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주에서 혼자일 때 마음이란 게 있어 너를 만났어

#6 둘 중에 하나만 하자

by 깨닫는마음씨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쓰며, 실존주의에서는 결단이라고도 표현한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을 노래했지만 실은 그것은 그가 선택해서 간 길에 대한 노래였다.


송구스럽게도 이 애송이에게 건강한 심리학적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지혜를 묻는 분들이 계실 때, 나는 수많은 상담을 진행해오면서 내담자들이 결국 지혜롭게 드러나게 된 그 순간들을 목격한 증언을 들려드린다.


마음의 고통은 왜 생기는가?


선택하지 않아서다.


집착하고, 고착되고, 늪처럼 침잠되고, 바닥에 눌어붙은 생기없는 현상들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아 생겨난 결과들이다. 우울증은 대표적이다. 우울증은 선택의 장애다.


상담은 삶의 선택을 돕는 일이다. 또는 이미 내담자가 어떠한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 곧 심리적 회복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생기가 차오르고 활력이 샘솟는다. 우리에게 있어 절망이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름아니다.


나는 우리가 선택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중요한 지점에 대해 꼭 얘기하고 싶다.


무엇인가 어떤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을 못하게 된 것이 아니다. 다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선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 가지려고 하는 증세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양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일어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자기의 도구적 대상으로 삼는 방식이다. 더 많은 대상을 도구적으로 소유함에 따라 그는 자기 자신의 존재감이 증진된다고 생각한다. 얘로부터는 잘생긴 외모를 얻고, 쟤로부터는 돈을 얻고 하는 식이다.


이러한 소유양식을 조장하는 개념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마음의 지혜라고 착각하곤 하지만, 그 반대다. 이 방식은 가장 어리석다. 우리를 전적인 선택의 무능력자로 가장 빨리 몰락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통합이다.


통합은 다 알아주려는 일이다.


정상적인 집단상담의 훈련현장에서 상담수련생들은 다 알아주려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장 먼저 배운다. 슈퍼바이저는 자기가 모든 이의 마음을 다 온전하게 알아주려고 하는 이에게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그는 지금 자신이 그 장에서 가장 권위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합이라는 개념이 언제나 권위를 획득하려는 의도와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유익하다. 이런 의미에서의 권위는 대상적 권위다. 대상들을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권리와도 같은 것이다. 대가족의 어머니 같은 권위라고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상담에서 모든 것을 친절하게 다 알아주는 자상한 어머니의 권위를 얻으려 하는 일은 내담자를 소유하려는 의도와 같다. 내담자를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소위 이것이 '부드러운 권위'의 정체다. 이러한 권위에 동의할 때 내담자는 최면되고, 세뇌되며, 가스라이팅됨으로써 주인에게 소유된 일종의 사물이 된다.


아주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권위를 획득하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 이는 매우 자주 자기 자신을 오히려 상담리더의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는 민주투사인 것처럼 간주한다는 것이다.


나는 라이트노벨 등에서 나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참담한 오해들을 종종 접한다. 천재 대현자로 묘사되는 인물이 자기는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며, 민주주의란 대등한 친구를 만드는 사상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인물이 실제로 하는 일은 민중에 대한 엄마놀이다. 기본적으로 민중을 우둔하고 어리석은 이들로 간주하면서, 조금은 더 깨어있는 자신이 민중을 돌보고 잘 키워서 그들이 대등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한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가 없던 이들이 이러한 판타지적 생각을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세상에 친구를 키운다는 개념도 있는가? 그러면서 대등한 친구관계라는 것은 어떻게 성립이 되는가?


제발 둘 중에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필요한 것은 친구인가, 자식인가?


지금 자신은 친구를 꿈꾸는가, 엄마를 꿈꾸는가?


이 둘을 다 가지려고 할 때 우리는 심리적 장애를 겪게 된다.


"아하, 나에게는 그를 친구로 사귀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에게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구나. 이 두 마음을 다 알아주면 되는 거구나. 그러면 경우에 따라 친구 역할도 하게 되고, 엄마 역할도 하게 되며 유연하게 살 수 있겠구나."


이것이 심리적 장애에 빠져 있으나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이들이 자주 보고하곤 하는 상태다.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철학적 개념이 있다. 이것은 쓸데없이 실체를 늘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심리학에는 더욱 유용하게 적용된다.


"쓸데없이 심리적 실체를 늘리지 말라."


우리는 마음을 자꾸만 여러 개로 늘리려는 이상한 경향성을 갖고 있다. 자기가 분열시켜 놓고 또 자기가 통합의 주체가 되려고 한다.


어떤 하나를 선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일을 한다. 자기는 양쪽의 선택지를 동등하게 다 알아주려는 입장으로만 무한정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양쪽으로부터는 최고의 권위를 얻어내려고 한다. 뒤집어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최고의 권위를 얻기 위해 일부러 선택하지 않으며 양극이라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는 이에게 삶이란 없다.


삶은 그 자체가 선택이다.


둘 중에 하나다.


소망형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 안에 '강한 마음'과 '약한 마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통합은 강한 것은 강해서 참 온전하고, 약한 것은 약해서 참 온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우리는 강해지고 싶은가, 아니면 약해지고 싶은가?


우리는 최대치로 강하게 살기를 소망하는가, 아니면 최대치로 약하게 살기를 소망하는가?


답은 정직하다.


삶은 마음의 소망이다.


이미 선택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소망을 따라 선택되어 있는 그 하나를 정확하게 살아가면 된다. 그것이 선택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참여(engagement)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은 이 참여의 길, 선택과 집중의 길이 전체를 다 얻는 길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소망하는 삶의 차원에서는 둘 중에 하나만을 하는 것이 둘을 동시에 사는 길이다.


내가 자주 드는 예로 이런 것이 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라는 문장과 "하루하루 죽어간다."라는 문장이 있다. 우리는 이 두 개를 다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삶도 온전하고 죽음도 온전한 것이지요, 라며 도사연을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왜인가?


진술로는 마치 서로 반대편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사실적인 차원에서 이 두 문장은 완전히 동일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만을 잘 하면 둘로 나뉘어 진술되는 듯하던 '동일한 현실'을 우리는 잘 살게 된다. 그것은 흡사 하나의 길을 걸었더니 우리가 가지 않은 길 또한 걷게 된 것 같은 그 감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분명 이러한 감각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둘 중에 더 나은 하나를 골라야 하는 '현명한 선택'에 대한 과제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도 된다. 통합하려 하지 않고 선택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현명한 선택이다.


그것은 바로 너를 향해 나를 오롯이 던지기로 한 그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좋다. 마음을 따라 너에게로 가기로 한 그 애틋한 결심이 드러났다면 그것이 결단이다.


나는 너뿐이라고, 우리가 저 파란 하늘을 향해 나지막히 되뇌여 보는 순간 이미 선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우리에게는 알려질 수 있다.


나는 너에게 이미 선택되어 있던 것이다.


나만 너이면 되었던 것이다.


너를 향해 가는 길에 버스를 타야 할지 지하철을 타야 할지를 고민하며, 버스의 장단점을 알아주고 또 지하철의 장단점을 알아주며 집의 현관문 앞에서 혼자 여여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어려움을 호소한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청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어떤 길로 갔으면 좋겠는가?


어떤 길을 지르밟고 나에게로 오시는 그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는가?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둘 중에 하나만 하면 된다.


그러면 반대쪽도 그 길로 함께 오고 있다. 길의 도중에서 하나의 나는 또 하나의 너를 만날 것이다. 이제 둘이서 하나다. 하나를 선택했더니 하나가 되었다.


우주에서 나는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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