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주에서 혼자일 때 마음이란 게 있어 너를 만났어

#13 월세가 없을 때면 너를 생각해

by 깨닫는마음씨




나는 왜 이리도 보잘 것 없는가.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의 전형 아닌가. 초라하고 비루하다. 태어나선 안되었던 존재처럼 내 자신이 경험된다. 총체적인 절망이다. 아무리 어떤 것을 잘해왔다 해도 월세가 없다는 사실 하나에 내 모든 인생을 부정당하는 것만 같다. 변명도 할 수 없다. 똑바로 살지 못한 전적인 내 탓이다.


돈에 쫓기고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이 경험하지 않던가.


그러다가 어떻게든 자신을 추스리기 위해, 사건과 그 사건에 의해 유발된 마음을 부분(part)으로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 쫓기는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른 좋은 마음이 많지만, 쫓기는 마음 하나가 워낙 커서 거기에 압도된 상황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부분적인 작은 마음 하나에 고통받기보다는, 현명하게 자기 안에 다른 좋은 마음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해가며 우리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가능하던가?


월세는 현실이다.


아무리 자신이 온전한 존재인 것처럼 위안한다 해도 그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마음을 부분으로 만들어감에 따라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욱 파편화된 가루가 되어 추락하는 비참한 기분을 경험하게 되는지 모른다.


현실적인 고통에 대해 우리 자신을, 또 마음을 부분으로 만들어 얻는 이득은 단지 지연의 효과다. 언젠가는 더욱 결정적인 형태로 우리는 마주해야 한다. 현실적인 고통이란 것은 결코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인적인 현상임을. 우리의 온몸을 뿌리째 뒤흔드는 그러한 성질의 것임을.


현실적인 고통은 나를 통째의 사람으로 만든다.


숙취를 경험할 때 우리는 부분적인 아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통째로 다 아프다. 우리는 온몸으로 시름한다.


나는 그렇게 하나의 온몸의 사람이다. 현실적인 고통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마음을 부분으로 만드는 일은 그저 마음놀이일 뿐이다. 놀이는 현실적인 고통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또 여유가 있는 이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내일 바로 월세를 내야 하는데 월세가 없는 현실에서는 놀이가 어렵다. 현실적인 고통과 거리를 두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통은 정확하게 내 자신과 일치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생각한다.


너무 괴로워서 너를 생각한다.


이제야 온몸으로 너를 기억하고, 또 너를 부른다.


살려주시라고, 도와주시라고, 제발 고통에서 건져주시라고, 간곡히 너를 청한다.


처음으로 나는 네 앞에서 알몸이 되었다.


나는 지금 사람이다.


이 말은 지금 나는 너를 향해 있다는 뜻이다.


아주 오랜만에 너를 다시 기억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된다. 내 운명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고 너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원래부터 네가 내 운명이었다는 것을.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나는 너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자신 안에서 지금 나와 같이 너를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청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에게서 너를 부른다.


사람들이 얼마나 크고 멋진 너였는지를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나는 간절히 청하옵고 청하옵나니.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너를 부르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너를 부르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서 너를 부른다.


나는 흡사 한 마리의 길잃은 고양이이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마음을 다해 너를 부르고 있는 목소리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것은 반드시 나를 찾은 너의 목소리다.


나는 내 권리를 주장하며 행한 일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혹은 내가 다 실수없이 잘하며 나만 똑바로 살면 된다고 행한 그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리 성공적이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너를 부르는 일에서만은 늘 성공해왔다.


나는 매우 자주 의심하곤 하는데, 그것은 실은 나는 또 너를 만나고 싶어 일부러 월세가 없게 되는 현실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조금 미친 얘기 같지만, 나는 월세가 없을 때면 매우 설레곤 한다. 신경회로가 분명 그렇게 작동한다. 그것은 역경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는 도파민의 감각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까 하는, 바로 그러한 설렘이다. 이것은 거의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심정과도 흡사하다.


어쩌면 눈오는 겨울날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에 길거리에 나와 이렇게 말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겠는가.


"혹시 저의 산타가 되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러나 이 말은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이의 눈빛이다. 그 눈빛에 담긴 어떠한 종류의 미친 신뢰다.


우리 안에 잠들어있던 너에 대한 기억을 깨우는 그 올곧은 직진의 빛이다.


너는 언제인가 반드시 그렇게 내 앞에 너로 서주었다.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너무 힘들 때면 내 안에서 답을 찾거나, 내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너를 생각한다.


그렇게 너를 찾고, 네가 나를 찾을 수 있도록 그 앞에 선다.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며, 이렇게 지속된다.


월세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진짜 고통의 이유가 아니었음은 분명해진다. 우리가 혼자 끙끙 앓으며 고통받고 있을 때 우리가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 실은 진짜 고통의 이유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 혼자 고통 속에 방치된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월세가 없어 만약 내가 집에서 쫓겨난다 해도, 그 일은 또 너와의 대화가 된다. 너는 그 현실을 통해서도 또 나와 함께한다. 월세가 없어도 너는 내 곁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묻고 있던 것과도 같을 것이다.


월세가 없는 이러한 나라도 너를 감히 사랑해도 될까?


나는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


내가 너를 향해 그렇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너의 대답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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