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느낌을 어떻게 느낄까"
세상에는 귀여운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고, 귀여운 질문들도 아주 많이 한다.
"마음이 공유되는 거라면, 제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데 그 애도 저를 좋아하고 있었겠군요!"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귀여운 사람들이 지구에서 행복했으면 좋으련만.
귀여운 사람들은 자신의 귀여움으로 누군가에게 소유되기를 꿈꾸고, 그 반대로 자신이 귀여운 다른 것을 소유하기도 곧잘 꿈꾼다.
그래서 같은 느낌을 느끼는 현실이 어려워진다.
그걸 갖겠다는 의도 속에 있지 않을 때야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자신의 생각대로 소유하고, 통제하며, 조작하겠다는 그 모든 의도를 버리면 같은 느낌을 느끼는 현실은 그 즉시 찾아온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이를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격하게 갈망하고 있다 해서 그 또한 같은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자신이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그걸 가지겠다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의 등장인물일 뿐이다. 스스로 생각의 영화관을 만든 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안에 유폐시키고는 울고 웃고 화내면서 있던 것이다. 당연히도 영화관 밖의 실제 사람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실제에 접촉되지 않아 느낌이 끊어져 있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빠져, 또 그 이야기의 효과로 촉발되는 감정만을 소비하며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폐적이다. 소유와 통제와 조작을 위한 생각들이 우리를 자폐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살 때 우리가 아주 많이 하게 되는 오해가 있다.
자기는 자기의 마음에 아주 관심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는 오직 자기의 생각에만 관심이 많은 것이다. 실제의 마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 마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인가.
이미 말했다.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낯선 것이다.
여기에만 진실되면 된다.
진실되지 않은 방식은, 낯선 것에 이야기를 입혀 강제로 자기의 친구나 애인 같은 것으로, 또는 최소 자기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을 NPC 같은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그걸 가지려는 의도다.
가진다는 것은 그걸 자기보다 작은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그 안에 가질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떤 것을 갖는 일에 성공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보다 큰 것이 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보다 작게 된 그 낯선 것은 이제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 생각대로 요리조리 굴릴 수 있을 것 같은 성질의 것으로 간주된다. 자신이 그것을 포용하는 식의 이야기를 입힘으로써 그 생각을 더욱 강화하기도 한다.
이러면 같은 느낌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것은 생각을 통해 오히려 같은 느낌을 자기보다 작은 어떤 것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일이기까지 하다.
오늘날의 세상은 영양공급이 좋아져 많은 사람들이 귀여워졌다. 귀엽다는 것은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으로 작다는 어떤 뉘앙스를 함축한다. 그래서 귀여움에 집착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보다 큰 것을 더 많이 조우하게 된다. 자기가 계속 작게 유지되기를 선택한 까닭이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로 인해 자기보다 큰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게 될 가능성 역시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해서 펼쳐진 이 현실을 무시하고는, 자기의 생각대로 귀여움은 지속하면서도 두렵지 않은 상태 또한 얻어야 한다고 마법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다 갖는 마법은 물론 있다.
상대에게서 뺏으면 된다.
상대에게서 가지면 된다.
상대를 가지면 된다.
상대를 작게 만든 그 몫만큼 갖게 된 것이다.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할까?
'원래 크기 그대로'라는 뜻이다.
마법은 임의로 크기를 변형시키려는 것. 마법을 부리려고 하지 않으면 오히려 진짜 신비한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매일 아무리 긴 자서전을 써대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은 상태가 사라진다. 상대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마음이 통할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게다가 이것이다.
자기가 큰 것으로 경험하던 그것과 같은 느낌을 느끼는 이는, 자신의 크기 또한 그와 같이 큰 것임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상대에게서 뺏지 않으며 상대와 크게 나눌 수 있는 현실이 여기에 있다.
같은 느낌을 느끼며 사는 일은 우리가 좋은 것을 더 많이 함께 나누며 살 수 있는 길이다. 함께 성장하며 커지는 길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살 때 마음을 고급재로 써서 사는 것이며, 이것은 가능한 현실이다.
상대에게서 아무 것도 취하거나 탐하려 하지 않으며, 다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두기만 할 때, 이 현실은 펼쳐지기 시작한다. 꼬깃꼬깃 작게 접혀있던 것이 펼쳐져 너와 나를 잇는 다리가 된다. 종교(religion)의 어원적 의미는 '다시 연결하다.'이다. 바로 이런 현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어떻게?
상대를 '어떻게' 가질지에 대한 그 의도를 다 포기하면 그것이 방법론이다.
그 원래 크기의 것을 존중하며, 그 크기를 생각의 이야기로 훼손하지 않고, 다만 그것의 가까이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흘러들어온다.
낯선 것이지만, 진실한 것이.
마음이.
지금 그 멋진 것을 같이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