초조해진다. 더욱 욕망에 쫓기게 되고, 열등감은 한층 더 자극될 것이다. 악순환이다.
아들러의 시대처럼 오늘날의 열등감은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때가 아닐지 모른다. 자신의 신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상의 욕망에 의해 부풀려진 열등감인 까닭이다.
그렇게 뿌리도 없는 것이라, 그 원인을 찾아낸다고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닐 것이다. 아 내가 이래서 열등감이 생긴 거구나, 라고 이해한 척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요는 우리에게는 열등감과 정면에서 정직하게 친해지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가상이라도 이미 생긴 것이고,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궁구할 필요가 있다.
열등감과 친해지지 않고자, 열등감을 회피할 숏컷으로 우리가 택하는 길이 바로 왕이 되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이 되면 가장 높은 지성과 도덕성이 탑재되며, 그것들을 수단으로 현실적인 자원도 얻게 되리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전적인 망상이다. 아이가 꿈꾸는 하루 아침만에 레벨999로 실현되는 이세계 현자놀이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서서히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만 자신의 열등감과 친해져갈 수 있다.
열등감에 충분한 시간을 들인다는 이 말에서, 열등감을 아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보자.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함께 나누는 일만이 양육의 거의 모든 전부다.
신나게 같이 게임을 한다거나 특정하게 교육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 굳이 아니다. 함께 공간을 점유하며, 공간에 그 함께인 시간을 새기는 것이 친교의 모든 것이다.
고아의 시간 속에도, 이러한 양육자와의 순간만은 생생하게 기억되어 있다.
나는 왜 상담자가 되었는가. 엄청 단순하다.
내가 마음에 대해 눈치가 빨라 그 이해가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 열등감의 이유였다. 나는 내가 좀 병신인 줄 알았다. 20대 내내 자폐인 것 같아 늘 고민하며 살았다.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기만 했다.
내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열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언제나 출발점이다.
화낼 일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열등감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에 화낼 일이 아니다.
천천히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해나가면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면 그것도 나에게 반드시 전해주게 된다.
그것에게 나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깊은 시간을 함께 나눈 친교의 결과다.
나는 지금 열등감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을 분명 친밀감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중이다.
달에서 바라본 지구는 아주 친밀하게 보일 것이다. 더욱 다가가고 싶다고 노래될 것이다.
그러나 실은 반대편은 아니다. 열등감은 친밀감을 회복할 기회인 것이다.
우리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열등감이다. 열등감이 자극되는 것과 정직하게 하루하루 친해져나가면서 결국에는 얻게 되는 것이 친밀감이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가장 얻고 싶던 것도 이 친밀감이며, 반대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가장 얻고 싶어하는 것은 진실로 친밀감이다.
나는 이 친밀감이라고 하는, 정말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처음부터 누려야 하는 일이 당연한 소재를, 마치 새삼스럽다는 듯이 이 세상에 다시 끌고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 없던 친밀감을, 원래부터 이것만이 있던 것이라고 다시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공간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 사실 만드는 것은 다 끝났다. 전하고 있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마흔여섯째 날에도 나는 전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더욱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전해볼 것이다. 당신의 마음과 친해지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계속계속 전해갈 것이다. 결국에는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나와 당신, 우리 둘의 친교를 위해 울리고 있는 중이다. 언제라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