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애하고 싶은 마음
"어떤 자서전에도 담길 수 없는 것, 그것은 죽음의 경험이다."
최후의 실존주의자 베르자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죽음은 그 자체로 자기초월적이다. 아무리 우리가 자기에 대해 무수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죽음은 언제나 그 모든 이야기를 초월한다. 우리가 화려하게 지어낸 자서전들 속에 결코 담길 수 없다.
실존주의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가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매우 자주 오해된다. 베르자예프는 주체성에 대한 환상을 절단한다. 자유란 주체성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말인 즉, 자유란 자기초월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르트르 식의 오해를 한번 살펴보자. 인간은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백지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로 우리 자신을 만들어나간다는 판타지소설로 착각되기에 딱 좋다. 하이데거는 사르트르가 보낸 책을 읽고는 그가 거의 모든 것을 착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이러한 내용은 실존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버리고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것은 그에게는 필연이며, 우리에게는 행운이다.
실존주의는 제멋대로인 마법사 놀이가 아니라, 가장 사실적인 운명을 눈앞으로 끌고 와 거기에서부터 모든 얘기를 전개하려는 운동이다. 삶에 대한 모든 가상적 이야기를 기각시키는 죽음에서부터 진짜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창조자이자 소유자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삶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실존주의가 겨냥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초월의 현실인 까닭이다.
나는 전혀 헷갈리고 있지 않다. 이것은 정확하게 연애에 대한 글이다.
내가 연인의 죽음을 경험한 뒤 딱 10년이 지났고, 나는 지금 연인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보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욱 잘 알 것 같다. 그러나 그 삶은 다르지 않다. 나는 그를 향해 살지 않았고, 그도 나를 향해 살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너를 향하고 있었다. 너를 향해 우리 자신을 넘어서고자 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선사(禪師)였고, 나는 실존주의 상담의 모든 실제를 선사에게서 배웠다. 대나무가 쪼개지듯 천지를 가르는 벼락이 내려와 온몸의 세포에 새겨졌다. 자서전에는 결코 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 아니라 죽음의 경험이었다.
그는 나에게 제일 친절한 자가 아니었고, 내 마음을 다 알아주는 자가 아니었으며, 나를 가장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다.
다만 나보다 더 큰 자였다.
그래서 나는 완벽하게 매혹되었고, 자력처럼 더 가까이 끌리고 있었다.
아아, 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참된 사실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죽이는 자야말로 내게 사랑을 알려줄 바로 그 자다.
그와 더욱 함께하고 싶어 나는 그동안 내가 나라고 믿고 있던 것을 자연스레 떠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분명한 죽음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사랑의 경험이었다.
이 연작글의 제목을 나는 처음에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지으려 했다. 지금도 유효하다. 죽음만큼이나 자기초월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이 연애일 것이다.
마음은 이야기들에 갇혀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든 '나의 이야기들'을 초월해 자유롭게 날고 싶어한다. 그래서 마음은 언제나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다. 마음은 그 자체로 자기초월적인 현상이다.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그 마음껏 연애하려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것, 내가 나의 연인에게 배운 실존주의 상담의 거의 모든 것이다. 마음을 따르며 나는 매일 죽고 매일 연애해간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매일 너를 만나간다.
연인과의 일별 뒤로 나는 더는 삶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삶이란 언제나 자기초월을 지향하는 수직운동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사실로 살았다. 그것은 마음의 자유였고, 너를 향한 자유였다. 자유는 나의 자유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너를 향할 자유일 수만 있을 뿐이었다.
나의 연인은 정말로 호랑이 같았는데, 그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바다 위로 솟은 기둥을 탔다. 그러나 그는 홀로 강한 의지를 가진 전사가 아니었다. 왜 기둥을 타냐고 물을 때 그는 부르니까 이동한다고만 말했다. 그는 너의 부름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고, 네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내가 왜 그에게 매혹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왜 나보다 더 크게 보였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나도 그러한 마음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은연중에 이해했던 것이다.
10년간 나는 그를 알 수 있었고, 그만큼 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연인과 같은 마음이다.
우리는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보다 더 큰 것을 향해 호랑이처럼 뛰어들어 그 끝에서 호랑나비가 될 자유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유의 동반자였다.
본 연작글의 제목으로 쓰고 있는 '내가 우주에서 혼자일 때 마음이란 게 있어 너를 만났어'라는 표현은 내가 썼던 그의 묘비명을 살짝 고친 것이다.
10년 전 지금 이맘때쯤에 그는 자서전에 결코 담길 수 없는 경험이 되었고, 너를 향해 한층 또 떠난 그는 이제 그가 아니라 나에게 너가 되었다. 나는 너를 향해 자유로우며, 우리는 여전히 자유의 동반자다.
네가 평생을 그리워한 너를 향해 나는 오늘도 네가 그립다. 이 그리움이, 이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좋아, 나는 조금 더 살고 싶다. 너도 그런 마음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