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풀어야 할 문제(problem)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명상을 요하는 신비(mystery)다.
그렇게 말한 이는 가브리엘 마르셀인데, 그는 우리가 같이 느끼는 일에 관해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제라고 한다면 실은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함께 깨닫거나, 또는 함께 답답해지기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문제다.
인간은 공동운명의 존재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던가. 우리가 경험하는 또 하나의 작은 문제는, 무엇인가 거대한 것에 대한 시적인 표현을 우리 자신과는 상관없는 추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즉, 거대한 것을 묘사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게서 먼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거대한 것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만큼 이 거리감은 더욱 심화된다. 그렇게 문제는 점점 더 풀리기에 요원한 영역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문제를 최대한 쉽게 풀려고 발명한 것이 실은 시다.
무엇인가 거대한 것을 향해서라면 시적인 표현만큼 사실적인 표현도 없다.
시가 시인 것은 언어를 통해 언어가 없는 공간을 담아내고 있어서다. 시적인 표현이란 공간의 자각을 돕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것이다.
공간은 우리가 함께 살 자리다.
가장 거대해야 하는 일이 지당하다.
자기비움, 내려놓음, 무아 등 여러 표현들을 쓰지만, 어떻든 깨달음의 핵심은 자기를 공간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거대한 것으로 회복할 수 있을 때는 자기를 공간으로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이다.
그렇다면 공동운명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공간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며, 이것만이 결국 문제다.
나에게 공간이 없으면 너라는 선율이 흐르지 못한다.
흐르지 못하는 것은 답답하며, 자기 자신을 더욱 작은 것으로 경험하게끔 한다. 가장 멋진 현실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니 우리는 생기를 잃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처럼 공허한 물음만을 되뇌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일로도 공간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죽는 일로도 공간이 될 수 있는 이것은 신비다.
그리고 이 신비로 말미암아, 함께 깨닫거나 함께 답답해질 수만 있을 뿐인 우리의 문제는 풀려간다.
인간이 우주를 닮았다고 할 때, 또는 인간이 하나의 소우주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공간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인간을 말하고자 하면 시가 된다. 그래서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시다.
시는 하얀 도화지에 찍은 하나의 점과 같은 것.
그 점은 자기비움의 점이다.
아무 것도 아닌 점으로 찍힘으로써, 정말로 거대한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하얀 빛으로 환한 것이, 끝없이, 자유롭게 펼쳐져 있다.
인간은 이 우주에 찍힌 작은 점과 같고, 우주에 곱게 그려진 시와 같다. 우리는 밤하늘에 수놓아진 저 별들의 운명이다.
저마다 한 점으로 찍혀 함께 공간을 알리며 노래한다.
어느 점이나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어느 점으로나 그곳이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공간을 발견할 기회도 무궁하다.
점과 종이 자체도 애초 다른 것이 아니라, 점이 이미 종이다. 점이 찍힌 종이를 흔들며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종이라고 답한다. 빨간 점이든, 파란 점이든, 한없이 다크한 투명에 가까운 벨라루스풍 인디언핑크의 점이든, 그것은 종이다.
우리는 이미 공간이다.
사느냐 죽느냐도 다 공간 위에 놓여 있다.
틸리히는 공간을 '존재 그 자체'라고 묘사하며 우리가 살든 죽든 존재 그 자체를 잃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했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것은 신비다.
내가 너를 잃을 수 없다는 게 어떻게 신비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서로를 잃을 수 없는 공동운명이며, 그 사실을 함께 깨닫는다. 그럴 수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시이기만 할 뿐이다.
유구한 저 밤하늘에 흐르는 별들처럼. 저 영원으로 빛나는 점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