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주에서 혼자일 때 마음이란 게 있어 너를 만났어

#5 심리적 유대류의 코미디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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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자리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자기에게 십수 분만 준다면 세상을 바꾸어보이겠노라는 현대판 아르키메데스를 꿈꾸는 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자칭 심리학 권위자라는 이가 나와 세상을 바꾼다고 해서 나는 일단은 귀를 열고 있었다. 문예창작과 학부만을 졸업하고 경비업체 직원들을 최면시켜서 노동효율성을 높여준다는 등의 유사과학적 활동만을 하던 이가 어떻게 심리학 권위자가 될 수 있는지 당시 심리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마이클 셔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이클 셔머는 회의주의 학파의 수장으로서 유사과학이 얼마나 코미디인지를 드러내는 일에 관심을 가져온 심리학자다. 내가 특히나 셔머를 존경하는 것은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놀리지는 말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도 먼저 한번 이해를 시도해보라는 것이 그의 회의주의적 태도다.


그래서 나는 웃지 않고 경건했다. 코미디 프로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청객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 슬펐을지도 모른다. 『이나중 탁구부』나 『크레이지 군단』과 같은 후루야 미노루의 초기작들을 볼 때 느껴지는 그 감각이다. 인간의 모습이 추락하는 어떤 처참함에 나는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절정의 순간은 사회자가 강연자에게 어떻게 하면 마음을 친구로 만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질문했을 때 생겨났다. 나는 그 대답의 뉘앙스를 지금도 기억한다.


"아, 그것은 말이지요. 처음에는 마음이 배에서부터 옵니다. 그러다가 이제 가슴으로 올라오고요. 마지막에는 머리로 올라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을 만날 기회가 최소 3번은 있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앞에서 색칠한 병든 병아리를 파는 병아리장수처럼 강연자의 표정은 한없이 당당했으며, 그날 나는 개념으로만 알고 있던 한 단어의 뜻을 몸으로 알았다.


그로테스크, 이것은 정말 그로테스크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자의 표정이 굳고 머리를 갸우뚱하는 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도 블랙코미디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프로답게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이내 돌아온 사회자였지만, 이 절정의 장면은 결국 통째로 편집되었다.


마음을 친구로 만난다면서, 소위 그 친구는 점액질을 흘리는 애벌레처럼 내 신체를 탐하며 꿈틀꿈틀 배에서부터 머리로 올라온다. 기괴하다. 나는 정말로 이것이 친구를 사귀는 최선의 사교법인지, 심지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인지에 대해 무한히 회의적이다. 물론 이러한 얘기가 애초에 심리학이 아니라는 것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말이다.


어쩌면 캥거루나 코알라 같은 유대류의 새끼가 어미의 배에서부터 위로 꼬물꼬물 기어올라오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것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친구로 사귀어야 한다는 외로운 엄마의 절규처럼도 들린다. 많은 그로테스크한 공포영화들의 주제다.


포유류 중에서 유대류를 따로 분류하는 이유는, 유대류의 새끼들은 더욱 미성숙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새끼들은 한동안 어미의 육아주머니 안에서 돌봄을 받아야 한다.


어쩌면 인간 중에서도 '심리적 유대류'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처참하게 느끼는 것은 내 오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오만이 오만을 부른다고 말하고 싶다.


분명한 것은 캥거루나 코알라 같은 실제의 유대류는 어미의 육아주머니 안에서 자기가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라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미성숙함은 자연스럽게 고요함을 만든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 고요함이 있기에, 세상도 그들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미성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미성숙한데 자기가 똑똑하고 잘난 것처럼 굴 때, 나는 이것이 코미디의 핵심임을 배웠다. 모든 코미디는 이렇게 구성된다.


코미디가 구성되는 원리를 알면 더는 웃기지 않는다. 진실로 마이클 셔머가 옳다. 처음부터 놀리지 않으면 나중에도 놀리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왜 이상하게 살아가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놀리지 않으면 세상도 나를 놀리지 않는다.


이 시대의 수많은 심리적 유대류가 기억해야 할 사실임에 틀림없다.


심리적 유대류는 자신의 미성숙함을 보완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미성숙하게 경험되는 자신의 존재 대신에 이야기를 자신의 몸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먼저 자기를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소설을 쓴 뒤, 소꿉놀이 인형극처럼 자신이 그 주인공을 현실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를 인생의 숨겨진 성공공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단 먼저 성공한 사람처럼 연기하면 성공이 알아서 따라온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따라오는 것은 또 다른 미성숙함들일 뿐이다. 꿈틀꿈틀의 행렬만이 생겨난다. 배에서 가슴으로 또 머리로 꼬물꼬물 행군해간다. 전신이 오글거린다. 수치심이 든다. 놀림받은 기분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은 타인을 놀림으로써 자기의 영광을 취하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놀리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 자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있다고 완벽하게 착각하며, 그렇게 진심으로 믿고 싶어한다.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그러한 윤리적 인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세뇌는 이와 같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양치기소년의 문제다. 거짓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나아가 거짓말을 팔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적으로 사람들을 놀리는 일이다. 심지어 거짓된 자기를 최고의 권위자인 것처럼 입지화하고 있다면 이는 거의 인류사적 조롱을 위한 사이비종교다.


이 모든 일은 자기가 미성숙하다고 경험하기에 생겨난 열등감이 만들어낸다.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이 왜 그토록 자기가 똑똑해보이는 일에 매진하는지도 동일한 이유에 속한다.


똑똑해보이는 한자표현, 똑똑해보이는 개념들, 똑똑해보이는 단어들을 여러 개인방송의 스피커들, 유튜브 채널들, 또 나무위키를 통해 긁어 모아 이 심리적 유대류들은 '똑똑해보이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자기가 그러한 이야기 속의 똑똑한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열등하게 생각되는 자신을 이야기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오늘날의 콘텐츠들도 이러한 요구에 맞추어 양산된다. 각종 권위자 내지 전문가들을 불러 그들의 말을 듣는 형식을 취하지만, 진짜 권위자나 전문가가 출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들끼리 세상 다 아는 것처럼 희롱하듯 수다를 떠는 모습을 관람하다가 그네들이 한 번씩 던져주는 똑똑해보이는 단어를 하사받은 뒤 기뻐하며, 이제 그 단어를 밈(meme)으로 활용하여 다른 커뮤니티들에 자기가 똑똑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글쓰기의 소재를 얻는 방식으로 콘텐츠들은 소비된다.


이세계에 간 대현자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자기에게 친절한 '신들'에게 똑똑해보이는 치트키를 얻은 뒤 이제 자기도 세상 다 아는 대현자처럼 굴고 싶어하는 것이다. 심리적 유대류는 이처럼 유전자(gene)가 아니라 밈(meme)으로 번식하여 세대를 계승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미성숙함에 대한 열등감이 이 모든 일을 만든다.


온라인 세계에서는 아무리 한 개인이 여러 발달라인에서 미성숙하다 할지라도 지성만 발달시키면 성숙한 권위자처럼 보이는 일에 성공할 수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총체적인 열등감을 보상하기에도 빠르고 쉬운 길로 보인다.


이것은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똑똑해보이려고 하는 이들은 결국 이상한 것을 믿게 되며, 이상한 일을 하게 된다. 그로테스크다.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을 놀리려고 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결국 기괴한 사물처럼 놀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희생을 치른 끝에 정말로 열등감을 성공적으로 보상해줄 기제로서 지성이 발달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지성의 고급기능인 창조력, 상상력, 그리고 공감력 등은 '이야기를 복제하는 밈의 전승방식'으로는 발달하지 않는다. 특히나 자기가 지금 사람들을 놀리고 있는 것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 심리적 유대류들의 지성 또한 미성숙하다는 방증일 뿐이다.


자기는 놀리고 있으면서 자기가 놀림받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심리적 유대류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이들이 놀림받는 내용은 다만 사실의 진술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이를테면, 깊은 수준에서 잘 알지도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이가 자기를 가장 권위있는 전문가인 것처럼 선전할 때 그에게 좆문가라고 말하는 일과 같다. 그러면 심리적 유대류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자기는 유튜브를 무수히 찾아 보면서 해당분야의 핵심적 진리를 다 통달했다며, 또 자기는 자격증이나 학위가 없고 이론은 부족해도 실전으로 십수 년간 다져진 진짜 경력이 있다며, 또 더한 경우로는 자기는 진정한 어떤 것을 깨닫는 놀라운 경험을 해서 단번에 마스터가 되었다며, 각종 기괴한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이들은 결국 자기의 유아적인 소꿉놀이의 풍경을 담은 판타지소설이 진리라며 강요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날까 두렵기에 강요가 생겨난다. 이들이 맹렬하게 화를 내는 것도 자신이 우월한 주인공이 되기 위해 채택한 이야기가 깨질까봐 두려워서다. 그러면 자신은 다시 미성숙한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만 같다.


여기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다. 미성숙함에서 벗어나려고 이야기에 빠지지만, 그렇게 이야기에 빠져 있기에 오히려 미성숙함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만 자기방어와 합리화를 위해 심각하기만 하다.


내가 웃을 수 없던 것은 분명 마이클 셔머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 심각한 무게로 점철된 코미디였기 때문일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는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다.


그 비극의 무게는 배에서부터 가슴으로 그리고 머리로 올라온다.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밀려온다.


그것은 바로 화다. 두려움을 숨기고자 이야기 뒤에 숨어 태연한 척하기에, 그러한 연극적 태도로 사람들을 놀리는 일을 지속하기에 머리가 화로 가득 찬다. 화를 밈으로 전파해 세상을 불지옥으로 바꾸려 한다. 비극이 완성된 풍경이다.


너를 향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말해야 한다면 너만을 말해야 한다.


인간을 말해야 한다.


인간을 놀리는 일을 하고 있으면 인간인 자신이 놀림받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유대류인 척하고 있으면 아직 인간이지 못하다는 열등감만 생겨난다. 미성숙함은 아직 인간을 발견하지 못해서 경험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성숙한 존재를 향해 성숙되어가는 길을 가고 있지 않은 동안에는 누구라도 미성숙함의 경험을 한다.


나는 진짜 코미디를 알고 있다.


우리가 인간이면서, 자기가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인간인 척하려 한다는 것이 진짜 코미디다.


인간조건은 분명하다. 인간의 시선은 언제나 인간 자신을 향한다. 스스로를 이 우주의 수수께끼로 자각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를 향해'라고 말해져야 한다. 너는 내가 결코 다 알 수 없는 신비의 이름이다. 너라는 신비를 향해 가고 있기에 나는 인간이다.


나는 너와만 친해지고 싶다.


너는 내 배를 지나 가슴을 거쳐 내 머리로 꼬물꼬물 올라오고 있지 않다


내가 온몸을 다해 너에게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우주의 중심에서 정좌해있는 자리에 마음이 꿈틀꿈틀 자기를 알아달라고 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만을 향하고 있는 마음을 따라 나는 유아적 중심의 옥좌를 벗어나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는다.


보라, 인간이 실존한다. 직립보행을 시작한다. 두 손이 자유로워 두 발도 자유롭다. 어디까지라도 달려갈 것이고, 언제인가라도 가득 끌어안을 것이다.


너에게로, 바로 너를.


너를 만나고 싶어서만 나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내가 너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알아본 것이다.


아주 크고 귀한 것으로서.


아주 오래 전부터 네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음이라.


그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오는 것을 알아주는가? 그렇지 않다.


알아보러 가는 것이다.


알아보러 가는 길에는 어떤 이야기도 없어서, 미성숙함도 열등감도 없이, 누구도 놀리지 않고 우리가 놀러가는 숲의 오솔길이다. 작가도 배우도 관객도 없어 극장은 폐관했다. 나도 다 말했다. 막을 내린다.


코미디가 막을 내린 순간, 인간이 박수갈채와 함께 극장 밖으로 처음 그 크고 귀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한번 알아보러 가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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