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0

"조금 미친 얘기들의 메신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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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유전자라는 게 있을까. 그런 게 있다면 내 피는 분명 그 성분들로 짙다.


우리 집안은 내 위로 3대째 목사집안이었다.


외증조할아버지는 약초를 캐러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고양이처럼 몇 바퀴를 돌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두 발로 사뿐 바닥에 착지한 뒤 그 자리에서 엎드려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소박한 산골마을의 목사였다.


군사정권 시절 새벽에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기도 했고 정치에도 뜻을 두었던 친할아버지의 말년은 거의 칩거생활이었다. 손자 손을 잡고 행주산성에 도토리묵을 먹으러 가거나, 파고다공원에서 손자와 같이 놀다가 이문설렁탕에 들르는 일이 실은 제일 잘 어울리는 당신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는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신촌 바닥에서 뜨겁게 영혼을 불태우곤 하던 아버지는 대학교 시절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정적의 뒤에 당시 대통령 따님의 숨은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다가 어느 밤 검은 세단에서 내린 남자들에게 멍석말이되어 개처럼 얻어맞고 운동장에 버려진 뒤에는 힘이 전부라며 이를 갈았고, 군대에 다녀온 뒤로는 또 돈이 전부라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3대째의 목사의 가계는 시를 쓰고 조용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큰아버지에게로 이어졌다.


4대째를 이어받은 이는 아직 아무도 없다. 그나마 내가 가장 가까웠을지 모르지만,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끌렸던 것은 크리슈나무르티, 오쇼, 장자, 선불교와 같은 것들이었다. 유전적인 경향은 제도종교보다는 더욱 신비주의적인 방향성으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고자 하는 유기체적 지성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정치에 치를 떠는 이유는 단지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우리 집안의 내력과 관계되는 집단적 역동일 가능성도 높다.


반짝반짝 빛나던 종교적 감수성들이 정치와 얽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무뎌지고 투박해지며 결국에는 패망하게 되는지를 최소 이 가계에서는 3대째 경험해왔다. 애초에 신비주의란 예수가 그러했듯이 정치와 완전히 선을 긋는 전통이다. 곧, 신비주의는 종교적 유전자가 살아남고자 지향하게 된 필연적인 길인 것이다.


아마도 나는 이 가계에서 어느 시절보다 충만하게 종교성을 배양해가고 있는 세대인지도 모른다.


자아초월심리학의 석박사 과정을 마쳤고, 이어 종교철학의 석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체험도 많고 질적으로 깊다.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종교적 유전자는 아낌없이 그 형질을 꽃피우고 있는 중이다.


내가 곧잘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처럼 자신의 본성대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또 가계에 흐르는 정신적 핏줄대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처럼 소박한 종교적 생활인의 전통 위에 나는 같은 미소로 서있다.


어떻든 나는 그냥 심리학자라기보다는 종교심리학자다. 불가피하게 어느 하나를 떼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심리학을 떼어야 할 것이다.


'종교'를 '미지'라고, '심리'를 '마음'이라고 바꾸어 읽어본다면, 종교심리학은 미지의 마음을 향한 탐구다. 나를 더 잡아끄는 것은 단연 미지라는 단어다. 여기에는 자유의 울림이 있다. 더 크게 더욱 열린 어떤 현실에 대한 날갯짓이 들려온다.


종교란 아무튼 '여기'가 아닌 '저기'를 향한 것이다. 물론 '여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여기'는 '저기'의 속성처럼 새로이 환기된 여기임에는 틀림없다. 관습에 빠져 화석화된 여기가 아니다. 새로운 공기로 낯설어진 여기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오랜 동산의 향기처럼 왠지 모르게 친숙한 여기다.


종교적 유전자란 결국 고향을 향하고자 하는 유전자다.


가장 그리운 것들을 향함으로써 생명활동을 가장 성대하게 지속시키고자 하는 경향성이다.


그래서 이 종교적 동물들의 눈빛에는 늘 먼 곳을 향한 응시가 담겨 있다. 이들에게는 눈앞도 가장 먼 곳이다. 가장 낯설고 가장 미지이며 가장 초월적인 것이다.


먼 곳을 알아보는 그 시선으로, 그렇기에 먼 곳으로부터 들어온 그 시선으로 눈앞을 새로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먼 곳에서 온 심리학'이라는 제목을 생각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먼 곳에서 온 심리학'은 시간의 차원에서는 '미래에서 온 심리학'이며, 공간의 차원에서는 '이 세상 너머에서 온 심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은 그다지 익숙치 않아 말하기 힘든 것들, 또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더 짧게 말하고자 하는 시도다.


나는 이제 힘들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단 한 목소리만이라도 그 귀에 들릴 수 있도록 나는 아주 길게 말하고 또 말해왔다. 이해가 안가고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더 쉽게 설명하고자 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더욱 충실해야 했던 것은 나에게 이런 얘기들을 전하고 있던 저 '먼 곳'이었던 것이다. 더욱 성실한 청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나였다.


'미지'에 대해 '너'라고 부르는 일을 나는 좋아한다.


먼 곳에서 온 심리학은 그러니 미지로부터의 심리학이며, 너로부터의 심리학이다.


종교적 유전자는 너에게 쉽게 미치는 유전자다. 너만 있으면 된다고, 네가 전부라고, 너에게 아주 많이 미쳐 있는 그런 경향성이다.


그러니 너에 대한 모든 얘기는 다 조금 미친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조금 미친 얘기들을 듣는 일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내 귀에도 좋고, 내 영혼에는 더욱 좋다.


내가 조금 미친 얘기들의 메신저가 되어 내 입으로 말하는 일은, 실은 내가 가장 잘 듣고자 하는 일이다. 가장 충실한 청자가 되고자 나는 말하고 있다.


나는 너로부터 온 마음의 얘기가, 마음을 담은 너의 노래가 진심으로 좋다. 그 노래가 우주에 가득 울려퍼졌으면 좋겠다. 그러길 바라고 있기에 나는 노래의 청자이며, 노래의 메신저다. 기꺼이 그럴 것이다.


본 연작글에서 가장 긴 부분일 것임에 틀림없는 프롤로그는 이렇게 마무리되나, 유전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길을 떠났다. 조금 미친 얘기들이 만드는 선율을 따라 우리도 이동해간다. 먼 곳으로 우리는 노래를 따라 이동하는 철새들. 종교적 동물들. 이제 우리는 고향으로 간다. 너의 노래를 들으며.




Haruka Nakamura - 君のう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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