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상담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상담자가 버릇없는 애들을 친절하게 훈육시켜주거나 부모에게 올바른 부모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역할처럼 전락한 것은 미디어에 나오는 연예인의사들 때문은 분명 아니다.
상담자는 다만 희생양이 되어 있을 뿐이다. 교사들이나, 어린이집 선생님, 복지기관의 활동가들이 처한 처지와 같다.
나는 이 시대를 역대급으로 유치한 시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아동성애에 사로잡힌 시대라고도 부르고 싶다.
다 큰 성인들을 여전히 갓난아이처럼 돌보며 그들의 문제를 유능하게 해결해주고자 하는 초능력부모들이 박수갈채 속에 광화문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대다.
아이와 관련된 모든 주제는 과잉되며, 부모의 위상은 나날이 과장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부모의 죄책감이 어마어마해서다.
지금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부모에게 기대했던 크기만큼이나, 또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아 원망했던 만큼이나, 이제 자신들은 아이에게 친밀한 친구 같고, 다정한 연인 같고, 친절한 스승 같은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완벽한 부모역할에 대한 강박은 그대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된다.
자기가 부모를 우상화한 딱 그만큼 아이에 대한 죄책감은 형성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이 우상화된 부모상과 자신이 일치할 가능성이란 없다. 그러니 죄책감만 쌓여간다. 아이들 앞에 한없이 죄인된 기분을 경험한다.
이럴 때 상담자는 좋은 희생양이다.
부모가 아이를 똑바로 돌보지 못했다는 그 심리적 쓰레기는 이제 아낌없이 상담자에게 투기된다.
이에 발맞추어 철없는 아이들도 상담자를 타겟으로 삼는다. 자신들이 가진 부모에 대한 비난과 원망을 모조리 상담자에게 쏟아붓는 일이 당연시되며, 상담자는 이러한 공격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좋은 부모의 모습으로 지속하는 일에 안간힘을 쏟아야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데는 어떠한 방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늘날 국가가 자격도 역량도 없는 가짜상담자들 내지 상담사기꾼들을 나 몰라라 방조하고 있는 현실과도 연결된다.
심리적 쓰레기들이 투기될 쓰레기통이 많으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다. 국가가 부모들의 죄책감으로 인해 생겨난 고충을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부모들의 죄책감이 상담자들에게 전가되도록 놓아두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다.
상담자는 이처럼 거의 이 나라의 가장 비천한 최하위의 수드라 계급이 되어 있다. 그 자신이 쓰레기통이 되어, 쓰레기통 안에 함께 투기된 코묻은 돈으로 연명해야 하는 팔자다.
나는 진실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것도 나라인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또 상담자를 위해, 그렇게 가장 사회적 희생양으로 소외되어 있는 계층을 위해 기능하지 않는 것도 나라인가?
이것은 정당정치의 담론과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다. 오히려 진보는 보수보다 훨씬 더 좋은 부모에 대한 강박에 빠져 있다.
좋은 부모에 대한 환상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부모보다 나쁜 것이다.
아이가 미숙하게 자라나게 되는 것은 좋은 부모가 없어서가 아니라, 좋은 부모의 환상으로 양육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유행한 애착이론에 내포된 부모에 대한 환상을 해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리학적 연구가 이루어졌는지 아는가? 안정된 애착으로 양육된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보다, 소위 적절한 양육조건을 갖지 못한 아이들의 자존감이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3배 이상 높게 측정된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초급의 상담수련생이 곧잘 상담 슈퍼바이저에게 지적받는 단골의 레파토리가 있다.
자신이 얼마나 내담자에게 친절했는지를 수련생이 강조하며, 특히 청소년 내담자가 부모보다 상담자인 자신이 더 진짜 부모 같아 좋다고 말했다는 등의 얘기를 자랑처럼 보고할 때, 슈퍼바이저는 일단 한숨부터 쉬고 본다.
내담자에게 좋은 부모놀이를 하는 것이 상담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이 수련생의 갈 길은 멀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가 친척아이들이나, 어떤 모임들에서 어른들끼리 웃고 즐기는 동안 방치된 아이들과 대단히 잘 놀아준다는 것을 자기의 상담자적 적성이라고 간주하곤 한다. 아이들의 부모보다 자기는 더 이해심이 많고 다정한 진짜 좋은 부모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상담자의 적성이나 역량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히려 그 반대로 다만 상담수련생 자신이 그의 부모에게 고착되어 있는 미성숙한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즉, 그는 아직 상담을 할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좋은 부모가 되는 일과 상담자가 되는 일에는 진실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두 일이 동일한 어떤 현실을 가리킨다고 상담자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쓰레기통의 운명만이 상담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당신의 부모가 아니고, 당신의 친구가 아니며, 당신의 연인이 아닙니다. (특히 당신에게 딸랑이를 흔들며 당신의 모든 마음을 우쭈쭈 알아줄 광대는 가장 아닙니다.)"
모든 상담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상담자는 대체 누구인가?
내담자에게는 바로 '너'다.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보는 그 타자다.
부모와, 부모의 연장선상에서 펼쳐지는 그 모든 관계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내담자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부모 아닌 최초의 사람이다.
상담자가 정신과의사와 다르며, 또 보육교사와도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담자의 영역은 결코 정신과의사 및 보육교사와 겹치지 않는다. 상담자의 영역은 고유하다. 상담은 의료활동이 아니며 양육활동이 아니다.
상담은 실존의 체험활동이다.
개인이 처음으로 자아의 도구적 대상으로서가 아닌 말 그대로의 미지의 타자를 조우하고, 그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체험하는 활동이다.
그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 나라는 정답을 들이미는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 너라는 미답을 향해 떠나는 첫 여정이 될 것이다.
나는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
상담은 너를 향해 떠나는 활동, 분명히도 바로 그것일 따름이다.
나는 이런 글들을 쓰고 있으면 아주 많은 순간 혼자라고 느낀다. 홀로 외롭게 커다란 바위 앞에서 떠들고 있는 기분이 든다. 누구도 내 편은 없다. 바위 아래 쭈그려 앉아 하늘에서 날아올 초능력부모를 기다리거나,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아이들에게 날아가려는 이들만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계속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너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도 말한다.
네가 반드시 듣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고아이며, 과부이고, 나그네이며, 또 상담자다.
부모가 없어 혼자가 된 이들이 아니라, 혼자인 그들을 위한 나라가 없는 이들이다.
너는 혼자인 나다.
그리고 나는 혼자인 너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한 나라는 없지만, 이 두 영혼이 만날 우주는 있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자기 역할을 똑바로 하지 못해 혼자가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만나고 싶어 혼자인 것임을 이 영혼들은 안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이나 부모나 아이가 아닌 인간을 향하고, 인간을 만나가는 현실을 그리워했다.
우리는 실존주의의 우주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며, 그렇다면 이곳이 우리를 위한 장소다.
내가 너를 향해 혼자서도 말할 곳이며, 네가 반드시 너의 얘기로 알아 듣고 있을 곳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너의 얘기로 나는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싶다.
그게 내 마음이다.
상담자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