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느낌"
마음을 느낌이라고 바꾸어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원래 느낌이라서다.
옛 경전들에서는 진동이라고 한다. 울리는 것이며, 떨리는 것이고, 설레는 것이다.
살아 있어서.
존재할 아무 이유도 없는데 존재하고 있어서.
느낌은 존재의 기척, 존재의 낌새, 존재의 기운, 바로 그것이다.
과학이 철학이나 종교와 대립한 적이 있던가. 표면적으로 그런 것처럼 보일 때는 있었어도 실제로는 없다. 과학은 언제나 철학 및 종교를 위해 봉사해왔으며, 심지어는 그것들의 구원자였다.
과학은 쭉정이를 날리는 체와 같다. 철학이 논리적 사변으로 빠지고 종교가 표층적 문자주의로 빠짐으로써,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해있을 때 과학은 그 거짓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기능을 한다. 이를 통해 종교는 상징으로서의 힘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철학은 다시 삶을 직관하는 힘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데거, 마르셀, 메를로퐁티 등의 철학자들이 묘사하고자 해왔던 것들, 또 종교적 비유로서 묘사되어 왔던 것들을 오늘날 인지과학의 연구들이 의도치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지지하게 된 현실은 기껍기만 하다.
"나는 세계가 느끼는 것을 느낀다."라고 말하면, 음, 참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이네, 라고 반응하는 일은 정당하다. 동시에 이제는 표현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이는 일 또한 아주 정당하다.
우리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느낌을 느끼도록.
내가 줄기차게 말하고자 해온 내용은 이와 같다.
"우리는 같은 것을 느낀다."
또 이렇게도 말해왔다.
"마음은 공유재다."
집단무의식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현재 이 느낌의 신비다.
몸의 형상이 다르지만 그 구조가 공통적이기에 신비롭게도 우리는 서로 다른 몸의 형상으로 동일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얼마 전 설레는 마음만을 따라 오랜 시간 수련을 해오신 한 선생님의 아주 멋진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젊을 적에는 몸을 부정하고, 궁극의식, 영원한 나, 불멸하는 영혼 등의 언어들에 탐닉했던 분이 지금은 몸 얘기만 한다고 하신다. 명상지도를 할 때 수련생들에게 마음챙김(mindfulness)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그 분의 방식은 정말 영롱했다.
"마음챙김, 그거요. 우리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놓는 거예요. 어디 가지 말라고."
난 어찌나 즐거운 웃음이 나왔는지.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마음을 챙기는 일이다. 과거나 미래 또 생각들의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어 미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마음을 챙기러 가서 여기 집[몸]으로 데리고 오는 일이다.
내가 마음챙김 같은 명상의 기제를 비판할 때는, 구렁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우주의 중심에 정좌해 자기가 약하고 안쓰러운 모든 마음을 다 알아주고 받아주겠다며 자상한 엄마흉내를 내고 있는 어떤 기만의 모습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과 지금 이 묘사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현대철학에서 다루는 중요한 소재는 분명 몸이다. 타자에 대한 담론도, 대화에 대한 담론도 다 이 몸에서 나오며, 삶과 직결된 것이 또한 몸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체성이라는 표현으로 몸의 어떤 핵심적 속성을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결국 느낌을 지시한다.
느낌은 몸의 기척, 몸의 낌새, 몸의 기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우리는 소리굽쇠처럼 이미 자연스레 상대의 몸을 느끼며, 그 마음을 공유한다. 함께 진동한다.
나는 어떤 오컬트적 비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자연과학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상적으로 쉬이 경험되거나 생각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자화상이 언어기반에 묶여 있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가 우리 자신을 만들어준다고 믿고 있을 때, 이러한 언어는 필연적으로 사실적인 몸을 떠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실제의 몸이 없어도 언어에 근거해 우리 자신이 성립될 수 있다는 착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초라하고 약한 '실제의 몸'보다 고상하고 수준 높아보이는 '언어의 몸'으로 갈아타는 일은 일종의 마법같이 생각된다. 새로운 영혼불멸설의 출현이다.
이처럼 언어를 몸보다 우위에 두고, 또 몸으로 살아가는 사실적인 삶보다 권위를 두고 있는 동안에는, 느낌이 공유되는 현실은 어디 외계인들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아주 먼 곳에서 온 이야기처럼 경험된다.
우리에게 어떤 지평이 먼 곳으로 경험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우리의 몸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신체성이다.
실제의 몸과 일치되어 있는 이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심적으로 그렇게 멀게 느끼지 않는다.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그에게는 현실적이라서다. 그만큼 그 일치된 몸에는 힘이 넘쳐 흐른다.
나는 설렘이 힘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없다면 지금 하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떨림은 언제나 우리가 그 일을 실제로 집행할 힘이 있기에 생겨난 가능성 때문에 떨리는 것이다.
실제의 몸은 힘덩어리다.
우리 자신도 아직 다 그 전모를 알지 못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의 보물창고다.
그러나 우리의 몸만 그러겠는가.
우리가 상대가 느끼는 것을 느낀다고 할 때, 우리는 바로 상대에게서도 이러한 것들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불가능성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아내 설레고 있는 그 생명의 기척을, 낌새를, 기운을 우리는 경외롭게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말한다.
존재할 아무 이유도 없는데 존재하고 있는, 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실증하는 바로 그 위대한 존재로서 서로를 지금 느끼고 있는 이것이 마음이다.
이 우주에 생명이 출현한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하물며 인간은 어떨까. 얼마나 말도 안되는 기적의 확률을 뚫고 지금 우리는 인간으로 서로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특이점은, 존재하는 것을 함께 느낀다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느끼고 있다는 그 사실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인간은 존재의 사실을 경배할 줄 알며 찬송할 줄 안다.
나는 확언하는데,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함께 노래하기 위해서다.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인 사실을, 바로 그 기쁨의 소식을 이 우주 끝까지 널리 전하기 위해, 그 소식으로 이 우주를 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는 함께 노래하고자 이곳에 왔다.
먼 곳에서부터.
같이 느끼고자.
같은 느낌으로 설레며, 이 노래를 하늘 높이 성대하게 울리고자.
삶은 느낌의 축제다.
몸은 그 축제장. 아주 선량한 옛 마을의 댄스파티. 너와 내가 함께한다. 같은 느낌 속에서. 우리를 고요히 비추는 밤하늘의 별들도 이렇게 운행하고 있다.
먼 곳에서부터 이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