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5

"화가 멈추는 자리"

by 깨닫는마음씨




이따금은 자기계발적 얘기도 해볼까 한다.


마부에게 아무리 채찍을 맞아도 움직이지 않던 늙은 말 앞에 엎드려 오열했던 것은 니체였고, 그게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활동이었다.


니체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멀었던 적이 없다.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만나 2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나를 도운 것은 니체였다.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몇몇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 예언자였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을 듣는 이들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리는 북극성의 소리를 듣는 이들이다.


당연히 조금 미친 이들이다.


미친 이만이 삶이 너무 괴로워 미칠 것 같은 이들의 마음을 아는 법이다.


아주 먼 곳에서도 그 이해의 마음은 전해진다.


이 사람 혹시 내 마음 알고 있나, 이들의 얘기를 접할 때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가까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때, 먼 곳에서 오히려 이해는 날아온다. 인간의 옆에 반드시 인간이 서있는다.


니체는 평생을 화 속에서 살며 화와 친했던 인물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하나의 다이너마이트다."


이 선언 그대로다. 니체는 화를 아주 창조적으로 쓸 줄 알았던 사람이며, 그의 철학은 오롯이 그 결과다.


니체가 화가 많이 났던 이유는, 그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 미쳐갔다. 150년을 앞서 살았다. 150년 뒤의 포스트모던의 철학자들은 니체를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이제 니체는 성실한 예언자로서 정당한 이해와 평가를 얻고 있는 것 같다.


니체가 심리학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다. 니체의 철학 자체가 심리철학이었다. 실존주의 심리학은 니체와 하이데거를 핵심적인 축으로 아예 두고 있을 뿐더러, 정신분석은 니체의 방법론에 대한 프로이트식의 변주라고도 할 수 있다.


더욱 니체가 평가되는 지점은 종교성이나 영성을 다루는 분야에서다. 니체는 허위적이고 억압적인 표층적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개인이 직접 종교적 실재를 향해 가는 영성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단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직접 영성 등과 같은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그의 철학에 내재된 신비주의적 색채는 명징하며, 그것은 니체가 종교체험을 상당수 경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성 및 영성의 길은 니체처럼 화를 잘 쓰는 길이다. 역으로 한 개인이 화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그의 종교적 깊이 또는 영적 깊이를 평정해주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화와의 관계성이 미숙할 때는 보통 두 형태로 드러난다.


하나는 화를 억압하는 것이다. 자기는 수련을 많이 하고 놀라운 체험을 해서 이제 화의 문제가 사라졌다고 믿는 이들에게 억압의 경향성은 두드러진다.


이 억압이 억압이 아닌 척 교묘하게 작동할 때는 자신이 오히려 화가 나있는 다른 이들을 품어주려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렇게 자기는 화를 돌볼 줄 아는 화보다 상위의 존재인 것처럼, 그럼으로써 화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인 것처럼 입지화하려는 의도다.


또 다른 형태는 모종의 종교체험을 반복하기 위해 화를 남용하는 것이다. 즉, 동일한 체험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수행의 기전으로 쓰는 것이다.


종교체험의 구조라는 것은 이러하다. 한 개인이 외부에서 야기된 커다란 고통이나 또는 스스로에게 가한 커다란 고통 속에 있을 때, 또 그 고통의 시간이 지속되고 있을 때, 결국에는 뇌가 몸이 받는 고통을 해소하고자 이완을 위한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그러면 아주 거대한 이완감과 함께 종교체험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찾아든다.


모든 것이 여여하게 느껴지고, 자신이 왜 지금껏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그토록 위축되어 애쓰고 쫄아 살았는지 헛웃음이 나오며, 세상이 다 자신을 축복하듯이 친절하게 열려져 있는 것으로 경험된다. 누군가는 태양이나 나무가 자기를 향해 웃고 있는 부처님으로 보이기도 하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그 모든 심리신체적 효과나, 환각, 환청 등의 현상까지 다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뇌가 이루어낸 일들이다.


그래서 많은 수행방법론들은 수행자들이 종교체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통을 증가시키는 구조로 곧잘 구성된다. 그 고통에서 도망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 결국에는 뇌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종교체험 내지 신비체험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다 고통과 몸의 신경생리학적 현상이다.


매트릭스의 네오 같은 것이 되거나, 어느 4차원 세계의 초능력 같은 것을 자기가 얻게 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이들은 매우 자주 자기가 깨달았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이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이완의 마약반응이 아니다. 깨달음은 존재의 사실에 관한 매우 직접적인 현실경험으로 찾아온다. 이를 통해 존재의 사실에 관한 지혜가 그 세포에 자리잡는다. 마치 중력의 법칙이 자기의 현실에 처음 새겨지게 된 그런 감각이다. 아주 명징하고 선연하며, 비현실적이지 않다.


상기한 류의 체험들이 깨달음이 아니라는 방증은 그 체험자들이 동일한 체험을 반복하기 위해 화를 남용한다는 사실로 또한 분명해진다. 깨달으면 체험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계속 화를 축적했다가 이완시키곤 하는 그 일을 힘들게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흡사 이것은 체험중독의 상태와 같다. 종교체험 및 신비체험은 분명한 중독의 소재다.


체험에 중독된 이들은 자기가 그 체험을 했던 방법론을 계속 반복하며, 다시금 화를 쌓아갔다가 그 끝에서 뇌가 해소해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원해 자신을 찾는 이에게도 동일한 일을 시킨다. 글쓰기를 시키고, 춤동작을 시키며, 주문암송을 시킨다. 그러면서 자기가 스승인 줄 안다. 같은 중독의 상태일 뿐이다.


중독이 어려운 것은 결국에는 자극이 역치에 도달해 처음 같은 감각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동일한 상태를 지속하기란 불가능하다. 갈수록 '뿅 가는' 느낌을 얻기가 힘들어지며, 종국에는 무감해진다. 불감증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는 불같이 화만 나게 된다.


아무리 해도 처음의 그 좋은 상태를 얻을 수 없기에, 흡사 노력해도 먹이를 얻을 수 없는 햄스터처럼 방방 뛰며 분노하다가 이내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인생의 낙이란 동일한 체험을 얻기를 원하는 이를 제자처럼 가르치는 일뿐이다. 그 일만이 체험중독 뒷방늙은이가 유일하게 생기를 얻는 순간이 된다.


나는 부모님도 없고 몸도 약한 데다가 자존심만 세서 늘상 버티는 일이 습관이 되어 있던 관계로, 사춘기 시절부터 종교체험 및 신비체험을 많이 했다. 그게 그런 체험인 줄도 모르고 사람들도 다 이러한 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과 소통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수록 이해받지 못한다는 화만 더 쌓였고, 그 화는 다시금 또 다른 체험을 만드는 일에 투입되곤 했다. 그대로 계속 살았으면 영락없는 중독자 뒷방늙은이의 신세였을 것이다.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니체가 자신이 한 체험에 고착되어 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니체의 이름을 기억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화를 억압하거나, 화를 남용하는 두 가지의 미숙한 형태가 아니라, 화를 제대로 쓸 줄 알았다. 그 화에 대한 지혜로 영적 길을 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예언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니체는 화가 정말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끝내 도달하고야 말았다.


화는 왜 나는가?


화는 항복을 위해 난다.


항복하는 것이 출현하면 화는 바로 멈춘다. 화의 목적은 항복이다.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화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


니체의 시대에는 아무도 니체의 거대한 얘기들에 항복하는 이가 없었다. 두려워하거나 또는 내심 끌리면서도 항복만은 하지 않았다. 니체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작 사람들이 니체의 얘기 앞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항복하지 않기 위해.


니체는 그 모습을 보았다.


마부에게 끝없이 채찍으로 맞으면서도 버티고 있는 늙은 말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모습,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리라.


우리의 비극적인 운명이었으리라.


그리고 니체는 결국 도달했다.


항복하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그래서 화가 그치지 않을 때, 그 화가 정확하게 쓰여야 하는 방향을.


화는 항복을 위해 쓰인다.


항복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니체는 말 앞에 엎드렸다. 최초로 항복한 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열했다.


이것은 미친 울음, 그리고 미친 웃음이었다.


나는 니체의 이 삽화에서 분명하게 선(禪)을 읽는다.


나에게서도 부질없는 종교체험 및 신비체험의 역사가 멈추게 된 것은 한 선사와 만나면서였다.


그는 도무지 나에게 무언가를 시킨 적이 없다. 명상이나 요가 등의 그 어떤 수련법도 시행하지 않았다. 우리는 앉아서 대화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항복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만 같다.


처음에는 그가 고집센 나에게 먼저 항복해주었고, 그 다음에는 내가 계속 항복했다. 항복하고 또 항복했다. 끝없이 항복했다.


내가 그를 끝없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화는 모두 항복의 힘으로 바뀌어, 사랑하는 일에만 쓰이게 되었다.


종교적 길 또는 영적 길의 핵심이란 결국 이 항복(surrender)의 감수성이다.


아주 거대한 에너지인 화는 이 항복을 출현시키기 위해 생겨나며, 그래서 화는 실은 영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항복으로 바로 간다면야 화를 동원해서까지 갈 필요는 없어진다. 그러나 또 역설적으로 화를 통해서야 우리는 항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곤 한다.


화가 멈추는 자리는 니체가 늙은 말 앞에서 엎드린 자리, 전적으로 항복한 그 자리다.


그 지점에서 니체는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다. 공식적인 활동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가 몸으로 철학해낸 그 메시지는 시공을 초월해 먼 곳으로부터 온 이야기가 되어, 미칠 것 같이 괴로워하고 있는 무수한 이의 가슴에 닿는다.


그들이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사실적으로 알려준다.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항복의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면, 이런 것이 진짜 자기계발이다. 이것은 진짜로 자기의 인생을 180도로 반전시켜 완전히 변혁시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은 이런 글을 써본다.


항복하는 자가 이 세상에 없다면, 항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또 그렇게 니체를 기억하며. 내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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