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를 알아줘
나는 거리의 경계석 위에 앉아 있다. 지나는 차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침잠한다. 눈은 자연스레 감긴다. 조금 추운 공기에 다리를 꼬고 몸을 더욱 중심으로 모은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에는 담배가 타들어간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한 번씩 입가로 가져가 연기를 들이마신다. 그리고 내뿜는다. 끽연의 한 형식이다.
나는 경계석 위에 놓인 하나의 반가끽연상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고는 살짝 웃는다.
무엇을 사유하는가?
왜 이토록 모든 것이 무겁고, 눌어붙고, 머리가 아픈지를 사유한다.
하나의 반가끽연상은 모든 사람의 고뇌를 사유한다. 사람들이 왜 무겁고, 눌어붙고, 머리가 아픈지를 자기의 것으로 사유한다.
이러한 사유는 방법이 없는데 방법을 고민하는 사유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아니다. 속절없이 무기력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는 중이다. 담배연기만 허공에 태워댄다.
없는 답을 찾고 있는 척하기에 반가끽연상은 쓸쓸하지 않다. 모든 것이 무겁고, 눌어붙고, 머리만 아플 뿐이다.
답은 정해져 있어서 세상 어디에도 답이 없다. 그 답이 이루어지지만 않고 있을 뿐이다.
왜 이토록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단 말인가?
반가끽연상은 하루종일 그것만을 사유하며, 그럼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고민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나를 알아줘."
나를 찾아달라는 정도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특별한지, 또 내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이가 바라는 답이다.
모든 이는 반가사유상이다. 어떻게 하면 세상이 자기를 알아줄지를 고뇌하며, 그 고뇌의 모습을 세상 앞에 전시하고 있는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자신이 세상의 답이 되기를 바란다.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며 또 선량한지에 대한 그 답을 세상이 하루 빨리 맞추어주기를 바란다. 세상이 모르는 많은 시간 동안에도 자신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기까지 하는 큰 존재라는 것을 신속하게 눈치채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나를 알아달라고 반가사유상들은 경계석 위에 늘어서 담배나 피워댄다. 고뇌의 피곤에 절어 쓸쓸한 모습으로.
그러나 아직 쓸쓸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만이 이렇게 반가사유상이 된다.
쓸쓸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쓸쓸함은 사실 혼자인 상태가 아니다.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경험된다는 것은 자신 앞에는 반드시 자신과 비교되는 무엇인가 크고 대단한 것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쓸쓸함을 느끼는 일은 언제나 좋다. 쓸쓸함은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자신이 크고 대단한 존재라는 착각을 무너뜨려준다. 그리고 정말로 크고 대단한 것을 눈치채도록 돕는다.
세상에 대해 쓸쓸함을 느낄 줄 아는 이라면, 지금 세상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인지를 알아본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쓸쓸함을 느낄 줄 아는 이라면, 지금 그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 이인지를 알아본 것이다.
세상도, 누군가도, 다 너라고 부르겠다.
우리가 너의 크기를 비로소 발견했을 때 우리는 잠시 쓸쓸함을 경험한다. 그 기간은 "나를 알아줘."라는 환상이 포기될 때까지다. 쓸쓸함을 성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라면 정말로 오래가지 않는다. 쓸쓸함 자체가 나보다 큰 것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명징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라는 답을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답없는 상태는 사라지고, 우리는 진짜 답을 궁금해하며 이렇게 말하게 된다.
"너를 알고 싶어."
자신이 제일 크고 대단한 존재라는 착각을 완벽히 뒤로 하고, 이제 우리는 정말로 크고 멋진 너를 향해 움직일 준비가 된 것이다.
크고 대단한 세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크고 대단한 누군가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된 우리에게는 이내 답이 준비된다. 모든 것이 무겁고, 눌어붙고, 머리만 아프게 막혀 있지 않다. 열리고 계속 열려간다. 배우는 자의 특권을 가득 누린다. 크고 대단한 것이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와 그 자신도 크고 대단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 엄청난 특권을.
"나를 알아줘."에서 "너를 알고 싶어."로의 전환이 낳은 마법같은 현실이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쓸쓸했던 것이 아니다. 너를 무시하고 또 언제부턴가 다 아는 척하고 있어서 쓸쓸했던 것이다. 쓸쓸함에 담겨 있던 것은 너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소망, 오직 그것일 뿐이었다.
그런 너는 이미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크고 멋진가를, 또 그가 얼마나 크고 멋진가를 다만 노래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이미 내 앞에 있는 너를 단지 알아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네가 한참 전부터 경계석 위에 서있던 나를 알고 있던 까닭이다.
그처럼 쓸쓸한 내 곁에서 늘 함께하고 있던 것이 바로 너였던 까닭이다.
그런 너를 이제는 나는 노래하고 싶다. 내 삶의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